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수 논설위원 사흘에 걸친 탐라국입춘굿놀이가 끝나니 제주목관아 일대가 다시 조용해졌다. 장수 수(帥)라고 적힌 사령관의 황색 깃발이 저 홀로 찬바람에 펄럭일 뿐이다. “과거 제주의 중심이던 제주목관아가 복원됐지만 운영방향을 잃으면서 외국인 관광객 투어코스에서도 외면 받는 ‘죽은 문화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지난 11월초 제주의 어느 신문은 이곳이 도정감사에 오른 일을 이렇게 보도했다. 행사도 프로그램도 마땅한 게 없고, 있다고 해도 몇 년째 똑 같다는 지적이 나왔다. 운영 적자폭은 매년 늘었다. 제주목관아는 조선시대 목사가 행정사무를 보던, 지금의 도청과 같은 곳으로 1993년 복원되면서 국가사적에 지정됐다. 탐라시대부터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유서 깊은 원도심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나 발길은 뜸하다. 그렇다면 관광객들은 왜 이곳을 외면할까? 복원된 유적지가 대개 그렇듯이 박제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입구에 설치된 안내문부터 읽어보기가 벅차다.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전문가들이나 아는 고고학과 서지학을 동원하며 이 '장대한' 복원공사를 어떻게 성사시켰는지에 대한
▲ 병자호란이 시대적 배경인 영화 <최종별기 활>의 한 장면 내몽골을 통일한 후금(後金)의 태종은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면서 자신을 황제로 칭한다. 그는 1636년 사신 용골대(龍骨大)를 조선에 보내 군신관계를 맺고 명나라와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명에 대한 사대사상에 사로잡힌 조선의 왕 인조는 용골대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용골대는 서울을 떠나면서 객사의 벽 위에 ‘청(靑)’자 한 글자를 써놓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청(靑)자는 십(十)+이월(二月)이 되며 이것은 12월 압록강에 얼음이 얼 때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는 예고한 것이며 전쟁 시기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날씨조건에 맞춘 것이라고 말한다. 내몽골을 통일한 후금의 병력은 아시아에서 가장 추위에 적응이 잘 된 군사들이었기에 이런 해석이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의 왕이 사신을 만나주지도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한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본래 이들은 만주 북부와 몽골 지방에 살던 기마 민족으로 겨울에는 -40℃까지 떨어지는 혹한과 살을 에는
제주성은 내성-탱자성-해자-외성의 철벽 구조였다 유배인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 애달픈 사랑만 한 것이 아니라 1811년 목사로 부임해 와서는 제주성의 정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특히 그는 성 밖의 이중성, 즉 외성(外城)을 새로 둘렀다. 이런 엄청난 사실은 '비변사등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의아한 일이다. 조정철은 왕에게 "탐라의 내성(內城)과 바깥 지성(枳城 : 탱자성)은 예로부터 없었던 성의 체제이며 천험(天險)의 요지"였다며 상당히 훼손된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린다. 본성을 내성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성 밖에 성을 한 바퀴 더 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에 착수하기 전에 왕의 허락을 구한다. "성첩(城堞)은 예전과 같이 그대로 두고 바깥에 성을 쌓아 그 사이에 12개의 과실 정원을 설치하여 모두 귤과 유자를 심고 다시 성과 정원을 주관할 사람을 두어 수리 보호하고 감수하는 일을 맡기게 하소서." ▲ 100여 년 전의 지적도에서 확인되는 내성, 탱자성, 해자, 외성 성첩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병을 쏘거나 방어하는 곳이다. 기존
기와 한 장이 나를 조각 맞추기 게임으로 몰아넣었다. 원도심 답사가 심각한 취미로 자리 잡은 지난 가을 어느 날이었다. 대개 혼자 발품을 팔다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같이 다녔는데, 그 날의 동행은 한옥 전문 대목장인 친구 성문순이었다. 조선시대 유사시 총사령관의 작전본부였던 터에 축대는 물론 기왓장이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잘 만들어진 초석과 기둥도 방치되어 있었다. 그날의 수확은 수성소임신이월(守城所壬申二月)이라 새겨진 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제주성을 지키는 어떤 건축물이 임신년 이월에 지어졌다는 이야기다. ▲ 수성소임신이월이라고 새겨진 기와 사진을 본 윤봉택 선생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말 좋은 자료를 발굴했다"며 "제주성에 수성소가 있었다니 흥분된다. 대부분 수성소는 큰 성에만 있는데, 이 자료로 인하여 제주성에도 수성소가 있었음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 말했다. 매장문화재 발굴 신고를 하라는 권고를 잠시 미루고 추가답사와 관련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이와 비슷한 발굴은 이미 두 번 있었지만 조각이 나서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었다. 제주목관아 터 발굴 현장에서 성소임신이월(城所壬申二月)이라는
▲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일본헌법 9조 노벨평화상 추천 한국위원회’가 ‘9조회’와 다카노스 나오미(鷹單直美·38)씨를 2015년도 노벨평화상 공동후보로 추천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씨를 포함한 일본 원로 지식인 9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9조회’는 일본 우익의 헌법 개정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인 모임이다. 다카노스 나오미는 2013년 8월 ‘헌법 9조 노벨평화상 실행위원회’를 설립하여 ‘일본헌법 9조’를 지켜온 일본국민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해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여온 두 아이의 어머니다. 다카노스 나오미씨는 2013년 1월 노벨위원회에 ‘일본헌법 9조’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에서 '노벨평화상 수상 대상은 개인이나 단체로 한정돼 있고 헌법과 같이 추상적인 것은 후보가 될 수 없다'는 답신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일본헌법 9조’를 지켜온 일본 국민을 후보로 추천하였다. 다카노스 나오미씨는 ‘일본헌법 9조&rsqu
제주에는 새해가 세 번 있다. 올해는 1월 1일 신정, 2월 4일 입춘, 2월 19일 설날이다. 일년을 15일 단위로 나누어 표시한 24절기의 첫날인 입춘을 제주사람들은 새해가 아니라 새철 드는 날이라 부른다. 봄 춘(春)이라고 쓰나 이 날의 날씨는 대개 춥다. 칼바람에 폭설까지 동반해 일년 중 가장 추운 날도 있다. 입춘이 중국의 화북 지방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탐라국 입춘굿 놀이. [제이누리 DB] 우리나라에서 지금의 입춘은 입춘대길(立春大吉)이나 건양다경(建陽多慶) 같은 축원의 글을 써 대문에 붙이는 정도로 가볍게 지난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인삿말이다. 입춘의 기원문(입춘첩)은 꼭 입춘대길 뿐만 아니라 각자 맘에 드는 구절을 써 내걸면 된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에게 입춘맞이는 아직도 각별하다. 입춘 사흘전 까지 약 일주일 동안 섬 전체가 들썩인다. 열에 한두 집이 이사를 하는, 세계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사 뿐만 아니라 헌 데 고치고 묵은 것은 버린다. 또 새 것을 만들거나 들이는 이 시기를 신구간(新舊間)이라 하는데 묵은 해와 새해의 교체기라는 뜻이다
▲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78호 우리나라 국보(國寶) 및 보물 등의 일련번호가 폐지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국보를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총 317개의 국보가 있다. 1호가 숭례문이다. 국보 번호 폐지 논의는 국보 1호에 숭례문이 적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1934년 8월 우리나라 보물(국보) 153건을 지정할 때 숭례문을 1호로 했다. 당시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 입성에 사용한 문을 기념하기 위한 속셈이 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 때문에 1996년 이후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국보 1호 교체가 논의됐지만 “혼란을 부른다”는 문화재위원회 반대로 무산됐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자 다시 1호 교체 주장이 대두했다. 지난해 숭례문 부실 복구 사태까지 겹치면서 번호 교체나 폐지 등 개선 작업은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83호 “일제가 자신들의 승리를 기념해 1호로 정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나라에선 이에 맞서 ‘1호 숭례문’을 지킬 논리도 명분도 없
▲ 일터인 바다작업장으로 가는 해녀행렬. [제이누리DB] 아버지는 동네에서 힘이 세기로 소문난 장정이었다.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힘에 부치면 아버지를 찾아서 ‘힘을 보태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단다. 게다가 만능 일꾼이라서 집을 짓는 건축이나 밭담을 다는 석수일, 밭을 가는 쟁기질은 물론 갈치나 자리를 잡는 어부 일도 능숙하였다. 우리가 사는 집도 아버지가 지으셨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동트는 새벽에 밭갈이를 시작하면 해가 기우는 어스름까지 ‘이랴 이럇’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소를 어루만지면서 친구에게 하듯이 ‘속았다(수고했다)’며 다독였다. 남이 이틀 걸려 하는 일을 아버지는 하루 만에 해치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할 때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눈을 맞추면 손발이 척척 돌아가는 커플이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도 산남에서 1등 가는 보리, 유채, 고구마를 거둬냈다. 그처럼 아버지가 차별적으로 농사일의 경쟁력이 높았던 데는 남다른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밥에만 식구들 몰래 참기름을 듬뿍 뿌려놓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고래(古來
‘재의냐 추경이냐 (... 이것이 문제로다)’ 기자가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면 십중팔구는 품질이 나쁜 기사일 가능성이 높다. ‘소유냐 존재냐’의 구도 위에 현재의 사안(事案)을 덧씌워서 핵심 쟁점이 마치 존엄의 우열을 따지기 어려운 두 개의 지향인 것처럼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어느 편의 오류도 정공할 배짱은 없으니까 대중의 명확한 판단을 흐리게 해서라도 미디어의 영향력은 유지하고 싶은 경우일 것이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말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같으면 그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이런 대중의 급소를 노린다. 제주자치도가 의회의 예산 삭감으로 파행을 겪고 있다. 국비보조사업의 도비 부담금은 물론, 필수경비인 공공운영비를 망라한 무차별 삭감으로 도정이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원희룡 도지사는 재의를 요구하겠다고 하고, 구성지 의장은 추경안을 제출하라고 공을 미루는데, 애꿎은 도민은 맞받아칠 상대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도내에 십 수개가 넘는 언론은 공을 치고받는 정선아리랑만 제주판으로 표절하여 중계할 뿐, 둘 중 어느 한쪽의 반칙은 지적을 못한다. 무섭거나 재미있거나 모르거나 성가시거나..
▲ 정경호 전 제주도의회 의원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지 못한 어느 집에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어찌어찌해서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짱’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불안했다. 계속해서 오래오래 ‘짱’이 되고 싶은데 사정이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짱’으로 여기게 한 것은 ‘말(言) 펀치(Punch)' 하나인데, 이게 언제 ‘뻥’이라는 것이 들통 날지 모를 일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짱’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말펀치’ 이외에 동네아이들의 환심을 살 그 무엇이 필요했다. 아이가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그 무엇은 동네 아이들에게 피자 같은 맛있는 군것질을 사주거나, 스케이트장 입장료를 호기롭게 대신 내주거나, 필요하다면 15금(禁)정도의 동영상 유에스비(USB)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에게는 그런 것들을 실행할 만큼의 돈이 없었다.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오래오래 ‘짱’의 자리를 누리려는 이 아이의 철부지 욕심은 급
올해로 93세인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지금이야 내가 ‘모신다’고 할 수 있지만, 아흔이 되기 전까진 사실상 어머니가 우리를 돌보셨다. 어머닌 여느 제주도 할머니들처럼 과수원의 김을 매고, 마당을 가꾸고, 길가의 잡초도 뽑으셨다. 집안의 모든 식물들은 어머니 손길로 사철 꽃을 피워냈고, 물때가 되면 바다에 가서 보말까지 잡아오셨다. 가끔은 시장에선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산 오분작을 잡으실 때도 있었다. "어떵 이 귀헌 것들이 나 눈에 들려신고 이(어떻게 이 귀한 것들이 내 눈에 보였을까)? 어떵사 지꺼진지, 니 주잰 솔째기 곱정 놔뒀져(얼마나 기쁘던지, 너 주려고 살짝 숨겨 두었다). 아이덜 생각허지 말앙 싱싱헐 때 어서 먹어불라(아이들 생각하지 말고 싱싱할 때 빨리 먹어버려라). 닌 두린 때부터 안질이 안 조아부난 눈을 애껴사 헌다(넌 어려서부터 눈이 안 좋았으니 눈을 아껴야 한다)" 어머니는 50년간 대포 바다에서 물질을 하신 상군 잠수다. ‘숨비질 배왕 놈 주지 아녀’라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제주해녀 생애사 조사보고서’에도 소개가 되었으니, 동네의 대표 해녀인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0월 영국의 일간지 타임(Times)은 사설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비관적인 전망을 하였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건전하게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길 바라는 것이 더 이성적일 것이다(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사설이 게재되었을 시기에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최빈국 대열에 속할 정도로 매우 나빴다. 이후 1955년 한국을 찾은 ‘유엔한국위원회’의 메논(Menon)도 한국경제의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평했다. 결코 과도한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한국 상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적절하고도 합당한 평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국민들은 기적이라고 칭할 만한 놀라운 경제성장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였다. 영국의 시사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계열사인 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