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근성과 용담동(용담일동)일대의 옛길을 걸으며 옛지명과 산재한 제주인의 삶의 흔적을 둘러보는 코스입니다. 이번 코스의 시작은 서문다리 옆 제주은행 맞은편 송림반점에서 시작합니다. 지난 번에도 소개했지만 59년도에 화교가 개업한 이후 79년도에 현재 주인장께서 인수하시고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중국음식점입니다. ▲ 송림반점 40년 세월동안 한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는것도 놀랍고, 음식맛이 변할까봐 가족끼리만 운영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간단히 40년 전통의 짜장이나 우동 한그릇 하시고 길을 떠나보길 추천합니다. ■무근성(陳城) 원래 무근성은 병문천과 해자길, 구린질 사이 일대 삼각형 형태의 마을을 일컫는다(맨 윗 그림 참조). 과거 관아에 근무하는 관리(조관)들과 부호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다. ▲ 1960년대 서문과 무근성일대 항공사진 무근성(묵은성)은 탐라국시대(5~6세기 전후) 때 성이 있었으나, 제주읍성이 새로 생기면서 없어진 오래된 성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으니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 고씨가옥 일제때 지어진 절충식 가옥입니다. 제주 전통양식 배치로 안커리 밖커리로 되어 있으나 일본식 목구조로 건축된 건물입니다. 탐라문화광장 조성시 광장 계획구간에 포함되어 있어서 철거될 뻔 했으나 각계의 탄원으로 겨우 존치되었습니다. 근현대의 건축물 보존을 위한 우리 모두의 인식이 필요할 때라고 봅니다. 살아있는 근현대 건축물들도 우리 삶과 역사의 한 부분인데 낡았다고 헐어버리고, 또 문화재를 복원한답시고 자료가 부족하여 고증도 제대로 안되는 시대 불명의 건축물을 지어대는게 과연 올바른 처사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현재 노숙자의 술판이 벌어지고, 인적이 드물어 휑한 느낌마저 주는 탐라문화광장 조성이 그렇게 시급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행정이 나름 이유가 있었겠지만 공중화장실조차 제대로 없는 광장은 과연 누굴 위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쓰여진 우리 세금까지는 생각않더라도 말이죠. ▲ 탐라칠성 제칠도 표지석 삼성혈을 북극성으로하여 제주 성안에 북두칠성의 각 7개 별이 위치하는 자리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던 곳 중 마지막 별자리의 제단터입니다. 칠성골은 7곳의 제단 중 세개의 제단이 위치
■ 기상청입구 북측성곽 잔존구간 ▲ 옛날 제주성곽의 석축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을 쌓았던 조상들의 피와 땀을 잠시 느껴봅니다 ■공신정터 ▲ 북수구의 홍예다리와 공신정 북수구에 위치해 있던 정자이름이 공신루였는데 홍수로 자주 무너지자 아예 지금의 기상청 자리에 정자를 짓고 공신정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공신정은 한양의 임금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북쪽을 향해 지었습니다. 일제때 이 공신정을 없애고 신사를 지었습니다. ■북수구 ▲ 1924년 원래의 북수구 홍예다리 위에 난간대를 설치한 모습 ㅡ위쪽 사진의 원래 북수구와 비교하면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북수구였던 다리가 홍예교라고도 불리었으며 이곳이 바로 북성(北城)의 홍문입니다. ▲ 현재 북수구 위치에 있는 다리 (북성교). 현재 지어진 이 다리 자체는 나름 디자인이 좋고 튼튼해 보입니다. 다만 아쉬운건 원래 남수구에는 두개의 아치로 된 다리가
7편까지는 9번 제주성 남측 성곽옛길까지 둘러보았습니다. ▲ 남측성곽 옛길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일도슈퍼 좌측으로 가면 다시 큰 도로가 나온다 ▲ 초가에 망을 씌운 이 오래된 집을 끼고 우측 골목길로 진입 ▲ 옛 성곽을 따라 나 있는 옛길-초가가 즐비했을 이 골목에 새로 지어진 이 집들 역시 수십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 ▲ 골목길 어느집 돌담 상부에 있는 추억의 방범 시설(?) ㅡ과거엔 담장에 이렇게 유리병을 깨서 도둑드는걸 방지하려 했던 집들이 많았다. 도둑도 도둑이지만 술먹고 새벽에 몰래 귀가하기란 당최 틀렸을 듯 ▲ 좁은 골목길을 나와 확장된 듯한 이 길을 따라가면 된다 ㅡ이 길과 좌측의 지대와의 높이 차가 상당하다. 성곽은 아마 이러한 지형을 최대한 살려서 쌓았었음을 유추해 본다 ■ 동문 터 ▲ 동문터 (역시 현재 동문의 흔적을
■남수구(남수각) ▲ 남수구의 옛 모습 ▲ 남수구가 위치했던 자리 ㅡ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산지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남수구와 북수구를 두었습니다. 남수구는 하부에 홍예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어 남수각이라 불렀습니다. 즉 남수구는 남수각과 홍예다리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홍예다리는 위 옛 사진에서 보듯 두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다리였으나 지금은 사진으로 밖에 만날 수 없습니다. ■ 남측성곽 옛길 ▲ 오현단과 제이각 사이에 동쪽으로 나있는 오현교 ㅡ 이 다리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빠지는 좁은 샛길 입구가 나온다 ▲ 사진 하부중앙에 보이는 작은 계단길이 옛날 남수각을 통행하던 길로 보인다 ▲ 오현교 지나자마자 나오는 샛길 입구 ㅡ 이 샛길로 진입하면 남수각을 오가던 좁은 계단과 골목길이 나온다 ▲ 좁은계단을 올라서면 옛 성곽의 흔적이 나오는 옛길로 들어서게 된다
■남문터 ▲ 남문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 남문위에는 정원루란 누각이 서 있었다 ▲ 남문터를 지나 조금 더가면 길건너 중간의 작은길이 '항골'로 불리던 옛길이다. 현재 교통 흐름의 효율화를 위한 것이겠지만 아쉬운점은 서문터도 그렇고 여기서도 횡단보도를 돌아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당국과 협의하여 성곽길 순환로 상에 있는 도로에 바로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를 기대해 본다. ▲ 오현단으로 가던 항골 옛길 ■오현단 및 제주성지 ▲ 항골을 지나면 복원된 제주성이 나온다 ▲ 오현단으로 들어서는 길 ▲ 오현단 후문에 위치한 복원된 귤림서원건물 ㅡ미안하지만 복원된 건물이라 귤림서원이 있었다는 표지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이좁은데서 공부를 기르치고 배웠을지 의문이다 ▲ 오현단 경내
■성내교회 ▲ 1908년도에 입도한 이기풍목사가 1910년에 설립한 제주 최초의 기독교회. 현재 건물은 1975년도에 건립됨 ■ 구 제주극장 ▲ 구 제주극장(옛 조일구락부) 1943년 일본인이 '조일구락부'를 설립하고 황순하 선생(오현학원 설립자)이 감사를 맡습니다. 제주극장은 1944년 무성영화와 유랑극단의 공연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1944~1947년까지 조일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어진 제주 최초의 현대식 극장입니다. 이곳은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 대동청년단, 조선민주청년동맹, 서북청년회 제주도지부 등의 창립식이 이루어진 역사적 공간입니다. 또한 당시 상영된 무성영화의 변사가 제주 최초의 영화인이자 가수 혜은이의 부친으로 알려진 김성택씨입니다. 1948년 정식공연장으로 허가를 받아 '제주극장'으로 공연과 영화상영을 시작했고 1953년 영화전용관으로 재개관합니다. 그 후 1978년 극심한 경영난으로 폐업이후 '현대극장'으로 탈바꿈하였고 현대극장마저 폐업합니다. 지금은 안전진단 E등급 판정을 받아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이번 연재도 사진이 주류입니다. 우선 하나하나를 천천히 살펴봅니다. ■ 관덕정 서쪽에 자리했던 제주시 청사 ▲ 제주시로 승격(1956년 9월1일)이전의 제주읍 사무소 ▲ 제주읍사무소자리에 들어선 옛 제주시청사(1959~1980) ▲ 헐리기 전 옛 제주시청사 ▲ 현재 옛 시청사를 헐고 들어선 공영주차장 ㅡ 옛시청사가 민간에 매각되어 2012년 철거되어버린 현장.근현대 건물도 문화재인데 철거를 막을 방법은 없었는지 아쉽기만 하다. ▲ 현재의 서문로 ㅡ 60년대 사진과 비교하면 그때보다 더 보행자가 없다 . 위의 60년대 사진 우측의 당구장표시가 있는 건물이 현재사진 우측에 있는 주황색 건물인것 같다. ■서문터 ▲ 서문이었던 진서루의 옛모습 - 서문에는 원래 백호루라는 명칭의 누각이 있었으나 후에 진서루로 이름이 바뀐다.
▲ ①서문터 및 성굽길 ②성내교회 ③조일구락부(구, 제주극장) ④남문터 ⑤오현단 및 제주읍성지 ⑥제이각 ⑦가라쿳물 터 ⑧남수각터 ⑨성곽옛길 ⑩0동문터 ⑪1동문성굽길 ⑫기상청입구 잔존성곽구간 ⑬공신정터 ⑭고씨가옥 이제 제주의 성곽길을 따라 걷습니다. 출발은 관덕정 앞에서 시작합니다. ▲ 김승욱 서문터 및 서문 성굽길ㅡ성내교회ㅡ구 제주극장ㅡ화교소학교 ㅡ남문터ㅡ오현단 및 제주읍성지ㅡ제이각(청풍대)ㅡ가라쿳물터ㅡ남수각터(남수구터)ㅡ남측성곽옛길ㅡ동문터ㅡ동문 성굽길ㅡ기상청입구 잔존성곽구간ㅡ공신정터ㅡ고씨가옥ㅡ북초등학교북측길ㅡ서문ㅡ관덕정으로 이어지는 코스입니다. 관덕정 앞 광장은 옛날 관아 내의 활쏘기를 했던 넓은 공간으로, 제주의 근현대를 비롯한 제주의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주의 역사적 중심공간입니다. 오늘은 일단 사진으로나마 관덕정의 과거와 오늘을 잠시 음미합니다. ▲ 1902년도 관덕정 (망해가는 나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여 처연하게 보인다) ▲ 1946년도 관덕정 (일제
읍(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향촌사회 행정구역 명칭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예전에 달랐습니다. 그 뜻이 태동하게 된 배경은 성(城)으로 둘러싸여 백성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될 때와 같이 행정구역상 명칭인 읍과는 동일한 단어를 쓰지만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정의읍성, 대정읍성도 같은 의미지요. ▲ 최근 발굴된 '제주목도성지도'의 일부. ①동치성 위는 '청풍대'로 표시돼 있고 ②는 '일각'이라 돼 있다. ③은 제주성내에 있던 6과원 중 중과원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많은 건물지가 표지돼 있다. 일반적으로 큰 도읍의 성을 도성(예, 한양도성)이라고 하는데 제주읍성의 지도 중 하나인(위 사진) '제주목도성지도'에서도 '도성지도'라 했고,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도 역시 '제주도성'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제주읍성이 그만큼 지역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합니다. 따라서 이왕이면 제주도성으로 칭하는게 맞다고 생각해봅니다만 일반적인 명칭인 제주읍성 또는 제주성으로 해서 포
##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입니다. 제주의 역사는 사실 문헌으로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기록이 전해져 오지 않거나 대부분 소실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걸어온 흔적,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유산에 역사는 더듬어 볼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제주역사나들이’는 답사기행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다시 반추하는 과정을 거친 결과물입니다. 필자는 향토사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건축 전문가로서, 문명사적 탐구자로서 제주의 길과 유적, 유물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 제주가 걸어온 과거와 지금의 제주를 통해 가야될 우리의 미래를 가늠합니다. 애독바랍니다./ 편집자 주 ‘제주읍’은 조선조 제주의 중심입니다. 지금은 ‘원도심’으로 불리지만 우리 말로 바꾸면 ‘옛도심’이란 말이 더 나을 듯도 합니다. '제주역사 나들이‘는 그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부터 발걸음을 뗍니다. 제주시 원도심(제주읍)은 근현대의 제주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비록 신제주 개발등 도시의 확장에 따라 신도심에 비해 상대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