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 한 장이 나를 조각 맞추기 게임으로 몰아넣었다.
원도심 답사가 심각한 취미로 자리 잡은 지난 가을 어느 날이었다. 대개 혼자 발품을 팔다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같이 다녔는데, 그 날의 동행은 한옥 전문 대목장인 친구 성문순이었다.
조선시대 유사시 총사령관의 작전본부였던 터에 축대는 물론 기왓장이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잘 만들어진 초석과 기둥도 방치되어 있었다. 그날의 수확은 수성소임신이월(守城所壬申二月)이라 새겨진 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제주성을 지키는 어떤 건축물이 임신년 이월에 지어졌다는 이야기다.
사진을 본 윤봉택 선생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말 좋은 자료를 발굴했다"며 "제주성에 수성소가 있었다니 흥분된다. 대부분 수성소는 큰 성에만 있는데, 이 자료로 인하여 제주성에도 수성소가 있었음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 말했다. 매장문화재 발굴 신고를 하라는 권고를 잠시 미루고 추가답사와 관련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이와 비슷한 발굴은 이미 두 번 있었지만 조각이 나서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었다. 제주목관아 터 발굴 현장에서 성소임신이월(城所壬申二月)이라는 글이 적힌 와편이 나온 적이 있고 또, 지난 2013년 오현단 동쪽성벽에서는 수성소(守城所), 수성병○임신(守城丙○壬申), 임신이월(壬申二月), 병인춘(丙寅春), 와병인(瓦丙寅), 성조와(城造瓦) 같은 와편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인 수성소임신이월(守城所壬申二月) 와편으로, 수성소가 세 군데에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성문 다리 들어 올리던 수성소가 있었다
그렇다면 실록에도 잘 나오지 않는 수성소는 어떤 기능을 했을까? 임신년 이월과 병인년 봄은 언제일까? 그 무렵 제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사료에 수성소라는 표기와 해당 기능에 대해 속 시원히 풀어놓은 연구가 없어 보였는데, 동료 교사이자 제주도문화재위원인 한금순 선생의 도움으로 어렵게 찾았다.
1760년대의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攬)’이라는 문서에 수성소(守城所)의 업무와 인원 배치에 대한 이야기가 번역이 되지 않은 채로 도서관에 있었다. 당시 제주 삼읍에는 1만5290명이라는 많은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성안의 여러 관청 가운데 수성소가 있었는데, 성문거교군(城門擧橋軍)이 이곳에 근무했다. 성문 앞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들어 올리던 군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통행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정규군이던 직군(直軍)이 맡았다. 이 수성소에는 또 목수와 석수들이 근무하며 제주 삼읍의 모든 성은 물론 관청과 향교 같은 공공건물의 보수를 맡았다.
이렇게 밧줄이나 쇠사슬로 들어 올리는 다리를 낚시질과 닮았다고 해서 조교(釣橋)라고 한다. 운하 같은 곳에 배가 지나갈 때, 다리 한쪽 또는 양쪽을 들어 올려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다리는 도개교(跳開橋)라 하는데, 원리는 비슷하다. 이런 다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성이 있는 곳이면 무수히 나타나는데, '과연 제주성에도 설마?' 했다간 사람 잡는다. 제대로 된 성의 둘레에는 항상 해자(垓子/垓字)가 파여 있었다. 심지어 해자가 없는 성은 성이 아니라 단순한 판잣집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적의 접근이나 진격을 막기 위하여 일부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은 곳이 해자다. 대개 물을 채워 넣었는데, 구덩이만 파 놓은 것도 있었다. 제주의 땅은 물 빠짐이 좋아서 빈 공호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런 해자 위에 조교를 설치해 통행을 통제했는데, 해자 없는 조교는 있을 수가 없고 조교 없는 거교군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 누가 제주성에 해자를 둘렀고 성문 앞에 조교를 설치했을까?
1510년 어느 날, 삼공이 왕에게 제주목사를 천거한다. 삼공(三公)이란 왕의 수족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었으니 이 셋의 입이 합쳐진 것으로 보아 사안의 중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북쪽 국경 못지않게 제주의 방어가 중요한데, 김석철만 한 인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왕은 그 해에 그가 삼포왜란 진압하는 걸 본 후, 제주가 왜구의 표적이 될 것이라 예측하고 김석철을 보낸다. 김석철 목사는 제주에 와서 성의 방어시설 확충에 힘썼다. 그는 "제주성 주위에 긴 참호를 아주 깊게 파서 성문보다 낮게 하여 모두 널판으로 다리를 놓아 밤에는 들어 올리고 낮에는 깔아놓아 걱정 없이 방비하였다"라는 기록의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이 때가 1512년 임신년, 60년마다 되풀이되는 이 해가 기왓장의 명문과 겹친다. 동쪽 산지천과 서쪽 병문천을 자연해자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나머지 구간은 인공해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석철은 제주에 있으면서 적선(賊船)이 정박할 만한 곳에는 다 성을 쌓았으니 곧 3성 9진 25봉수 38연대 및 환해장성으로 석갑을 두른 듯 방어 시스템을 갖췄다.
이후로 성곽의 증개축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공사는 1565년 곽흘 목사가 부임하여 산지천 너머 동쪽 언덕까지 성을 확장한 일이었다. 10년 전에 을묘왜변이 일어났었다. 산지천의 남수각 위 오현교 다리에 가보면 ‘을묘왜변 전적지’라는 표지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1555년에 남해안에 대거 침입하였다가 대패하여 쫓겨 가던 왜적 1000여 명이 선박 40여 척을 타고 이곳 제주도에 침범한 사건인데, 당시 목사 김수문이 70여 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적을 격퇴했다는 곳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일대는 읍성 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지였다. 곽흘 목사가 이 지역을 포함하여 성을 동쪽 높은 곳으로 확장했다고 하여 이를 동성(東城)이라 한다. 이 때 목사가 겸한 총사령관의 본부인 장대(將臺)를 가장 높은 곳에 지었으니 곧 운주당이다. 바로 이 운주당 터에서 세 번째 수성소 와편이 나왔다.
임진왜란(1592-1598) 후인 1601년, 민정을 시찰하러 제주를 찾은 김상헌 어사 앞에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제주성을 지키는 수성군(守城軍)이 1300명이었는데, 여군이 60%를 넘겼던 것이다. 성 위에서 보초를 섰다고 하니 평소 창검술은 물론이고 궁술도 익혔겠다.
여정(女丁)이라 불린 이 여군은 대정성과 정의성에도 있었다. 오직 제주에만 있었기에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여정은 민간으로 들어가면 예청이라 불리며 ‘여편네’라는 뜻으로 쓰였다.
여정의 잠재된 DNA는 6.25가 터졌을 때 수많은 여학생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사실로 발휘되었다. 제주만이 갖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소중한 자원이다. <철옹성 제주성 2편으로 이어집니다>
☞강민수는? =어느 대기업 회장실과 특급호텔 홍보실장을 거쳐 어느 영어교재 전문출판사의 초대 편집장과 총괄임원으로 3백여 권의 교재를 만들어 1억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했다. 어린이를 위한 영어 스토리 Rainbow Readers 42편을 썼고, 제주도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제주문화 콘텐츠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대안 중심의 환경운동가로 제주 최초의 마을 만들기 사례인 예래생태마을의 입안자이며 펭귄수영대회 등의 이벤트 개발자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의 한 고등학교 초빙으로 영어를 강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