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새로운 자치체제 운명을 가늠할 자치구조 개편의 문제가 다시금 제주도의 최대 현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12년 전인 2006년 제주도는 특별자치도 간판을 내걸면서 기초자치단체였던 4개 시・군이 문을 닫고, 2개 행정시 체제로 변화하는 진통을 겪었다. 하지만 풀뿌리 민주주의 실종과 행정서비스 실종 등 부작용이 곧바로 나타났다.
숱한 논란 속에 제주도는 의회 없는 행정시의 시장직선제와 행정권역 4개로 개편, 행정시장의 정당공천 배제 등의 내용을 담은 행정체제개편위원회의 권고안을 전격 수용했다.
제주도는 2022년 지방선거 적용을 목표로 내년 중으로 행정체제개편 추진에 필요한 제도개선 절차를 마무리 한다는 방침이다.
사실상 내년이 '새 제주형 자치구조' 출범이 분수령이 될 조짐이다. 그만큼 논란은 더욱 가속화할 태세다.
◇ 숱한 논란, 제주행정체제 개편의 역사 = 민선 3기였다. 당시 우근민 도지사는 2002년 9월17일 제주발전연구원에서 작성한 ‘제주도 행정계층구조 개편을 위한 기본계획’을 근거로 행정구조 개편 추진을 공표했다.
당시 제주발전연구원은 4개의 시・군 체제를 유지하되 사무를 재조정하는 방안과 남・북제주군을 동・서제주군으로 개편하는 방안, 제주도를 2개 시로 권역을 조정하는 방안, 시・군만 남겨두고 도를 폐지하는 방안, 시・군을 폐지하고 도 안에 읍면동만 남겨두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2002년 10월에는 행개위가 구성됐다. 당시 행개위는 시・군을 폐지하고 광역시에 읍면동을 두는 안과 당시 4개 시・군을 행정구로 전환하는 방안, 4개 시・군 경계를 조정하고 남・북제주군을 동・서제주군으로 개편하는 방안 등을 내놨다.
하지만 이를 추진하던 우 전 지사는 2004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당선무효형을 받고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논의는 중단되는 듯 했다.
바통은 김태환 전 지사가 이어받았다. 김 도정은 2005년 3월에 이르러 여론조사를 거쳐 행정구조 개편의 방안을 2개로 압축했다. 4개의 시・군 체제를 유지하는 ‘점진안’과 지금의 시스템인 2개 행저시만을 둔 제주도 단일 광역체제인 ‘혁신안’이었다.
점진안과 혁신안은 주민투표에 부쳐졌고, 투표참가자의 57%인 8만2919명의 찬성으로 혁신안이 채택됐다. 주민투표법 시행 후 처음 치러진 주민투표였다.
이를 토대로 2006년 민선 4기 지방선거부터는 도지사와 도의원만을 선출했다. 4개 시・군은 폐지됐고 시・군의회도 사라졌다. 행정시장은 도지사가 직접 임명했다. 그렇게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문제점이 곳곳에서 돌출되기 시작했다. 민원불편이 곳곳에서 제기됐고 제주・서귀포시 시장 자리는 ‘선거공신’의 몫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렇게 임명된 시장이 임기기간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하는 이들도 드물었다. 사실상 도 하부기관의 장으로 “도의 국・과장보다 못한 시장”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풀뿌리 민주주의 실종’이란 소리가 지소적으로 불거졌다.
행정제체개편의 첫단추를 끼웠던 우근민 전 지사는 민선 5기에 재선으로 복귀하자 행정체제 개편을 공약, 행정체제개편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권고를 토대로 2013년 시장직선제를 대안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도의회가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우 전 지사는 추진방침을 철회했다.
결국 행정체제개편은 민선 6기 원희룡 도정의 몫으로 넘어왔고 지난해 6월 행개위는 4개의 행정시와 의회가 없는 행정시장 직선제, 행정시장의 정당공천 배제 내용을 담은 권고안을 도에 제출했다. 하지만 그 후 1년 4개월, 그 권고안은 그저 책상서랍 속의 안으로만 남는 듯 했다.
◇ 권고안 제출 이후 1년 4개월 ... 이어지는 난항 = 행개위의 권고안에 대해 시민단체 등은 한마디로 "최악의 결론'이란 입장이다. 그동안 줄곧 거론돼온 '기초자치단체 부활'가 완전히 거리가 멀다란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지사가 시장을 임명하는 체제에서 직선제로 바뀐다한 들 무엇이 달라지는가"란 반문이다. 실제로 의회가 없는 행정시는 시장을 직선으로 선출한다한들 인사.조직.재정권이 없다. 현행 법령상 자치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도는 개편 논의를 보류했다. 지역 국회의원 및 도의회 등과의 협의를 통해 관련 헌법 개정 및 정부의 지방분권 로드맵이 마무리될 때까지 개편 논의를 보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연내 개헌은 사실상 무산됐다. 6.13 지방선거를 거치고 민선 7기 출범 이후인 9월에는 정부의 자치분권 로드맵도 발표됐다.
또 민선 7기 출범과 함께 행정체제개편의 조속한 진행과 논의 재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의회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행개위가 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듯 했지만 지난 9월20일 1년 3개월여 만에 다시 가진 회의에서 위원 전원이 사퇴했다. 권고안의 제출로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는 이유다.
도의회에서는 원 지사의 결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속히 권고안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특히 지난 10월 제주도의회의 행정사무감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는 지난 11월14일 행개위가 내놓은 행정체제 개편 관련 권고안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제주도의 선택은 결국 낡은 개편안” = 비판이 줄을 잇고 있다.
제주녹색당은 도가 권고안 수용을 발표한 날인 지난달 14일 성명을 통해 “원 지사는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도민의 열망과 도의회의 주문에 1년 반 동안 묵혀둔 낡은 개편안을 꺼냈다”며 “이는 제주도민과의 공론화 과정도, 별다른 성과도 없는 그 권고안”이라고 지적했다.
행개위의 권고안은 도내외의 사회적 논의가 모두 무시된 권고안이라는 지적과 함께 원 도정을 향해 개편안의 철회 및 도민 논의 등을 요구했다.
제주주민자치연대 역시 같은날 성명을 내고 "행정시장 직선제는 '직선제'라는 말만 있을 뿐인 짝퉁"이라며 "법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행정시장을 직선제로 뽑는 것은 유권자들이 투표 당일 일시적으로 참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자치입법권, 자치조직권, 자치재정권 등을 독립적으로 부여받지 못하는 지금의 임명제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주민자치연대는 그러면서 "행정시장 직선제보다는 풀뿌리 민주주의 구현에 기여할 수 있는 기초자치단체 부활을 포함한 다양한 논의와 공로화를 해달라"며 "원 도정은 이를 통해 책임있는 결정을 하라"고 요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은 지난달 24일 따로 토론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 토론회에서는 “행정시장 직선제가 되면 자동으로 기초자치단체가 부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도민들이 많다”는 지적과 함께 "도민들의 자기결정권 존중 차원에서 충분한 공론화를 통해 개편 방향을 도민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의당은 지난 7일 성명을 통해서도 “행정체제개편은 원점에서 재논의를 해야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지방의회를 두지 않고 행정시장을 뽑아본들 행정시장은 결국 하부행정기관의 장에 불과해 의미가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지난달 29일 오전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열린 ‘원희룡 도정 행정체제 개편안 긴급점검 토론회’를 통해 이와 같이 주장하며 "나아가 제주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겠다는 발상도 행정편의적 발상"이라고 폄하했다.
◇ 자치구조 개편, 어디로 가야 하나? = 무엇보다 그동안의 행정개편 논의에서 대세는 '기초자치단체의 부활'이었다. 지난 6.13선거 당선인 다수가 이를 공약했다.
제주도의회 강철남 의원(더불어민주당, 연동을)은 지난 9월4일 제11대 제주도의회의 첫 도정질문 자리에서 원 지사를 향해 기초자치단체의 부활을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강 의원은 “행개위 개편 추진 방향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초자치단체 부활’이라는 대안이 배제됐다는 것”이라며 “도민에게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자기결정권한’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기초자치단체 부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승수 대표 역시 지난달 29일 토론회에서 기초자치단체의 부활을 언급했다. 하 대표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4개 시・군 기초지방자치단체를 폐지한 것이 민주성을 훼손하고 주민 불편을 가중시켰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며 “행개위 권고문에서도 기초지방자치단체 폐지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그러면서 “지적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행정권역 조정방안에 대해서도 다른 목소리가 있다. 제주도의회 홍명환 의원(더불어민주당, 이도2동갑)은 행정권역을 4개로 나누는 안에 대한 대안으로 행정권역을 국회의원 선거구에 따라 3개 권역으로 나누는 방안을 강조했다.
홍 의원은 “행정권역을 4개 구역으로 나눴을 때 인구편차가 너무 심하다”고 지적했다. 홍 의원에 따르면 행정권역을 4개 권역으로 나눴을 경우 제주시 지역에 현재 인구의 56%가 집중된다. 동제주에는 13%, 서제주에는 15% 등이다.
홍 의원은 “규모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며 “예산분배 등에 있어서도 원할한 자치경쟁이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3개 권역으로 나누게 되면 인구가 동제주 25만과 서제주 22만, 서귀포 18만 등 비슷해질 것이다. 선의의 경쟁이 원활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와 달리 정치학계에선 다른 견해가 불거지고 있다. "그동안의 논의가 다분히 행정서비스와 권역 등 다분히 행정학적인 논의에 머물러 민주주의 작동과 주민주권이란 자치의 본질적 문제를 도외시했다"는 것이다.
그보단 유권자 대표성을 더 갖추기 위해 우선 제주특별자치도에 한해서라도 국회에서 논의중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의회 선거에 도입하는 방안과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3개 선거구를 통합, 다수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꿔 사표(死票)를 줄이는 방안, 기초자치정부의 부활과 권역조정, 의회와 집행부의 관계 재검토 등으로 '제주형 자치구조'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재욱 신라대 교수(전 한국지방정부학회장)은 "제주특별자치도는 학계에서 상당히 눈여겨 보는 이슈"라며 "그동안의 논의에서 소비자는 엄연히 도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제되고 행정 공무원 등이 소비자로 정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보단 특별자치도가 가야 할 길은 어떻게 더 민주주의가 잘 작동되고, 민의를 더 정확히 반영하며, 행정이 어떻게 주민자치를 더 잘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틀을 정립하는 것"이라며 "제주특별법은 그 점에서 우리나라 주민자치의 선도적 틀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아야 하고, 또 그 차원에서 노느이를 끌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도는 현제 행정시장 직선제에 대한 동의안을 도의회에 제출한 상태다. 행정시장 직선제의 경우는 제주특별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이다. 때문에 제주특별법 개정을 위한 제도개선을 정부에 요청하기 위해 도의원 재적의원 3분의 2이상 동의를 얻어야 한다.
행정권역 개편은 조례 개정으로 가능하다. 도는 내년 중으로 이러한 절차를 모두 마무리 한다는 방침이다.
이리 본다면 결국 '새 제주형 자치구조 개혁'의 칼자루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제주도의원들이 쥔 셈이다. 민주당이 현재 제주도의회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새로운 미래논의가 이제 '자치구조 개편'이란 빅이슈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2019년 제주의 한해가 서서히 새로운 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