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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5)] 꿩을 의인화한 노래

 

 

연유는 이렇다. 옛날 뒷날 궁핍했던 시절, 달리는 ‘족박’에 별 보이는 집에 겨우 겨우 보리쌀 한 됫박 얻어다가 고래에 박박 갈아 밥을 했다. 밥이 너무 적었다. 아버지 한 숟갈, 어머니 한 숟갈, 아들 한 숟갈, 며느리 한 숟갈 먹다보니 아버지가 화가 났다. 밥이 너무 적었던 탓이다. 요즘말로 ‘가폭’ 즉 가정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이 가폭은 권력 서열대로 동거하는 반려동물에게 까지 연달아 이어졌다. 결과는 참혹했지만 그 과정은 단순 명료했다. 먼저 화가 난 이 집안 가장 아방이 안주인인 어멍을 때렸다. 어느 정도로, 어떻게 때렸는지 모르지만 맞은 어머니는 화가 나 옆에 있는 장가 간 아들을 때렸다. 맞은 아들 역시 자기 각시인 며느리를 때렸다.

 

이때부터 더 큰 사단이 발생했다. 화가 난 며느리가 반려견을 때렸고 며느리에게 맞아 ‘용심(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심술궂은 마음)’난 개는 고양이를 때렸다. 고양이가 이를 참을 리 없다. 참지 못한 고양이가 쥐를 물었고, 궁지에 몰리면 호랑이에게도 대든다는 쥐는 좁쌀이 든 ‘구덕’을 뒤집어엎어 좁쌀을 쏟아 버렸다. 그 덕분에 닭들만 맛있는 좁쌀로 모래주머니를 채웠다는 줄거리다. 닭은 이빨이 없다. 씹지 않고 부리로 곡식을 주어먹고 모래주머니에서 소화한다. 그래서 닭에게 모래를 먹인다.

 

제주민요의 별미라 할 수 있는 꿩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궁금함이 있다. 하루 세끼 다 챙겨 먹으며 지낸지가 언제 부터인지, 매일 하루 세끼 곤밥(흰쌀밥) 먹기 시작한 때가 언제 부터인지. 다들 개인사적 기억을 되새겨 보면 하실 말씀들이 있으실 거다.

 

제주도에서 매일 하루 세 번 밥을 먹은 지가 언제 부터일까? 그리 오래지 않다.

 

예전 제주도에서는 조와 보리를 주식으로 하고 돼지고기 같은 육류나 어류 등은 제사나 잔칫날 같은 특별한 날만 먹었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목축을 근간으로 한 중산간 마을은 그나마 경제적으로 양호한 편이었으나 산촌이나 화전마을 사정은 많이 안 좋았다. 계절별로 겨울이 가장 곤궁한 시기였다. 이때는 식사 회수가 2회로 줄어들고 밥 대신 피죽 먹는 경우가 많았다. 부식은 주로 소채류였다. 식사 회수가 2회로 줄어든 건 산간마을 뿐 아니라 중산간 마을이나 해안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제주 전통음식을 공부하신 분들이 더 정확히 알고 계시겠지만, 제주 전통음식은 구황(救荒)음식, 즉 흉년이 들어 식량이 모자라거나 없을 때 먹는 음식이 많다. 못 먹는 거 빼고 다 먹었다. 범벅과 개역은 그나마 다행이고 초근목피, 심지어 먹을 수 있는 흙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먹을 수 있는 흙이 우리나라만 있지 않다. 지난번 독일에 가보니 자기네도 흉년 들어 먹을 게 없으면 먹을 수 있는 흙을 먹으며 연명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가끔 평소보다 잘 먹는 날도 있다. 농번기 때 공동 노동한 날 저녁에 산듸(육도, 陸稻)와 육고기, 생선류를 섭취했다. 마을행사나 잔치 같은 경조사 때 기르던 돼지를 추렴해 먹기도 했다. 산촌은 한 달에 한 번, 중산간 양촌(良村)은 5일에 한 번, 해촌은 20일에 한번 평소보다 잘 먹었다.

 

그럼 제주도에서 하루 세끼 매번 곤밥 먹으며, 심지어 도시락에 하얀 쌀밥을 싸고 다니기 시작한 때가 언제부터 일까? 가정 형편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역시 그리 오래전은 아닐 듯하다. 국민학교 때다. 지금에야 많이 생소하겠지만 당시 ‘혼분식 장려’ 글짓기에 나가 입상했던 적이 있다. 별거 아니었다. 자식들 키 크라고 밀가루 음식을 많이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 얘기, 양은 도시락에 조밥보다 고구마가 더 많이 들어 있는 열리 친구 얘기, 가운데 까만 줄이 선명한 보리밥을 반찬 없이도 맛있게 먹었던 모록밭 친구 얘기를 가감 없이 썼을 뿐이다. 도시락 검사도 있었다. 각자 도시락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선생님이 혼분식 검사를 했다. 여느 검사 때와 달리 대부분의 반 아이들은 혼분식 검사만큼은 자신 만만해 했다. 몸이 아파 이리에서 전학 온 재현이만 까만 보리밥을 얻어 자기 도시락 위에 살살 도포했다. 전학 오자마자 재현인 자기는 나중에 물리학자가 될 거라고 몇 번을 얘기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후 몸이 약한 재현이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자료에 의하면 1935년에 가서야 제주지역 쌀 소비량이 전국 수준에 미친다. 이전에는 보리와 조를 주로 했고 백미를 약간 섞였다. 즉, 보리, 조 등과 같은 잡곡과 보충하여 고구마를 많이 먹었다. 쌀은 나록(논벼)보다는 산듸(밭벼)를 가끔 먹었다. 연중 가장 충분히 영양을 섭취했던 시기는 9, 10, 11월로 식량으로 보리쌀이 확보되었던 시기였다. 백미(白米) 소비는 1, 2월과 6, 7월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 특별한 날, 즉 잔치나 명절, 농번기가 많았다. 고구마는 지표면을 따라 자라는 줄기식물이다. 태풍 같은 자연재해에도 타 전작곡물에 비해 피해가 적다. 때문에 비교적 수확량이 안정적인 구황(救荒)작물이다. 고구마(절간고구마 포함)는 1, 2, 3, 4, 5, 12월에 주로 소비된다. 1, 2, 3, 4월은 먹을 게 모자란 시기였다. 이 시기 고구마는 든든한 보충 겸 대체 식량이었다. 고구마를 삶아 먹기도 했지만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건조시킨 ‘감저 빼대기’(절간고구마)도 많이 삶아 먹었다.

 

요즘 꿩은 게으르다. 웬만하면 날지 않는다. 고작해야 조금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는 정도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주위에서 꿩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꿩놀레’는 우리에게 친근한 동물인 꿩을 의인화한 노래이다. 꿩을 통해 제주 여인들의 ‘기개와 근성’을 보여준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골자는 이렇다. 이러 저런 사건으로 세 번씩이나 서방을 잃고 상심하여 산 속 깊이 들어가 혼자 사는 장서방에게 솔개, 까마귀, 매가 동거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피부색, 외모, 직업, 성격, 과거사 등을 이유로 셋 다 거절하고 독수공방하고 있었다. 얼마 후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첫 번째 서방보다 훨씬 더 잘 생기고 스타일리시한 새 남편 ‘고슴’이 나타나 그와 함께 남은여생 잘 살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신을 가지고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 나아가야 할 때, 멈춰야 할 때,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게 쉽나. 제주에 전해지는 꿩노래는 고대 소설 ‘장끼전’과 유사하다. 노래 속에서 인간의 삶을 동물들의 생태를 빌어 우화(寓話)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꿩꿩 장서방 뭣을 먹고 사느니
아로롱이 바지에 아로롱이 저고리에
백멩지로 동전 돌고 조지멩지 곰에 차고
활짝 곧은 긴장위에 꺽꺽 줏어먹자 꺽꺽 주워먹자
삼년 묵은 폿그르에 오년 묵은 콩그르에
둥실 둥실 주워 먹더니 난 디 없는 박포수가 나타나서
혼착 귀랑 자울리곡 혼착 눈을 지스리곡
우당탕 호던 소리가 나던 데마는 오꼿 첫째 서방은 쏘아 가불더구나
둘째 서방은 얻으난 산장이는 사냥개 돌고
오란 그만 사냥개 입에 물어가더구나
셋째 서방을 얻으난 살통에 기어들언 죽더구나 아고지고 내 팔제야
내 사주야 아고 이젠 심심 산전에 올라간
나 혼자 그럭저럭 혼자 살당 말젠
호루는 소로기놈이 오란 느 혼자만 살지 말앙
오라 나영이 살아보게 난 너는 털복숭이라서 너 호고는 못 살겠다
이젠 심심 산중에 올라간 그럭저럭 줏어먹고 살 더니
다음은 가마귀놈이 오란 오라 나영이나 살아보게
난 너는 몸땡이가 검서방이라서 너하고도 못 살겠다
다음에는 매놈이 오란 촘 오라 나영이나 살아보게 호난
너는 매하고 비둘기 호곡 포수질 영 잡아먹는 놈하고도 안 살겠다 호연
다음엔 그럭저럭 호연 살더니 호를은 난데 업는 귀에 익은 꿩꿩
호는 소리가 난 아고 옛날 우리 남편이나 살아 오라신가 호연
담 위에 올라산 깩깩깩 신호를 호여 주엇더니
그 남편은 온 건 보니 옛날 우리 남편보다 얼굴도 더 잘 생기고
의복도 잘 초려 입고 그런 남편을 맞아가지고 혼 생전 잘 살았다 홉니다(꿩놀레, 꿩노래)

 

“꿩꿩 장서방 뭣을 먹고 사느니/아로롱이 바지에 아로롱이 저고리에 백명주로 동전 달고 조지명주 고름에 차고 활짝 곧은 긴장위에 꺽꺽 주어먹자 꺽꺽 주어먹자/삼년 묵은 팥 심었던 밭에 오년 묵은 콩 심었던 자리에 둥실 둥실 주어먹더니/난 데 없이 박포수가 나타나 한쪽 귀는 기울고 한쪽 눈을 ‘지스리’며 우당탕 소리 나더니 ‘오꼿(벌떡, 후딱)’ 첫 번째 서방을 총으로 쏘고 가져가 버렸다/두 번째 서방을 얻었으나 ‘산장이(사냥꾼)’가 데리고 온 사냥개가 입으로 물고 가버렸다/세 번째 서방을 얻었으나 ‘살통’에 들어가 죽고 말았다/아이고 내 팔자야 내 사주야/아고 이제는 깊고 깊은 산전(山田)에 올라가 나 혼자 그럭저럭 혼자 살려고 작정했다/하루는 솔개놈이 와서 너 혼자 살지 말고 나랑 같이 살아보자/털복숭이 너 하고는 못 살겠다/이젠 더 깊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그럭저럭 주어먹고 살고 있더니/다음은 까마귀놈이 와서 나랑 살아보게/몸뚱이가 검어 너하고도 못 살겠다/다음에는 매놈이 와서 나랑 살아보자 하니/매하고 비둘기하고 포수질하며 잡아먹는 놈하고는 안 살겠다 했다/그 후 그럭저럭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난데없이 귀에 익은 꿩꿩하는 소리가 났다/아고, 예전 우리 남편이 살아 오셨나 하며 돌담위에 올라가 깩깩 신호를 보냈다/온 걸 보니 예전 남편보다 얼굴도 더 잘 생기고 의복도 잘 차려 입었다/그 남편을 맞아 남은여생 잘 살았다.”

 

1937년 제주를 방문한 당시 보성전문학교 법학부 최용달(崔容達)교수는 제주인의 배타적 근성은 “우월감을 가진 외래자에 대한 자위적 방어적 감정으로 제주인 누구나 외인(外人)에 대해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자기(혹은 자아) 방어 기제’ 쯤으로 이해된다.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김영돈(2002),『제주도 민요연구』, 민속원.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cid=210402&mid=RC00089911&menuName=구술(음성" target="_blank">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cid=210402&mid=RC00089911&menuName=구술(음성) > 민요)(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cid=210402&mid=RC00089892&menuName=구술(음성) > 민요)
좌혜경 외(2015), 「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진관훈(2004),『근대 제주의 경제변동』, 도서출판 각.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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