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보면, 제주도에는 제주성내(城內)를 중심으로, 남동으로는 성산포 및 정의읍까지, 남서로는 모슬포 그리고 한라산을 횡단하여 서귀포에 이르는 길과 기타 도로가 있다. 이 도로들은 한라산의 경사면과 직각 또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1910년대 초 제주도내 도로는 성내를 기점으로 해서 성산포로 가는 길, 정의읍으로 가는 길, 대정읍을 거쳐 모슬포로 가는 길, 연안(沿岸) 각 마을을 거쳐 섬을 일주(一走)하는 길, 한라산 중턱을 횡단하여 서귀포로 가는 길 등 4~5개 노선에 불과했다. 이 도로들은 배수시설이 없고 교량이 가설되어 있지 않아 비만 오면 마치 하천과 같이 도로를 따라 많은 빗물이 흘러 내려 사람이나 마차의 통행이 어려웠다. ▲ 도로 만들기 부역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이 ‘신작로(新作路)가 생겨났다. 신작로 즉, 제주도 해안 일주도로는 1912년부터 1914년간 당시 도당국과 경찰서가 협력해 일주도로 건설 계획을 세우고 지방비 보조와 도민의 부역환산금(夫役換算金)으로 건설됐다. 제주도민의 부역과 노선이 지나가는 곳이면 무조건 강제기부(寄附)에 의존해 도내 각 해안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어 1914년부터
▲ 1922년 제주상선주식회사 설립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1931년 11월 27일 제주성내에서 동아일보 제주지국 주최로 주요도시 순회좌담회가 열렸다. 제주의 산업발전책(産業發展策)을 주제로 한 이 좌담회의 참석자는 도평의원(道評議員) 최원순(崔元淳), 면협의원(面協議員) 이윤희(李允熙) 잡화동업조합장(雜貨同業組合長) 박종실(朴宗實),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 홍순녕(洪淳寧), 자동차업 강성익(康成益) 식산지점(殖産支店) 양계무(梁啓武) 변호사 양홍기(梁洪基) 등이다. 이 날 참석한 제주기업가 최원순은 제주의 산업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제주(濟州)는 농업(農業) 이외(以外)에는 산업(産業)이란 전무(全無)하고 그도 또한 토지가 척박(瘠薄)한 관계상(關係上) 속맥(粟麥) 이외 농업물(農業物)이 극(極)히 소량(少量)임니다. 그러함으로 농업 이외 어떠한 산업(産業)을 물론(勿論)하고 장려(獎勵)할 필요가 잇슴니다. 기중(其中)에서도 제주는 사방(四方)이 해안(海岸)인 지리적(地理的) 관계(關係)로 보아 수산업(水産業)이 가장 적당(適當)하고 둘재 초원(草原)이 광대(廣大)하니 목축업(牧畜業)이 발전할 수 잇다고 생각함니다. 그리
일제강점기 초기 제주도의 공업은 유치한 수준, 단계로 제주도의 자원, 즉 자연환경을 이용한 약간의 자원을 가공하는 수공업 제품들 예를 들면, 죽제품, 조선모자, 탕건, 양태 등이 주를 이루었고 이외에 주로 자급적 성격을 지닌 약간의 면직물 제품이 존재했었다(高禎鍾, 「濟州島便覽」, 1930). 제주 지역에서 가장 특징 있는 민속공예는 말총으로 만드는 관모공예로,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갓공예이다. 이 밖에 조선 시대부터 병사의 군모인 털벙것(털벌립), 패랭이(대패랭이), 정동벌립(정당벌립)이 활발하게 만들어져 진상품으로 납품되었다. 그러나 단발령 이후 제주지역 관물공업, 관모공예는 급격히 쇠퇴해 갔다.갓은 모자 부분과 차양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갓의 모자 부분(총모자라고 한다)과 탕건, 망건을 짰다. 탕건은 선비들이 집에 있을 때 머리에 쓰는 모자이며, 망건은 상투를 틀기 위해 머리를 빗어 올리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넓적한 띠이다. 갓의 차양은 갓양태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양태라고 부른다. 총모자와 양태의 수요는 일제강점기에 주춤했다가 해방 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상공업(商工業)도 물론 원시
청암(晴岩) 박종실(朴宗實)은 근대 무역인으로 한국해운업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제주지역 근대경제 형성에 기여한 제주의 대표적 기업가이다. 박종실은 신용과 근면, 절약을 상인정신으로 삼았으며 신용제일주의의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현금과 부동산 그리고 상품에 분산 투자하여 위험도를 낮추며 시세변동에 탄력적으로 대비하는 방식을 가진 사업가였다. 이러한 박종실의 경영철학은 ‘신용제일주의’, ‘삼균배지론(三均配之論) 투자관’, ‘합리적 기업경영관’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은 인정과 도덕이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그를 멀리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해서 일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어쩐지 하느님이 도우셔서 일이 잘된 것 같이 생각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족함을 알고 늘 만족한 마음을 가지면 일생동안 욕된 일이 없고, 욕망을 멈추는 것을 알고 늘 억제하면 일생 부끄러움이 없다(知足常足 終身無辱 知止常止 終身無恥). 평생 ‘신용이 생명이다’를 강조했던 박종실은 신용, 근면, 절약 중에서 특히 신용을 생명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여 항상 신용제일주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36년간 제주도내에 설립된 법인회사 수는 52개 이다. 1920년대에는 8개 회사에 불과하였으나 1930년대에는 18개 회사, 1940년대 23개 회사로 회사설립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법인회사 설립주체의 국적별로 한국인 30개 회사, 일본인 18개 회사, 한일합자 4개 회사이며 그 중에 34개 법인회사는 제주도민이 직접 설립하거나 경영에 참여했던 회사들이다. 이를 회사형태별로 보면 주식회사 43개, 합자회사 4개, 합명회사 4개, 유한회사 1개로 주식회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30년 초 7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중 일본인 회사는 3개 사, 한국인 회사는 4개 사가 설립되었다. 한국인이 기업경영에 참가한 제주미유조합(1919년)은 자본금이 1만5천3백원으로 다른 법인기업에 비해 자본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매출액은 6만원으로 제주전기주식회사(3만원), 제주주조주식회사(3만원)에 비해 2배 정도 많다. 1930년 말에 이르러 제주지역에 13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중 일본인 회사는 1개 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3개의 한일합자회사가 존재하였고 나머지 9개의 회사는 오로지 제주자본에 의해
강할머니 가족이 연적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강할머니의 증조할아버지의 자식 중 막내인 강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애월 장전에서 연적골로 이주하면서 부터이다. 강할머니가 태여 날 당시 그의 부모는 화전마을인 서귀포시 동홍동 연적골에서 거주하였으나 어머니가 친정인 서귀포시 서홍동 굴천동에서 그를 출산했다. 출생 이후 1942년(14세)까지 연적골에 거주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홍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연적골에는 상시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적골에 사람이 가장 많았을 때는 18가구 정도 살았다. 주로 보리, 조(맛시리), 피, 메밀, 감자, 토란 등을 경작했으며 무우, 배추, 참깨 등은 다른 마을보다 수확량이 많았다. 살던 집은 초가 삼칸집으로 큰방(안쪽에 고팡), 마루(마루에 봉석), 작은방(작은방 안쪽에 부엌)으로 이루어 졌다. 방을 만들려면 우선 돌(평판석)로 밑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다음, 감을 으깨어 바르고 그 위에 초석이나 부드러운 풀을 깔았다. 벽은 돌로 벽을 쌓고(한단 쌓고 흙으로 덮고 다시 한단 올리는 식으로) 부드러운 흙으로 마무리하였다. 주로 마당에서 수확물들을 작업했기 때문에 마당은 200~300평 정도로 넓은 편이었다. 작은방 옆쪽에
일본인들의 한반도 연안 출어(出漁)는 1883년에 7월 25일에 조인된 ‘조선국(朝鮮國)에 있어서의 일본인민무역규칙(日本人民貿易規則)’ 제42조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밀어(密漁)가 행해졌으며 특히 제주도 주변에는 일본 잠수기업자(潛水器業者)들이 일찍부터 침범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제주지역에 출어하면서 제주도민과 충돌하게 되었고 급기야 일본 정부는 1884년 9월부터 1891년 11월까지 제주도에 출어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금어(禁漁)기간 중에도 밀어는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제주 근해의 어장은 급속히 황폐해 졌다. 이 때 일본인 잠수기업자가 채취한 것은 주로 전복과 해삼이다. 「한국수산지」 3권(1910)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복은 연해안에 생산되지 않은 곳이 없고 거의 무진장이라고 할 만큼 풍부하였으나 일찍 일본 잠수기업자의 도래로 남획이 된 결과 지금은 크게 감소하였다. 예전에 토착잠수부들이 이를 채취해왔으나 지금에는 종일 조업을 하여도 1~2개를 얻는 데 불과하다. 잠수기업자는 약간 깊은 곳에서 조업하기 때문에 다소의 어획이 가능하지만 예전
일본 계시계근정(堺市戒筋町) 안화뎡 방적공장(岸和町紡績工場)에 잇는 조선 제주도(濟州島) 출생 여자직공 륙십명은 이십륙일 아츰부터 갑자기 그 공장에 출근치 아니하고 긔숙사에서 울고 잇슴으로 공장칙에서는 그 까닭을 몰라 무슨 일로 공장에 출근치 아니하느냐고 물엇다는 바 이에 대하야 그들은『우리 고향인 제주도가 갑작히 바다 가운데 함몰되엿슴으로 이와 가치 울고 잇다』고 대답을 하엿다는데 이 엉터리 업는 풍설은 최근 그 회사를 그만두고 자긔 고향으로 도라간 제주도 출신 박유인(朴有仁)이가 지어낸듯하다 하야 소관 안회뎐서에서는 범인을 수색중이라더라(동아일보, 1926년 1월 29일). 제주도민의 본격적 도일(渡日)이 시작된 것은 1919년 한신(阪神)공업지대로의 모집에 응하며 시작되었다. 1922년에 대판 직항로의 개설로 본격화되어 1924년부터 도항자가 매년 전년 대비 3배 증가했다. 1922년 남자 3,198명, 여자 305명 총 3,503명이 도일하였고 1925년 1596명, 1927년 19,204명, 1933년 29,208명, 급기야 1939년에는 5만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 즉, 1가구에 1명꼴로 도일했다. 제주도민들의 도일은 보다 나은 경제생활에
오현학원(五賢學園)을 설립한 우공(牛公) 황순하(黃舜河)의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우공(牛公)이다. 1896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1978년 별세했다. 그는 제주상선주식회사(1922), 제주주조주식회사(1928), 제주도산소주판매주식회사(1935), 제주도해조주식회사(1938) 등에서 취체역(取締役)을 역임하였다. 지금의 대표이사다. 이후 1939년 제주도어업조합 감사, 1942년 조선해면기업(주) 취체역, 동년 제주도물산(주) 취체역, 1943년 영화 연극 및 부대사업을 취급하는 조일구락부(주)를 설립하여 감사역을 역임하였다. 그는 여러 사업을 경영하는 한편 전라남도평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황순하는 1925년 제주면에 대성통조림공장을 설립하여 공장대표로서 제주도 제조업 발전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공장은 자본금 4,000원으로 시작하여 전복, 소라 등을 제조하였다. 연간 노동력은 6명으로 연간 470상자를 생산하여 판매한 매출액은 5,520원으로 제주도에서는 소규모의 공장이었다. 이후 제주도에서 조직형태를 가진 회사들이 연이어 설립되면서 그는 근대기업가로 변신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1922년
감태(甘苔)는 제주도 청정바다 일대 수심 5~10m 내외의 깊은 곳에 서식하는 다년생 해조류로 소라, 전복의 먹이다. 감태는 요오드, 칼슘, 비타민 B1, B2가 풍부하고, 인체에 해로운 산(酸)을 없애주고 니코틴을 해독, 중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또한 후코이단과 폴리페놀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항산화, 항암, 항염, 노화억제 및 고혈압 억제, 자외선 차단 및 미백효과가 있어 요즘 새롭게 각광 받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감태는 화약의 원료로 사용되는 중요한 군수물자였으며 간식인 양갱을 만드는 데도 필요한 해조류여서 감태 구입과 가공을 위해 많은 일본인들이 제주에 진출했다. 감태(甘苔)는 수심 2미터에서 10미터 사이의 암초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갈조류로 남해안과 제주도, 일본의 규슈북부와 혼슈 중부의 태평양 연안에 분포한다. 특히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역에서 잘 자라며 전복의 최고 먹이로 치는 해초이다. 감태는 전도 연안 어디에나 자라는데 동해안에 특히 많고, 그 생산량이 많은 것은 우도(牛島)이며 품질이 양호한 것은 가파도(加波島)이다. 본디 도민들은 이를 채취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이 건너와서 사들이면서부터 이를 다소 캐게 되었고 그 뒤에 성산포(
1930년대 일본은 소화(昭和) 대공황으로 경제 전반이 송두리 째 휘청거리고 있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 역시 ‘블랙 먼데이’를 시작으로 경제 대공황(大恐慌)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제주도의 어느 한 마을에서는 멸치 풍년으로 인해 호경기를 누리고 있다는 기사(記事)가 있다. 경제공황으로 방방곡곡에서 별별 참극이 연출되는 이때에 구좌면 월정리(舊左面 月汀里)에는 멸치(鰯)이 풍산(豐産)으로 외지로부터 약 삼만원의 돈이 드러와서 전무후무한 호경긔를 이루m다고 한다(동아일보, 1932년 11월 11일). 예전부터 멸치어업은 제주지역 수산업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19세기 이전 제주에서는 연안에 석제(石堤, 원담)을 쌓아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들어왔다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원담 안에 남아 있던 멸치를 당망(攩網)으로 건져 올리는 방식으로 멸치를 어획했다. 원담은 고기가 올라 올만한 곳에 높이 5~6척(尺), 너비 2~3척(尺), 직경(直徑) 1척(尺) 가량의 돌을 올려 쌓아 담으로 둘러싼 것이다. 원담 안에 멸치가 들었을 때 마을 남녀노소 모두 구
예로부터 제주지역은 지형적 특성상 논(水畓)이 농지면적의 1〜2%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밭에 물을 대어 논으로 만드는 개답(開畓)을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18세기 말 부터 수전(水田)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중기부터 계속하여 개답 공사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1900년 이후 제주지역에서 대표적인 개답사례는 화순 창고내 하류 지역, 중문 광베기와 대포 너베기 일대, 종달리와 하도리 경계의 갯벌, 토평 칼당원 지경, 광령 너븐들 지경 등이다. 예전부터 중문 마을 사람들은 중문천의 풍부한 물을 이용하여 논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여 왔다. 천제연의 양쪽 가에는 3개의 물골이 있다. 동쪽에는 웃골과 알골, 서쪽에는 섯골로 세 개의 물골 중에 섯골을 먼저 만들었는데 섯골은 지형이 험하고 군데군데 암반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 1893년 색달리 김천총씨가 착공하였으나 자본이 부족하여 추진 못하다가 대정군수를 지낸 송경연씨가 이를 인계받아 완성시켜 개여물케에 논을 만들었다. 그 당시는 단단한 암반위에 장작을 쌓아 불을 붙여 뜨겁게 달구거나, 독한 소주를 붓고 불을 붙여 암반이 뜨겁게 가열된 상태에서 찬물로 암반을 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