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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나는 왜 해녀가 되고 싶었나?

 

나이 50에 새로운 직장을 찾아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것은 어쩌면 17세에 육지로 원정물질을 떠났던 내 어머니와 비슷한 행로였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삶에 대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누르는 여정이었으니까.

 

서울 생활은 좀처럼 친숙해지지가 않았다.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였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지하철, 하늘을 가리는 마천루, 복잡한 명동과 화려한 강남 거리를 당당하게 헤쳐 가는 사람들이 그토록 생소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그 도시로부터 쫓겨난 내 할아버지의 심경이 나에게 투영되어 은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돌, 바람처럼 대자연에 익숙한 제주여자다. 나의 할아버지인 송암공 허손(許愻)은 고려말에 대제학의 자리에 있다가, 조선이 건국될 때 제주도로 귀양 오신 분이다. 그 바람에 나는 입도 24세 손, 제주에 들어온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제주인이 되었다.

 

요컨대 제주의 DNA가 뼛속까지 녹아 있는 원주민이란 얘기다. 그 때문에 그렇게도 서울과 궁합이 맞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서울살이가 그다지도 답답하고, 불편하고, 고단하고, 외로울 수가 있으랴.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는 이질감과 가슴으로 통하지 않는 단절의 쓸쓸함이라니....

 

정말이지 한강이 없었다면 곧바로 질식하고 말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부적응상태를 곰곰이 따져보니, 서울이 견디기 힘든 진짜 이유는 바다가 없는 탓이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어떻게 육지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싶게 나의 심신은 피폐해져 갔다.

 

되돌아보면 나는, 바다 냄새가 물씬한 포구마을에서 태어나, 3일 만에 바다에 누워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한 번도 바다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서울은 내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한강이 바다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해순이가 산골로 시집간 후부터 수수밭에 가면 수숫대가 미역발 같고, 콩밭에 가면 콩밭이 바다로 보였던 것과 유사한 증세를 낳았다. 물질로 잔뼈가 굵은 해순이에게 산골은 물을 떠난 고기마냥 견딜 수 없는 사지(死地)였으니 말이다.

 

오뉴월 콩밭에 들어서면 깝북 숨이 막히고, 바랭이풀을 한골 뜯고 나면 손아귀에 맥이 탁 풀리는 나날들. 맥없이 주저앉아 밭고랑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듯이 가슴이 답답해 오더니, 어느 날, 갑자기 수숫대가 미역발 같고, 콩밭이 온통 바다로 보이는 거였다.

 

바로 그 해순이 마냥 서울의 나도 시나브로 심신의 병이 깊어갔다. 어느 날, 병원을 찾은 내게 의사는 ‘암’을 선고했다. 서울살이 3년만의 일이었다. 암이란 것이 주로 스트레스와 음식, 공기 등에 기인해서 발생한다면, ‘당연하지’ 싶은 결과였다.

 

의사의 암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병원은 나를 국민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암 환자로 등록했다.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국가의 어떠한 혜택도 받고 싶지 않다 했지만, 암에 관한한 예외가 없단다. ‘아, 나는 국가의 암적 존재구나’ 하는 인식으로부터 암의 고통은 시작되는 거였다.

 

나 자신의 건강보다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집안의 가장에게도 그것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당장 직장이 문제로 다가왔다. 암이란 게 알려지면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염려가 배려로 나타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일에 대한 입장이 냉정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당사자 입장에서는 암이란 사실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이다.

 

의사는 보다 정밀한 진단을 위해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를 찍어보자고 하였다. ‘자기공명영상’이라 이름 붙여진 이 기계는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커다란 자석통 속에 인체를 넣고 고주파를 발생시켜 영상으로 인체 내 종양의 위치를 확인하는 장치다. 그런 다음에 그것이 암과 같은 악성인지 아닌지를 분석해서 결과를 알려주는 게 최종 임무였다.

 

검사실에서는 이 장치가 작동할 때 강한 자기장을 발생시키므로 자석에 달라붙는 금속류의 액세서리 등을 제거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자 검사원은 다시 한 번 금속류의 부착 여부를 확인하면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분위기는 마치 환자를 기계 안에 집어넣어서 정품인지 불량품인지 검사해 보려는 인증절차의 시작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고약함도 잠시였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고 지시된 번호의 자석통에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누우니, 비좁고 깜깜한 통 안이 마치 무덤 속처럼 느껴졌다. 호흡이 불편해지는 갑갑함과 비참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지나온 삶들이 한순간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렇게 악착같이 달려온 내 삶의 종착역이 이것인가’ 여겨지는 순간, 그만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설움과 슬픔이 한 데 어우러져서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덩어리가 목구멍을 통해 터져 나오려고 요동을 쳤다.

 

그 순간,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더라도 운명의 여신 앞에서 눈물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고서 있는 힘을 다해 눈물을 삼키려고 용을 썼다. 그 바람에 온 몸에서 분출된 열기가 팽창하더니 자석통을 뜨거운 압력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마치 폭발 직전의 폭탄과 같았으려니.

 

바로 그 순간, 바깥에서 이름을 부르면서 ‘침착하라’는 경고음을 보내왔다. 조용히 있지 않으면 검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얼른 숨을 죽이고서 시체처럼 잠잠해졌다. MRI에 찍히는 30분 동안 스스로의 상태를 냉정하게 떠올려보았다. 설사 내 몸에 암이란 게 생겼다 해도 내가 해야 할 일과 역할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제주여자로 태어났으면 한 식솔은 너끈히 책임져야지. 제주도 어머니들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나도 이제부터는 돌처럼 바람처럼 살아가야 하리라.

 

MRI를 마친 후에는 보다 확실해진 암의 정체를 붙들고서 마치 샅바를 움켜쥔 씨름선수처럼 날마다 싸워야 하였다. 이 싸움은 암이라는 상대방과 겨루는 동시에 자기 자신과도 부단히 다퉈야 하는 이중고의 전투였다. 다행히 방사선 치료만 하면 되는 유형의 암이었지만, 암병동을 드나드는 동안 우울과 절망이 따라다녔다. 이들을 깨끗이 물리치는 것은 혼자서 감당하기엔 버거운 싸움이었다.

 

그렇게 싸우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니영 같이 한 1년만 살아 봥 죽어지민 원이 어시키여(너와 같이 1년만 살아보고 죽을 수 있다면 원이 없겠구나)’ 라면서 막무가내 떼를 쓰기 시작했다. 서울로 가려고 대문을 나서면 문밖까지 나와서 ‘꼭 이래야 사는 거냐’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주말이 되면 언제 올지 모를 딸을 기다리면서 아침부터 대문 앞에 나와 앉았다. 오도카니 바다를 응시하는 모양이 마치 망부석과 같았다. 바다는 어머니에게 간절한 기도의 대상이었다. 그처럼 고집스런 어머니의 태도는 이상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아프다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저다지도 완강하게 떼를 쓰는 것은 어머니 나름의 모성적 예감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서울살이를 두고 애를 태우는 사이, 삶에 대한 나의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사는 게 뭔가? 일은 나중에 다시 구하면 되지만, 어머니와의 시간은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노모를 핑계 삼아 불쑥 귀향해 버렸다. 짓누르듯이 답답한 가슴이 ‘탁’ 하고 트이면서, ‘아, 좀 살 것 같은 시원함’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실은, 그동안도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함께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파도치는 바다의 노래는 또한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갈매기라도 끼룩대며 나를 향해 날개를 퍼덕거리면 ‘잘 왔어. 힘 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라고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바다와의 사랑, 어렸을 적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마치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바다를 향해 고요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발꿈치를 들고 두 팔을 활짝 벌리고서 온 몸이 부풀어 오르도록 심호흡을 하였다. 그토록 그리웠던 바다의 품 안에서 가슴이 터지도록 갯내음을 들이켰다. 아, 그렇게도 그립던 내 어머니의 바당밭이다. ‘물질 한 번 해 보았으면’ 하는 갈망이 내면에서 솟구쳐 올랐다. “호오이, 호∼이” 하고 숨비소리 한 번 속 시원하게 내질러 보고 싶었다.

 

하루는 썰물이 되어서 밑바닥을 드러낸 바다로 마구 달려갔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보말을 잡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퍼질러 앉아서 온 몸을 깨울 듯이 상큼한 갯내음을 가슴 가득 들이켰다. 아, 어릴 적에 맛보았던 그 냄새, 어머니의 가슴처럼 넉넉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돌 틈 사이로 비죽이 얼굴을 내밀어서 ‘매롱’ 하고 혀를 내미는 참게가 보였다. 돌덩이를 들추자마자 게는 달아나고 대신에 보말들이 얼굴을 맞대고서 앙증맞게 웃었다. ‘너희들 참 오랜만이다. 다들 잘 지내고 있었구나. 나는 너희들 버리고 서울로 갔다가 그만 발병 나고 말았어. 하하하!’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친숙감과 평안함이 넉넉하게 다가왔다.

 

그로부터 나는 물때만 되면 바다로 나가서 보말을 잡았다. 예전처럼 물질이 자유롭게 허용되었다면, 아마도 당장에 태왁을 짚고서 오리발을 힘차게 내저으며 먼 바다로 나갔으리라. 어쩌면 해녀의 딸들에게 바다는 영원한 어머니다.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면, 해녀인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만큼만 살아간다면 이 정도 고난쯤이야 두려울 게 무엇이랴.

 

‘이여도 싸나 이여도 싸나’를 소리 높여 외치다 보면 어떤 파도인들 못 넘어설 리 있을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숨이 다 끊어져져서 이제는 죽겠다 싶어도 ‘아이고, 어머니!’ 하는 숨비소리를 내지르면, 그렇게 목숨 걸고 물질해서 우리를 살리신 어머니처럼 사선을 넘고 또 넘어서 노년의 항구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아명허믄 못사느냐, 썰물이 이시민 밀물도 이신다. 오늘 호루 촘당 보민 잊어지곡, 살당보민 다 살아진다(아무려면 못살겠느냐. 썰물이 있으면 밀물도 있단다. 오늘 하루 참다 보면 잊어지고, 살다보면 다 살아진다)’는 어머니의 당부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이제는 어머니, 그 이름처럼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 내자. 해녀, 그 이름처럼 치열하게 세파를 견뎌내 보자! ‘호이 호오잇’ 숨비소리 내지르면서 인생의 바다를 넉넉히 헤엄쳐 보는 거다. 아, 내 어머니처럼 저 바다에 태왁을 띄우고서 인생의 파도를 담대하게 넘어서고자!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해녀의 길은 참으로 어려웠다. 해녀학교와 인턴십의 실적으로 수협 조합원까지는 되었지만, 해녀의 마지막 관문인 어촌계에는 들어가질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해녀학교와 인턴십을 하는 동안 실제로 물질을 할 수가 있어서 심신이 한층 더 튼튼해졌다는 사실이다.

 

덕택에 이제는 암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안전한 포구에 이른 듯도 하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그 때가 언제일지라도 무조건 어촌계원이 되어 보리라. 진짜 해녀가 되어서 사랑하는 저 바다의 품안에서 마음껏 숨비소리를 내질러 보고자! ‘호이 호오잇’ 하는 숨비질과 함께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을 바다에다 써보리라.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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