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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8)… 대만 2·28기념식에서 본 놀라운 일

유족대표 추도사가 첫 순서도 인상적
나는 지난 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2‧28사건 69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변하는 2‧28’을 목격하게 되었다. 오는 5월 취임하는 총통 당선인은 2‧28사건의 재규명을 선언했고, 유족들은 이에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기념식에 참석했던 현직 총통은 전격적으로 면담을 요구하는 유족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돌발적인 상황인데도 진지하게 경청하는 총통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문득 대한민국과 4‧3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제주4‧3과 흡사하다는 대만 2‧28사건이 69주년을 맞았다. 그 기념식이 2월 28일 오전 10시부터 2‧28국가기념관 야외정원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5‧18기념재단 이사인 나는 차명석 이사장과 함께 주최 측인 2‧28사건기념기금회 초청으로 이 행사에 참석했다.
 

 

 

 

기념식은 유족 대표, 주최 측인 2‧28사건기념기금회 이사장, 총리 격인 장산정(張善政) 행정원장, 국가원수인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추도사 순으로 진행됐다.

 

마잉주 총통은 “해마다 2‧28 기념행사에 참석하다보니 유족들과 친구가 되었다”면서 “그래서 유족이 겪는 아픔과 마음속의 어두움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공식 행사에서 정부를 대표해서 2‧28사건에 대한 사과를 한 바 있는 마 총통은 “세계 많은 나라의 정부가 권력을 악용해서 국민의 권리를 침범하고 불행한 일을 만들었으나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직 총통의 솔직한 표현이나 유족 대표가 맨 먼저 추도사를 하는 것 등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내말 들어주세요” 호소에 발길 돌린 총통
그런데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오전 11시께 행사를 마친 마잉주 총통이 퇴장하려는 순간, 내 뒤편에 앉았던 70대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총통! 총통! 내 말 들어주세요, 총통!”이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벌어지자 경호원들이 마잉주 총통을 둘러쌌다. 마 총통은 이내 행사장에서 사라졌다. 해프닝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1분가량 지났을까 마 총통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온 마 총통은 그 남자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순간 왼쪽 손에 자료를 들었던 그 남자는 오른쪽 손을 총통 왼쪽 어깨에 얹은 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엉겁결에 사진특종…「연합뉴스」로 세계타전
그런데도 총통이나 경호원들이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놀라운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얼른 휴대전화기를 꺼내 카메라에 담았다. 여자 경호원만이 근접 촬영하는 나를 경계하듯 눈길을 보냈을 뿐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5분가량 대화가 진행된 후 마 총통이 퇴장하자, 카메라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당시 기자 포토라인은 단상에서 50~60m 가량 뒤쪽에 설치되어 있어서 기자들의 근접 촬영은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 남자는 몰려든 기자들에게 자신이 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다음날 대만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보니, 2‧28 유족으로 그의 이름은 린원제(林文傑)이었다. 그는 2‧28사건의 가해 책임이 초대 총통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 정권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고로 지급하는 2‧28 피해자 배상을 국민당 자산으로 지급해야 한다. 2‧28사건의 책임이 있는 장제스를 기리는 중정기념당과 지방 곳곳에 있는 그의 동상을 모두 철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다음날 대만 신문들도 이 내용을 보도했다. 그런데 신문에 실린 사진들은 한결같이 멀리서 찍은 사진으로 유족의 손이 총통 어깨에 얹힌 사진은 없었다. 나 혼자 ‘사진 특종’을 한 셈이다.
 

 

 

 

귀국한 뒤, 「연합뉴스」 등에 사진을 제보했다. 「연합뉴스」는 이 사진을 3월 1일 <카메라뉴스>로 세계에 타전했다. ‘대만 총통의 대범한 대화법 눈길’이란 제목을 달고.

 

「연합뉴스」는 “민심을 중시하는 국가지도자의 포용력과 대범함, 경호의 유연성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제보자의 말도 함께 실었다.

 

대만통신도 보도…“마 총통 이 보도 중요시”
이 글을 쓰고 있던 중, 2‧28사건기념기금회 정내위(鄭乃瑋) 주임이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대만의 대표적인 통신사인 「중앙사」가 그날 찍은 사진을 추가로 쓸 수 있도록 동의해달라고 연락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합뉴스」에 보도되지 않았던 다른 사진도 보냈다. 중앙통신은 3월 3일 ‘마 총통이 전격적으로 2‧28 유족과 대화한 사진이 한국언론에 보도되었다’면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대만 중앙통신은 제보자가 한국 제주도의 「제민일보」 편집국장 출신이라는 사실, ‘대만 국가지도자의 포용력과 대범함, 경호의 유연성’ 등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대만의 정내위 주임이 다시 연락해왔다. “2‧28사건기념관장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마 총통도 이 보도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2‧28과 4‧3이 왜 흡사하다고 할까?
그런데 대만 2‧28사건은 왜 제주4‧3과 비슷하다고 할까? 2‧28사건이 제주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93년인 것 같다. 그해 4월 21일자 『제민일보』에는 “4‧3과 흡사한 대만 2‧28사건/46년 만에 보상금 152억 지급 결정”이라는 박스 기사가 실렸다.

 

「로이터통신」이 대만의 언론보도를 인용해 타전해온 짤막한 기사를 토대로 김종민 기자가 내용을 보충해 보도한 기사였다.

 

그러자 예사롭지 않은 반응들이 나타났다. 대만 2‧28사건의 실체는 무엇이며, 대만 2‧28사건이 제주4‧3과 닮은 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보상까지 받게 됐는가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신문사에 문의전화도 잇따랐다.

 

나는 2‧28사건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자 보충취재를 하여 1993년 4월 24일자에 ‘제주4‧3과 대만4‧3’이란 칼럼기사를 통해 2‧28사건을 소개했다.

 

그리고 중국 현대사 전문가를 수소문하던 중에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리영희 교수(한양대)가 이 분야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원고를 청탁했다. 그래서 “대만 2‧28사건 진상-제주4‧3의 거울”이라는 제하의 리 교수의 특별기고를 싣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만 2‧28사건은 무엇인가? 이 사건은 1947년 2월 27일 시작되었다. 194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대만은 당시 중국 본토의 국민당 정권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날 타이베이시에서 담배를 몰래 팔던 여인을 본토 출신의 전매청 관리와 사복경찰보조원들이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대만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 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그 다음날인 2월 28일 대만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대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일부 관공서 건물이 불탔다. 이에 맞서 정부군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사상자가 또다시 발생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시위대는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했다. 이에 당황한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3월 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군대를 파견하고 3월 10일 계엄령을 선포, 무력으로 진압했다. 무고한 사람 수만 명이 학살됐다.

 

발발원인이나 진상규명 과정도 비슷
그러면 무엇이 제주4‧3과 흡사한가? 첫째는 두 사건 모두 경찰의 무분별한 발포에서 촉발되었고, 누적된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섬 주민과 본토 출신 사이의 갈등이 깊게 깔려 있었다.

 

둘째는 이렇게 섬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시작되었지만 대만에서는 자치권의 요구로, 제주에서는 자주통일정부 지향이란 정치상황으로 변전되어 갔다는 점이다.

 

셋째는 본토에서 파견된 진압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토벌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판절차 없이 처형된 점도 닮은꼴이다.

 

넷째는 진압당국이 이 사건을 “공산당의 배후조정에 의해 일어난 반란”으로 규정하고 40년 가까이 금기시해왔다는 점도 같았다.

 

대만에서도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까지는 2‧28사건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대만은 장제스 총통에 이어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장기 집권하면서 독재정권체제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 부자정권은 ‘반공’을 앞세워 38년간이나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철권정치도 1988년 장징궈 총통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만에 민주화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상황과도 비슷했다. 3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군사정권도 1987년 6월 항쟁으로 무너지는 틈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도 대만 못지않은 거센 민주화바람이 불었다.

 

다만 대만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2‧28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기념사업, 희생자 보상까지 다다른 반면, 한국에선 4‧3와 같은 과거사 복원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전되었다.

 

대만은 장징궈의 사망 이후 리덩후이(李登輝)가 정권을 잡았다. 그 역시 보수당인 국민당 소속이었지만, 총통 자리에 오른 첫 대만출신인 점이 달랐다. 그렇지만 리덩후이도 집권 초기에는 조심스런 행보를 했다.

 

그는 2‧28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가 빗발치자 1988년 “앞을 바라봐야지 뒤를 돌아봐선 안된다. 역사학자의 손에 맡겨야 한다.”며 슬쩍 발을 빼려 했다. 마치 한국에서 ‘4‧3을 역사에 맡기자’는 것과 너무 흡사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물꼬를 쉽게 막을 수 없듯이 진실 규명을 향한 대만인의 욕구를 리덩후이 총통도 막을 수 없었다. 2‧28사건에 대한 대만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이런 진통을 거쳐 시작됐다.

 

“대만 2‧28사건은 4‧3의 거울”
리덩후이는 정부 차원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로 그 방향을 선회했다. 1991년 정부 행정원(총리실) 산하에 ‘2‧28사건 전담 소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기구가 1년여의 진상조사를 거쳐 1992년 「2‧28사건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정확한 사망자 숫자를 집계할 수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망‧실종자가 1만 8천~2만 8천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 이전에 대만 군 당국이 밝힌 이 사건의 피해자는 사망 408명, 부상 2,131명, 실종 72명에 불과했다.

 

대만 정부는 이 사건의 사후처리를 놓고도 주춤거렸다. 이 문제를 당면한 정치문제로 이끌어낸 세력이 바로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이었다.

 

이 정당은 대만의 독립을 기치로 내세웠고, 2‧28사건 진상규명을 내세워 대만 원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이 199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민진당은 1994년 2‧28사건 수난자 모임(유족회)을 대변하며, 정부의 공식 사과, 책임자 추궁, 희생자에 대한 배상, 국가기념일 설정 등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입법원(국회)에 ‘2‧28사건 처리 및 배상조례’를 상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공식 사과를 했다. 1997년 대만 입법원은 2월 28일을 국가기념일인 ‘평화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날 공휴일로 정해진 것이다.

 

2‧28사건 수난자에게 1인당 최고 대만화폐 6백만원(한화 1억 8천만원)까지 보상하는 조례도 통과되었다. 그러나 엄격한 심사로 현재까지 보상금을 받은 수난자는 2,290명에 불과하다.

 

2000년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진보정당인 민진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2008년 정권은 보수정당인 국민당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 후 8년을 마잉주 총통이 집권한 것이다.

 

차이잉원 차기총통, 사건 재조명 공약
그러다가 지난 1월 대만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주석이 압승을 거두며 8년만의 정권 교체를 이뤘다. 대만 105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통이 탄생한 것이다.

 

오는 5월 20일 새 총통의 취임을 앞두고 2‧28 유족들은 들떠있다.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이 2‧28사건에 대해 재조사하겠다고 공약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대만 방문길에 두 번의 2‧28 기념식에 참석했다. 오전에 정부 단위의 기념식이 봉행되었다면 오후 2시부터는 2‧28 화평공원에서 지방자치단체인 타이베이시 등이 주최한 기념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념식에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이 참석했다. 오전 행사에서 돌발적인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경호가 한결 강화된 느낌이 들었다.
 

 

 

 

 

차이 당선인은 총통에 취임하면 철권통치 시대 기록물을 공개하고,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구성해 2‧28사건의 재조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녀는 “역사의 잘못을 마무리해야만 대만이 진정한 자유민주의 땅이 될 수 있다”며 “이 땅에 진실과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암흑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대만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하자”고 역설했다.

 

아울러 2‧28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관련 법률의 제정, 또는 개정 작업에도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현직과 총통당선인 참석이 당연하다는 2·28
2‧28 유족들은 그동안 “정부가 밝힌 보고서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다”면서 불만을 표시해왔다.

 

따라서 앞에서 마 총통에게 건의했던 유족의 사례에서 보듯이, 2‧28사건의 책임문제를 둘러싼 장제스 전 총통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심화될 전망이다.

 

실제로 28일 전야에는 대만 전역에서 장제스 동상에 붉은 페인트 칠이 되거나 파손되는 등 사태가 벌어졌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우리 일행은 기념식을 앞두고 주최 측과의 만찬 자리에서 비록 장소는 다르지만 2‧28 행사에 현직 총통과 총통 당선인이 동시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랬더니, 대만 쪽에서 “광주 5‧18과 제주 4‧3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느냐”고 물어왔다.

 

지난해 광주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문제로, 제주에는 희생자 재심사 문제로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더니 이해할 수 없다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 총통이 무리하게 접근해온 유족을 제지하지 않고 대범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보니 그런 국가지도자를 둔 대만인들이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언제 이런 당당한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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