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의 종류로 영리적(營利的) 재배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 둘 있지만 내지(內地)의 우량종 온주(溫州), 네블, 하밀감(夏蜜柑)이 처음 재배된 것은 십삼년 전 미네모(某), 박영효(朴永孝) 양씨에 의해 시도되고 그 후 도(島)기술원이 조사․ 연구 결과 좋은 성적을 올려 유리하다는 것을 확인해서 계획을 수립, 대정(大正) 구년(1920년)부터 매년 칠, 팔천본의 우량종을 내지(內地)로부터 끌어 들어서 재배하고 있는데, 성적이 매우 양호하다.
현재 일단보(段步) 이상의 우량종 재배자는 삼명이며 성내(城內)의 홍(洪)씨는 일단(段)오묘보(畝步)로 순익(純益) 삼백엔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현재 내지로부터 조선(朝鮮)에 반입(搬入)되는 감귤(柑橘)은 농무국(農務局)의 조사에 따르면 연액(年額) 팔십팔만엔에 이르고 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조선의 토지에서 감귤을 생산하는 것은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미개의 보고 제주도, 1924).
제주도는 감귤의 자생지대권에 속하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자생하여왔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를 입증할 기록은 없다. 남방 원생지에서 북적도 해류를 타고 표류해온 과실종자에 의하여 번식되었을 수도 있고 또 일부는 사람의 왕래 때 들어온 과실종자에 의해 번식했을 수도 있다. 10여종의 재래감귤이 있는데 대부분 자생종과 도입종을 구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입종이라 해도 도입경로와 연도를 알 수 없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수인제(垂仁帝)의 명에 의해 서기 70년에 田道間守라는 사람이 상세국(尙世國)에서 비시향과(非時香果)를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비시향과는 감귤의 한 종류이며 상세국은 제주도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의 오랜 전설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三韓)에서 귤을 가지고 와 그것을 심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서기 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을 헌상(獻上)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고려태조 천수 8년(서기 925년) 겨울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치다’를 시작으로 ‘방물을 바쳤다', ’토물(土物)을 바쳤다‘ 라는 기록이 계속되는데 교역 물품이나 방물에 감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 권7의 기록에 의하면 문종(文宗) 6년(1052년) 3월에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제주도의 감귤이 세공으로 바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공은 임시과세인 별공에 대하여 해마다 정례적으로 공납하던 상공(常貢)을 뜻하므로 탐라의 감귤 세공(稅貢)의 유래가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원년(1392년)부터 제주도 귤유(橘柚)의 공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세종 8년(1426년)에는 호조의 게시(揭示)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해안에도 유자와 감자를 각 관서에 심게 하였다. 감귤(柑橘)이란 용어는 세조원년(1456년)에 제주도 안무사에 내린 유지 ‘세조실록(世祖實錄) 권2’에 나온다.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로 시작된 유지(諭旨)에는 감귤의 종류간 우열(금귤, 유감, 동정귤이 상이고 감자와 청귤이 다음이고 유자와 산귤이 또 그 다음), 제주과원의 관리실태와 공납충족을 위한 민폐, 사설 과수원에 대한 권장 방안, 번식 생리와 재식 확대, 진상방법의 개선방안 등을 기록하고 있다.
탐라지(耽羅誌, 효종 4년, 1653년)에 실린 과원총설(果園總說)에 의하면 제주 3읍의 관과원은 36개소(제주 22, 정의 8, 대정 6), 12종, 3600여 주였으며 이때 공납과 진상을 위한 총물량은 생과 8종류 8만6053여 개와 약재가 116근 10량이다. 관과원의 소산만으로는 이 수량을 채우기 쉽지 않았고 또 해난사고 등으로 수송에 애로가 많았다. 1704년 이형상 제주목사 당시에는 관과원이 42개소(제주29, 정의 7, 대정 6)로 증가되었다.
감귤재배는 관리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공납량의 연차적인 증가로 지방관리들의 횡포까지 가중되어 민폐가 심했기 때문에 차츰 재배 주수(株數)가 감소되었으며 고종 31년(1893년) 진상제도가 없어진 이후 점차 과수원이 황폐화 되었다.
귤과 밀감이 조흔 종류가 만코 이번에 개량종으로는 일본밀감이나 다름이 업는대 조선에서 매년 수임되는 밀감만 삼백만원이 된다는 바 제주개량종을 장려하면 그만한 수입은 제주인민의게로 도라 갈 것이라 한다(동아일보 1922년 12월 29일).
제주도에 온주밀감(溫州蜜柑)의 최초 도입은 1911년 엄탁가(Emsile, J. Touguet, 프랑스 출신)신부가 일본에 있던 친구로부터 묘목 15주를 선물 받아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원 ‘면형의 집’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11년 서홍동 출신인 김진려는 일본에 갔다가 구마모토(熊本) 지방에서 접목강습을 받고 온주밀감과 워싱톤네블을 가지고 와서 심었다.
오늘날 호적지(好適地)인 본도가 감귤의 부업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안성맞춤인 것인 본도의 지리적(地理的) 상태 및 경제적 요소는 경사지(傾斜地)의 이용과 토지, 노력(勞力)의 값싼 점에서 내지의 감귤생산자와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토성(土性)에 대해서 한마디 한다면, 내지의 저명한 산지(産地)는 모두가 경사(傾斜)진 역토(礫土)이다. 본도는 화산탄(火山炭)으로 이뤄지고 있어 아무 적지(敵地)이다(미개의 보고 제주도, 1924).
전라남도 종묘장 제주지장에서는 1913년에 워싱톤네블오렌지, 온주밀감, 하귤 등 3종류의 묘목 150본을 농가에 권장 재배하였으며 이후 서귀포 근처에 온주밀감원을 조성하였다.
규모를 갖춘 농장을 개설한 첫 사례는 미네(峯)라는 사람이 1913년에 온주밀감 2년생 묘목을 도입하여 서귀읍 서홍리(제주농원)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후 일본을 방문했던 한국인과 일본인에 의해 온주밀감과 와싱톤네블 오렌지, 하귤 등이 도입되었으며 당시 식산진흥(殖産振興)정책의 일환으로 각 농가에 감귤묘목을 배포하였으나 일부 농가에서는 감귤 심기를 회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본산 감귤이 자유롭게 유입되어 감귤판로가 막힌 점과 기술부족으로 정식(定植)하고 10~15년이 지난 후 결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년산(今年産) 제주밀감(濟州蜜柑)은 산미(酸味)가 절무(絶無)하야 일본산(日本産)보다 우승(優勝)하다는 호평(好評)이 자자(藉藉)한데 금반(今般)에 부산(釜山)으로 이백상(二百箱) 목포(木浦)로 이백상(二百箱)이 수출(輸出)되얏다더라(조선일보 1924년 12월 21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