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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38) ... 무장대 경력자, 미군 고문관 출신 증언

무장대 출신 찾아 일본으로
4‧3위원회 진상조사팀은 증언조사를 하면서 제주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 장교 출신자 못지않게 반대진영에 섰던 무장대 경력자 발굴에 신경을 썼다. 토벌대나 무장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장대 경력자들을 국내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내세울 만큼 완고한 반공체제의 정치환경에서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태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진상조사팀은 일본 현지 조사 과정에서 몇몇 무장대 경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삼룡(도쿄 거주)이다. 나와 김종민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일본 조사팀은 2002년 7월 도쿄 한 호텔에서 일흔아홉 살의 그를 만났다.

 

제주도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4‧3 발발 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의 신분으로,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있던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가 밝힌 무장봉기 결정 과정은 이렇다.

신촌회의서 12대 7로 무장봉기 결정
1947년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이후 응원경찰과 서청에 의한 탄압이 계속되자 1948년 2월 말(혹은 3월 초) 조천면 신촌에서 도당 간부와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당시 도당 조직부장인 김달삼이 “앉아서 죽느니 일어나 싸우자”는 무장투쟁을 제기했다. 시기상조라는 신중파와 강행하자는 강경파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끝내 12대 7로 무장투쟁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무장투쟁을 주장했다는 이삼룡은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나 미군과 맞대응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장기전을 생각지 못했다는 그는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정중 교사였던 김달삼은 본명이 이승진이고, 당시 23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김시종·김민주 “장기전은 생각도 못했다”
4‧3 발발 당시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였다는 김시종 시인(오사카)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그는 “‘4‧3’을 한 3개월 정도 봤다. 6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 제주성내는 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천 등 외곽을 장악해 읍내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접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1901년 ‘이재수난’을 연상시키는 회고를 한 그는 “낭만적인 생각들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오늘(21일) 아침 김시종 시인이 일본 문학상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아사히신문 제정 ‘오사라기 지로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재일동포 작가로는 1984년 「화산도」의 김석범 작가에 이어 두 번째 수상이란다. 두 작가 모두 4‧3의 기억을 다뤄 일본 최고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1948년 7월 조천중학원 학생 신분으로 입산한 김민주(도쿄)는 “당시 우리끼리는 ‘입산은 영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임의로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사를 거쳐 ‘등용’된 것이나 다름없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도 “장기전을 생각 못했기에 여름 옷만을 입고 그대로 산에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무장대의 규율은 매우 엄격했고, 이성문제가 발생하자 재판을 열어 집행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1949년 6월 이후(이덕구 사망 시점) 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이미 질서있는 게릴라라고 하기 어렵고, 이 때는 거의 ‘무질서한 폭도’에 가까웠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인민해방군 용어는 쓰지 않았다”
오현중학교를 나와 1948년 5월 입산했다는 이순식(도쿄)은 직접 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입산자 중 무장세력은 ‘유격대’로, 죽창부대는 ‘면당 특공대’로 불렸다면서 군경 쪽에서 발표하는 ‘인민해방군’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떤 지역을 습격할 때에 유격대는 군과 경찰을 상대했고, 식량 약탈 등의 보급 투쟁이나 지목 살인 등은 면당 특공대의 역할로 구분했다고 설명하고, 실제 유격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유격대는 제주읍에서 서쪽으로 서귀면까지 담당하는 제1지대와 조천면에서 동쪽으로 남원면까지 담당하는 제2지대로 나누어졌고, 자신이 소속했던 제2지대도 30명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산자들의 증언을 듣다 보면 무장대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달삼과 이덕구에 대한 인물 평가도 다소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김달삼은 주로 선동적이고 과격한 인물로 묘사됐다.

 

그에 반해 이덕구는 과묵하고 인간미가 있었다는 증언이 곳곳에서 나왔다. 김민주는 입산 5개월만인 1948년 12월 은사였던 이덕구를 산에서 만났는데, “이덕구 선생은 내게 ‘넌 집에서 가만히 공부하지 왜 이런 데 왔느냐’고 꾸중을 했다”고 증언했다.

 

애기 업고 형살장 간 이덕구 누님의 사연
진상조사팀은 일본에서 이덕구의 외조카 강실(오사카)도 만나 증언채록을 했다. 강실의 어머니(이태순)는 바로 이덕구의 누님이다. 1948년 12월 경찰은 이덕구의 가족과 친인척 20여 명을 별도봉에 끌고 가 학살했다. 이덕구의 가족이란 이유 때문이다.

 

외아들인 강실(당시 11세) 밑으로 9살 난 여동생과 2살 난 여동생이 있었다. 어머니는 경찰에게 자식들을 가리키며 “저것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경찰 지휘자가 결국 자식들을 떼어 놓아도 좋다고 허가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저것들은 밥을 빌어먹을 수도 있지만 이 아이까지 살리려고 하면 결국 모두 죽게 된다.”면서 두 살 난 막내를 그냥 업고 갔다고 했다. 기어이 두 살 난 딸을 업고 형살장으로 끌려간 어머니. 이 대목에서 강실도, 진상조사팀도 울었다.

 

그에게서 이덕구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까지 1949년 6월 이덕구는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는 설과 스스로 자결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는 후자라고 말했다.

 

이덕구의 부하가 봉개에서 경찰에 잡혔다. 체포된 자는 경찰의 설득에 전향했다. 그래서 이덕구의 은거지를 알려준 것인데, 이덕구는 경찰에 포위되자 자신의 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전시된 이덕구 시신
어느 날 밤 경찰이 제주시내에 있는 자신의 집에 찾아와 “이덕구의 시신을 확인해달라”고 해서 아버지와 함께 경찰에 갔는데, 관자놀이에 총알 한발이 관통한 것 이외에는 다른 흔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덕구의 주검은 관덕정 앞에서 십자가 형태에 매달려 하루 동안 전시됐다. 왜 하필 십자가 형태였을까? 윗도리 왼쪽 주머니에 수저도 꽂혀 있었다고 한다. 일반 도민뿐만 아니라 국민학생 어린이까지 구경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마철이라 곧 냄새가 나자 경찰은 산지천 남수각에서 시신을 화장했다. 밤늦게 경찰이 자기 아버지에게 “뼈라도 수습하라”고 알려줬지만, 다음날 새벽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어 가버리는 바람에 하나도 수습하지 못했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강실은 “제주에 있을 때는 ‘빨갱이’, 부산에 있을 때는 ‘제주도 똥돼지’,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란 멸시를 받았다.”면서도 열심히 일해서 자수성가했다. 그는 재일본 4‧3사건희생자유족회장 뿐만 아니라, 오사카 지역의 제주출신 재일동포 총본산인 재일본 관서(關西)제주도민회장과 제주도태권도협회장도 지냈다.

 

박갑동 “중앙지령설 내가 쓴 글 아니다”
한편 진상조사팀은 한때 4‧3에 대한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원이 되었던 박갑동(남로당 지하총책 출신)을 도쿄에서 직접 만나 “그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정보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증언을 녹취했다.

 

그는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된 회고록을 통해 제주4‧3에 대해 “남로당 중앙의 지령이 있었다.”는 글을 발표, 논란이 됐었다. 보수 논객들은 남로당 지하총책이 주장한 내용임을 강조하며, “4‧3폭동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1990년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추적 결과, 그는 “중앙 지령설은 잘못된 것”이라며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는 “4‧3발발 당시 남로당의 노선은 전면적인 비합법 무력투쟁 단계가 아니”라면서 “제주도당의 돌출적인 행위”라고 수정해서 증언했다.

 

생존한 미군고문관 출신 3명 찾아내
한편 제주4‧3위원회 진상조사팀은 2001년 10월 미국 현지에서 4‧3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미군 고문관 출신 3명을 직접 만났다. 그들의 입을 통해 미군 장교들이 사태 진압에 나선 한국 군‧경을 직접 지휘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4‧3 연구가 진행되면서 미군 장교들이 4‧3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하거나 개입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됐다.

 

제주도에서 미군정이 시행한 5‧10선거가 무산되자 브라운 대령을 최고사령관으로 파견해서 진압작전에 나선 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군이 진압작전권을 갖게 된 일,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벌인 송요찬 연대장을 칭찬한 일 등 그 근거는 많다.

 

그럼에도 제주진압작전에 참여했던 미군 스스로는 과연 어떤 생각과 입장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주 진압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미군 장교 출신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군 고문관들에 대한 증언조사는 『한겨레신문』 허호준 기자의 추적 조사에서 시작됐다. 2010년에 제주대학교에서 4‧3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그는 2001년 그 무렵에는 ‘4‧3의 전개과정과 미군정의 대응전략’이란 테마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허 기자는 미국 관련 논문들을 입수해 분석하던 중 미군 고문관들이 생존해 있다는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어렵게 그들과 이메일 등으로 연락이 닿았고, 미국 현지 취재계획을 세웠다.

 

이런 소식을 접한 나는 당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파견돼 조사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자료 조사팀(장준갑‧김창후‧양정심)에게 합동 조사하는 방안을 모색하도록 했다. 허 기자의 취재활동(『한겨레신문』 2001년 12월 8일자 보도)에 4‧3위원회 진상조사팀도 합류하게된 것이다.

 

피쉬그룬드 “주민들에게 미안한 생각 든다”
합동조사팀은 2001년 10월 20일 버지니아주 한 한국식당에서 9연대 고문관 출신인 해럴드 피쉬그룬드(당시 81세)를 만났다. 그는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던 1948년 9월부터 12월 하순까지 9연대 고문관을 지낸 중요한 인물이다.

 

나는 이미 김정무 장군으로부터 그의 제주도 주둔 당시 얼굴사진을 입수하고 있었다. 매릴랜드대학 출신인 그는 제주 주둔 기간에 중위에서 대위로 승진했다. 그 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피쉬그룬드는 제주에서의 자신의 임무는 한국군에 대한 훈련과 보급, 때로는 자문하는 일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나는 그들의 회의에 참석해 인사와 군수, 작전, 정보 분야에서 미군 방식을 도입하도록 애썼지만, 군수를 빼고는 성공적이었는지 모르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그는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한라산 쪽을 향해서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하고 군 작전을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고 초토화작전의 개념을 알고 있었음을 비치면서도 사전에 자신과 협의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그들은 항상 노획한 무기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왜 무기 수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고 묻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피쉬그룬드는 “송요찬 연대장은 터프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부하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작전 때도 터프했느냐?”는 질문엔 예의 사망자와 무기 숫자가 다름을 다시 거론하며 직답을 피해갔다. 그는 “제주도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이제 주민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웨슬로스키 “진압작전 직접 지휘했다”
11연대 고문관을 지낸 찰스 웨슬로스키(당시 80세)를 만난 것은 10월 28일 플로리다주 그의 자택에서였다. 그는 1948년 6월과 9월 사이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제주도 주둔 제11연대와 제9연대 고문관으로 복무했다.

 

미 육사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는 공수부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웨슬로스키는 “제주도에 부임했을 때 미 6사단 소속의 브라운 대령이 초기 제주사건 진압 책임자로서 참모인 포티어스 소령 등 7~8명의 장교들과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경비대가 제주도 전역에서 소탕작전을 벌일 때 나도 함께 나갔다.”면서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미군 소속 정찰기도 작전에 활용했다고 증언했다.

웨슬로스키는 그해 7월 11연대와 함께 수원으로 이동한 뒤 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장군이 자신에게 제주도 사태에 대해 물어와 아직까지 문제를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상태라고 답변하자 곧바로 “가능한 한 빨리 내려가라”고 명령해서 9연대 고문관으로 제주에 다시 오게 됐다고 증언했다.

 

진상조사팀은 10월 25일 에드워드 조셉(당시 79세, 1948년 7월부터 9연대 2대대 고문관으로 제주에서 복무)을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만났지만 별다른 증언을 듣지 못했다. 조셉이나 피쉬그룬드는 한국에 있는 서종철 장군(4‧3 당시 9연대 부연대장)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정작 서 장군은 앞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만났을 때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에 반해 9연대 군수참모 출신인 김정무 장군은 성의를 다해 증언했다. 4‧3 당시의 9연대 고문관 피쉬그룬드 사진이나 참모총장 일행 제주방문 사진도 김 장군으로부터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39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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