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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0)… 행불인유족회 발족 이후 적극 대응

행방불명 희생자 5천여명에 달해
2000년 3월 13일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4‧3행불유족회)가 창립됐다. 그날 제주시 신산공원 옆 제주관광민속관 공연장에 모인 행방불명인 유족 400여 명은 “4‧3 당시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생명을 빼앗긴 이들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과 4‧3 진상규명을 위해 치열한 활동을 할 것”을 선언했다.

 

 

이날 창립대회에서 공동대표 김문일‧박영수‧송승문‧이중흥‧한대범과 감사 강성열‧김영훈이 선임됐다. 행불유족회는 4‧3 당시 집단학살 암매장지로 예상되는 제주비행장(정뜨르)을 비롯한 학살터에 대한 자료조사와 시신 발굴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법회의 등을 거쳐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가 6‧25가 터지면서 대부분 집단 처형됐다. 군 당국의 선무공작에 따라 “살려 준다”는 말을 믿고 하산했다가 목숨을 잃은 청년들도 많았다.

 

또한 제주도내에서 예비검속이란 미명 아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 행불 희생자 수가 5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그런 희생자들의 죽음도 억울한 일이지만, 그 가족들의 고초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좌제란 올가미에 걸려 제대로 취업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피해의식 때문에 한때는 유족 스스로가 아버지, 형 등 행방불명된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왔다. 아니, 그 어머니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이야기를 못하도록 막기까지 했다.

 

부모형제의 사망일조차 몰라서 생일날에 제사를 치르고 숨죽이며 보내온 회한의 세월들, 벌초 때가 되면 가족의 무덤이 없음을 한탄하며 가슴앓이해온 유족들, 그 유족들 중에는 시신은 없지만 고인의 옷가지 등을 묻은 ‘헛묘’를 만들어 고인을 기리는 사람도 있었다.

 

4‧3유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의 시신을 찾아 매장한 유족과 그렇지 못한 유족의 한은 달랐다. 스스로가 ‘기막힌 인생들’이라고 밝힌 그들이 행불유족회 결성을 계기로 당당히 나선 것이다. 한이 깊었던 만큼 그들의 결속력도 강했다.

 

‘수형인 명부’ 발굴이 결정적 계기
이렇게 4‧3행불유족회가 발족하기까지는 ‘수형인 명부’ 발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9년 9월 추미애 국회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로부터 입수하여 공개한 4‧3 당시 수형인 명부는 군법회의 1,650명, 일반재판 1,321명 등 모두 2,971명에 이르렀다.

 

그 수형인 명부를 통해 가족의 이름을 확인한 행불인 유족들이 알음알음 모이기 시작했다. 4‧3 군법회의 등이 판결문도 없는 ‘탁상재판’이란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그들은 더욱 힘을 냈다.

 

행불유족회 결성 과정에서 4‧3 관련단체의 도움도 컸다. 4‧3도민연대는 여러 형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4‧3연구소는 수형인 명부 등을 통해 행불 유족들을 찾는 데 일조했다.

 

4‧3행불유족회가 결성 후 처음 거행한 행사는 ‘행방불명인 진혼제’였다. 2000년 4월 5일 제1회 행방불명인 진혼제는 유족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 옛터에서 봉행됐다.

 

 

주정공장 창고는 4‧3 당시 하산했던 사람들이 심문받기 위해 감금되기도 했고,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기 앞서 수감됐던 유서 깊은 곳이다. 행불유족회 송승문 공동대표가 유복자란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주장공장 창고(현재의 현대아파트 자리)이었다.

 

행불 유족들은 그해 5월 15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진행된 ‘4‧3유적지 전국 순례’에도 참여했다. 4‧3도민연대가 처음 주최한 이 행사는 4‧3 행불 희생자들이 머물렀던 육지 형무소와 학살터를 돌아보고 5‧18기념공원 등 민주 성지를 참배하는 순례였다.

 

특히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된 곳으로 추정되는 경북 경산시 코발트 광산터와 달성군 가창면 가창댐,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학살터인 대전시 동구 낭월동 속칭 ‘골령골’에서는 50여 년 만에 처음 치러지는 ‘눈물의 위령제’도 있었다.

 

 

행불유족회는 그해 7월 8일에 골령골을 다시 찾아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위령제에는 대전 출신 김원웅 국회의원과 대전시민단체 대표들도 참석해 학살 진상규명의 연대 가능성을 높였다.

 

이런 행사 등을 통해 전의를 다진 행불유족회는 보수진영의 4‧3 폄훼 시도에 맞서 맨 앞에 나서서 온몸으로 대응하게 된 것이다.

 

4‧3 폄훼에 유족들 적극 대응
4‧3행불유족회 발족은 4‧3 진상규명운동에 큰 힘이 됐다. 행불유족회는 창립대회에서 밝혔듯이, 4‧3 진상규명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기존의 4‧3민간인유족회가 유족 복지문제에 비중을 두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앞에서 밝힌 바 있지만, 4‧3민간인유족회는 1988년 태동할 때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다. 유족회가 1991년 첫 위령제를 주최할 때 당시 유족회장(경찰 출신)은 추도사에서 “4‧3은 엄연한 공산폭동인데 민중봉기라 왜곡하는 현실을 보다 못해 분연히 일어나 힘을 모았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 당시 유족회의 시각은 ‘이미 공산폭동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웬 진상규명이냐?’는 식이었다. 무장유격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반공 유족들이 유족회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6년에 이르러 토벌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 회장단을 장악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민간인유족회가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진상규명운동 세력의 일부로 편입하게 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념 논쟁 등 보수진영의 책동에 대응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4‧3행불유족회가 발족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행불유족들은 보수진영의 4‧3 폄훼 시도에 적극적으로 나서 맞서기 시작했다. 민간인유족회도 이에 자극을 받아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움직임은 1999년 10월부터 시작된 ‘4‧3계엄령 송사’였다. 이 송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가 제민일보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한 소송인데, 재판은 이른바 ‘수형인 명부’ 발굴사실이 알려진 직후에 열렸다.

 

공판이 열릴 때면 행불유족들이 제주지방법원 재판정으로 몰려들었다. 그때는 행불유족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하기 전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숫자가 늘었다.

 

행불유족회는 발족 직후부터 4‧3단체들과 연대해서 보수진영의 헌법소원 심판 청구사건과 4‧3시행령 제정을 둘러싼 파동에도 적극 나섰다. 또 행정자치부가 법제처에 제출한 4‧3시행령 최종안이 관 주도로 개악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는 유족들이 4‧3관련단체와 합동으로 항의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제주반란” 발언 사무총장에게 사퇴 촉구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발언 파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해 9월 25일 한나라당 김기배 사무총장의 ‘제주 반란’ 발언 파문이 일어나자 4‧3진영이 총공세에 나섰다.

 

한나라당 총재단 회의에 앞서 박희태 부총재가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제주에서 열리는 것에 빗대어 “북한 사람들은 서울보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하자 김 사무총장이 “제주도는 반란이 일어난 곳이 아니냐”고 받아쳤다는 것이다.

 

총재가 입장하기 전이어서 여담처럼 한 말이지만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9월 27일 4‧3 관련 7개 단체 대표들이 한나라당 중앙당사를 항의 방문했다. 단체 대표로는 민간인유족회 이상하 부회장, 행불유족회 송승문 공동대표, 백조일손유족회 이도영 이사, 재경유족회 허상수 상임위원장, 도민연대 고성화 공동대표, 연구소 김창후 부소장, 범국민위 고희범 운영위원장 등이었다.

 

이들을 한나라당 최병렬‧양정규 부총재, 현경대‧원희룡 의원 등이 맞이했다. 발언 당사자인 김 사무총장은 “그 발언은 4‧3을 의식해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주도민과 4‧3 희생자 유족들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의 심정으로 사과한다.”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항의 방문단은 당사자의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고 강하게 촉구했다. 특히 행불유족회 송승문 공동대표는 “나도 한나라당 당원이지만 탈당하겠다. 김 총장도 사퇴하라”고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 자리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김 사무총장이 들어서면서 항의 방문단에 악수를 청하자 현경대 의원 보좌관인 양창윤이 큰 소리로 “뭐 잘했다고 악수를 하는 거야! 당직자가 똑바로 해야지”라고 일갈한 것이다.

 

양창윤 씨는 그날의 일을 회고하며 “지역구 의원들이 앞장서서 4‧3특별법도 만들고, 뭔가 4‧3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던 차에 당직자가 신중하지 못하게 찬물을 끼얹은 격의 발언을 해서 격분했다.”면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의도적인 발언이었다.”고 말했다.

 

이 발언 파문은 한나라당이 공식 사과를 표명하면서 일단락됐다. 어쩌면 해프닝성 발언으로 그칠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적극 대응한 것은 그만큼 4‧3진영이 강화됐음을 의미한다. 4‧3진영은 4‧3특별법 쟁취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여기에 행불유족회까지 가세하면서 전력이 배가된 것이다. 이 항의 소동은 이제 보수 정당에서도 4‧3을 두고 ‘반란’이란 용어를 함부로 쓸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효과를 가져왔다.

 

[제주경찰사] 파문에도 시위 앞장
2000년 11월 24일 제주경찰청 청사 앞에서 4‧3유족들과 4‧3 관련단체 관계자 등 300여 명이 모여 경찰을 규탄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제주경찰사 4‧3역사 왜곡 규탄 도민대회’란 긴 이름이 붙은 항의 집회였다.

 

그날 찍힌 한 장의 사진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경찰을 규탄하는 인파와 플래카드 맨 앞에 선 사람이 오른손을 번쩍 들고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다. 그는 바로 4‧3행불유족회 이중흥 공동대표였다.

 

 

이 대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 모르고 살았다. 그는 4‧3 당시 제주읍 연동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갑자기 주정공장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는 막연한 이야기만 있을 뿐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모른 채 50여 년의 세월동안 가슴앓이 해왔다.

 

그런데 1999년 발굴된 수형인 명부를 통해 부친이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해 무기형을 언도받고 마포형무소에 복역했던 사실, 6‧25 이후 행방불명된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후 행불유족회 결성에 앞장섰던 그는 경찰의 역사 왜곡에 분노를 느끼고 50여 년의 한을 토해내듯 이날 선봉에 나선 것이다.

 

북촌 학살사건을 ‘공비 소행’으로 왜곡
4‧3에 관한 관변자료는 문자 그대로 왜곡 투성이었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가해자를 완전히 뒤집어 기록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4‧3의 진실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이런 왜곡된 관변자료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제주경찰사』이다.

“경찰관 순직 120명, 민간인 피살 1,330명, 공비 사살 7,895명. 공비는 사살자 이외에도 7,061명이 생포되었으며 2,004명을 귀순시켰다.”

 

“2월 15일 세칭 <북촌사건>이 발생했다. 이 마을을 습격한 공비들은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 남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납치해 갔다. 토벌대가 공격해 가자 공비들은 일부는 산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마을로 숨어들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장시간 소탕전이 벌어지고 북촌리는 황폐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

 

1990년 제주도경찰국이 발간한 제주경찰사에 나오는 글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4‧3 사망자 숫자는 ‘9,345명’에 불과하다. 또 ‘폭도’ 혹은 ‘빨갱이’로 지칭된 공비의 숫자는 ‘16,960명’(사살자, 생포자, 귀순자 포함)에 이른다. 4백 명 가까운 주민이 군인에 의해 학살된 북촌 사건은 ‘공비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가해자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오라리 방화사건’을 비롯하여 왜곡사례가 수두룩했다. 1990년대만도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이 공공기관 발간물에 버젓이 실리곤 했다.

 

나는 제민일보 1991년 1월 5일자에 “엉뚱한 ‘4‧3희생자’ 집계”란 제목으로 제주경찰사의 왜곡사례를 지적하는 기사를 썼다. 다른 4‧3 희생자 통계 자료를 열거하면서 경찰사의 ‘사망자 9,345명’은 축소 의혹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북촌 사건, 오라리 방화사건의 왜곡 사례도 지적했다.

 

10년 전 왜곡 지적 땐 제주경찰 마이동풍
그러나 경찰 당국은 마이동풍이었다. 이런 중대한 왜곡사례가 지적됐음에도 누구 하나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4‧3유족회 등이 나설 일이지만, 그 때는 반공 색채를 띤 유족회여서 오히려 경찰 쪽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

 

경찰은 되레 4‧3취재반의 활동을 압박해왔다. 「4‧3은 말한다」가 연재될 때마다 경찰관들이 증언자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 증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다. 증언자들은 불쾌해 하면서도 심한 심적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더 이상의 증언을 꺼리기도 했다.

 

취재반으로서는 제주경찰사를 수정하는 작업보다는 「4‧3은 말한다」 연재를 지키는 것이 더 화급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 없어서 ‘공비의 소행’으로 가해자를 뒤바꾼 북촌리 민간인 학살사건을 희생자 제사 날짜에 맞추어 심층 보도했다.

 

제민일보 1991년 2월 4일자 톱기사의 제목은 “40년 한 서린 ‘무남촌(無男村) 제삿날’ / 한날 한 마을서 주민 4백 명 학살”이었다. 그 사건의 가해자는 ‘2연대 3대대 군인들’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 후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0년 10월 제주경찰사 개정판이 나왔다. 그런데 경찰 당국은 10년 전에 문제가 제기됐던 4‧3 관련 왜곡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실었다. 그 10년 사이에 4‧3 연구는 대단한 진전이 있었다.

 

4‧3유족회도 그 대오가 정비되어 반공색채가 사라졌고, ‘행방불명인유족회’까지 발족된 상태였다. 상설조직인 4‧3도민연대 등 관련단체도 강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로 ‘4‧3특별법’이 제정됐고, 4‧3위원회가 발족되어 정부 차원에서 진상규명 작업도 나선 터였다.

 

경찰은 이런 변화를 간과한 것이다. 제주경찰사󰡕개정판의 4‧3 관련 왜곡 사실이 알려지면서 4‧3진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유족회와 4‧3 관련단체들은 ‘4‧3역사 왜곡 제주경찰사 발간에 따른 도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경찰사 전량 회수 폐기와 관련자 문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4‧3역사 왜곡 제주경찰사 발간 도민 대책위원회’는 4‧3민간인유족회, 행불유족회, 4‧3도민연대, 4‧3연구소, 민예총제주도지회 등 5개 단체가 참여했고, 공동대표로 김상철, 김창후, 문창우, 박창욱, 이중흥이 선임됐다.

 

이 연합단체가 중심이 되어 제주경찰청 청사 코앞에서 제주경찰청장의 사퇴와 『제주경찰사』의 전량 폐기를 요구하며 도민규탄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어 11월 30일 제주경찰청 회의실에서 경찰 간부와 도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 사이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회동은 3시간 이상 진행됐으나 결말을 내지 못했다.

 

대책위 측은 제주경찰사의 전량 폐기, 관계자 문책, 청장의 공개사과 등을 요구했다. 이에 경찰 측은 “과거 선배가 한 일을 객관적인 자료도 없이 어떻게 수정하느냐”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면 수정할 용의가 있다고 버텼다.

 

이날 회합이 성과없이 끝나자 대책위 측은 그 수위를 높여 12월 9일 2차 도민규탄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상경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또한 4‧3 중앙위원인 김정기 서원대 총장이 12월 1일자 『한겨레신문』에 ‘제주경찰의 4‧3왜곡’이란 제하의 논단을 발표하면서 전국적 이슈로 부각됐다.

 

실세 추미애 의원 추궁에 경찰 태도 돌변
그런데 간담회 하루 만에 제주경찰이 돌연 자세를 바꿨다. 12월 1일 경찰 측은 대책위에 『제주경찰사』를 전량 회수하여 70여 쪽에 이르는 4‧3 관련 부분을 삭제하여 재 발간할 용의가 있다고 제시해왔다. 또한 경찰사 발간 관계자들을 주의조치 등으로 문책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대책위는 이런 경찰 측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2월 2일 양측은 다시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제주경찰사』의 4‧3 관련 부분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남국현 지방청장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4‧3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의 뜻도 밝혔다.

 

이렇게 해서 경찰사 파문은 일단락됐다. 이 사건은 그해 지역 언론에 의해 ‘제주도 10대 뉴스’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경찰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배후에는 추미애 국회의원이 있었다. 추 의원은 제주도에서 4‧3진영이 치열한 항의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찰청 본부 간부들을 국회로 불러들였다. 당시는 DJ정권 시절이고, 추 의원은 잘 나가던 여당의 ‘실세’ 국회의원이었다.

 

추 의원 쪽에서는 4‧3특별법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과거사 해결에 임하는 대통령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등을 따진 것이다. 결국 『제주경찰사』 파문은 제주경찰이 스스로 풀지 못했던 문제를 추 의원의 영향력에 의해 중앙 경찰이 개입해 해결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2001년 3월 3일, 민간인유족회와 행불유족회가 통합, ‘제주4‧3희생자유족회’가 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때 가슴앓이 해오던 4‧3유족들이 결속해 이제는 제주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40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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