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6월 29일, ‘광주농공은행(光州農工銀行) 제주도지점(濟州島支店)’이 제주성내에 설치되었다. 제주지역 금융의 시초다. 이후 1918년, 제령(制令)에 의해 분리되어 있던 농공은행을 합병(合倂)하고 그 권리와 의무를 승계(承繼)하여 같은 해 10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으로 새롭게 금융 업무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식산은행 제주지점(濟州支店)이 광주농공은행 제주도지점으로부터 기존 일체의 영업 업무를 인수받고 제주지역의 일반금융 및 농업금융 업무를 개시하였다.
제주금융조합(濟州金融組合) 감사 급 평의원 중 김시진(金時晋) 문창숙(文昌淑) 강해진(姜海晋) 삼씨(三氏)의게 오월 중 전남 광주에서 개최된 전선금융조합연합회(全鮮金融組合聯合會)에서 포상금(褒賞金) 육십원 식(式)과 포상장(褒賞狀)을 수여(授與)하얏슴으로 본월 삼일 하오 일시에 제주금융조합(濟州金融組合)에서 동 수여식(授與式)을 개최(開催)하얏다더라(동아일보, 1922.07.13).
1912년 6월 29일에는 ‘제주금융조합(濟州金融組合)’이 허가되고, 같은 해 7월 20일 등기 완료되어 제주지역에서의 금융 업무를 시작했다. ‘금융조합(金融組合)’은 1907년 5월 30일 칙령 제23호로 제정·공포되었고 지방금융조합령(地方金融組合令)에 의거, 조직된 지방금융조합 기관이다.
금융조합은 일제 강점기 수탈의 최전방을 담당했던 금융기관으로 전국 각지에 설립되어 농민들에게 단기 영농 자금을 공급했다. 제주금융조합은 설립 당시 4개의 본소(本所)(제주, 서귀포, 모슬포, 성산포)로 출발하였다가 이후 2개 본소(성산포, 모슬포)로 개편되어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의 일반금융 및 농업금융 업무를 독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지역에서 우편 업무는 1903년에 현재의 제주우체국의 전신인 제주우편취급소가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6월 6일, 제주우편취급소가 목포우체국 제주출장소로 변경되었고, 1907년 1월 1일 제주우편국으로 승격됐다. 이후 김녕, 모슬포, 성산포, 추자도, 서귀, 한림, 애월, 조천, 고산, 표선 등 10개소의 별정국이 설치되었다.
제주도 한림리(翰林里)에셔는 팔구년간으로 계속(繼續)하야 우편소(郵便所)를 운동(運動)한다함은 기보(旣報)한바 어니와 당국(當局)으로부터 설립인가(設立認可)되야 거(去)십일일부터 우편 전신 전화 일반우편소의 사무(事務)를 취급(取扱)한다더라(조선일보, 1923.12.14).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朝天里)는 제주 일류의 상업지로 통신기관(通信機關)이 불편함을 일반(一般)히 유감으로 사(思)하는 바 면장(面長) 김두식씨(金斗植氏)의 진력(盡力)으로 면리 인사(面里 人士)와 협의하야 기세비(基細費)를 분(分)케 하고 사설 우편인가(郵便認可)를 수(受)하야 래(來) 오월일일부터 개통(開通)하리라고(동아일보, 1925.04.26).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朝天里)는 칠백호가 넘는 대촌(大村)이나 간금(干今)것 통신기관(通信機關)이 업서 일반 인사는 다대(多大)한 곤난(困難)을 바다 심(甚)히 유감으로 덕여 대정 십일년도 이래 지방 인사는 그 설치(設置)를 운동(運動)하야 금번(今番) 조천우편소 설치인가(設置認可)가 나왓슴으로 거(去) 이십일일부터 통신사무를 취급 하엿다 하며 성대(盛代)한 축하식(祝賀式)도 불원(不遠)에 거행(擧行)하리라고(동아일보, 1926.06.24.).
전라남도 제주도 애월(涯月)은 기선편(汽船便) 기항지(寄航地)로 근일(近日) 현저(顯著)한 발전(發展)을 축(逐)하야 통신기관(通信機關)의 설치를 요망(要望)하엿슴으로 체신국(遞信局)에서는 동소(同所)에 우편소(郵便所)를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 완료와 공(共)히 본월 십육일부터 사무(事務)를 개시(開始)키로 결정하엿다더라(조선일보, 1927.06.05).
당시 제주우편국에서는 우편과 통신뿐 아니라 도외로 물질 나간 출가해녀들과 도일(渡日) 제주도민들의 고향으로의 송금 관련 업무도 취급했다. 출가해녀들이 우편국을 통해 고향으로 송금한 송금액 추이를 살펴보면, 1930년 3860명, 90만8000엔, 1931년 3950명, 68만7350엔, 1932년 5078명(국내 3478명, 일본 1600명), 110만엔, 1936년 3360명, 77만엔이다.
도일 제주도민들이 우편국을 통해 고향 제주에 송금한 송금액은, 1926년 77만4784엔, 1927년 95만6571엔, 1928년 128만9714엔, 1929년 124만3714엔, 1930년 79만9180엔, 1931년 71만5012엔, 1932년 68만5155엔, 1933년 85만7919엔, 1934년 105만3940엔, 1935년 100만6985엔, 1937년 108만7518엔으로 일본의 경기변동 상황이나 도항증(渡航證) 발행 정책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본도의 금융경제(金融經濟)는 대체로 해륙산물(海陸産物)의 풍흉이나 가격의 등락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만이 아닌 노동자의 내지(內地)로부터의 송금(送金)이나 소위 제주명물(濟州名物)인 해녀의 도외 출가(出稼)등도 일년에 30만 엔 내외에 달할 것이므로 섬의 금융경제를 논하는 데는 역시 이것들을 경시(輕視)할 수가 없다(미개(未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 1925).
이러한 출가해녀와 도일 제주도민들의 송금액 증가로 인해 제주지역에서는 현금 보유량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소비 수준이 변화하고 소비 규모도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제주지역 토착자본 형성의 근간이 되었으며 당시 제주지역 경제변동의 핵심요인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제주우편국에서는 출가해녀들과 도일 제주도민들의 송금 관련 업무뿐 아니라 도내 도민들이 저축의식을 고취하고 저축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병행했다.
제주우편국(濟州郵便局)에셔는 예년(例年)과 여(如)히 일반의게 저축사상(貯蓄思想)을 선전(宣戰)코저 국원(局員) 일동을 선전(宣傳)에 대한 준비(準備)에 노력 중인터 선전 일시(宣戰 日時)는 래(來) 이십육칠팔 삼일간 인바 당지(當地)는 타처(他處)에 비하면 저축 금액과 인원이 소수임으로 국원중 오규삼(吳奎三) 오기두(吳琪斗) 김병화(金秉化) 삼씨(三氏)는 차기회(此期會)를 응용(應用)하야 우리 형제의게 저축을 장려코자 매호(每戶)에 방문(訪問) 선전할 예정이라더라(조선일보, 1923.11.25).
한편 성산에서는 지역 자체로 ‘공익저축조합(共益貯蓄組合)’을 조직하여 저축심을 장려하는 자발적 저축조합운동이 생겨났다. 주로 여자들을 대상으로 곡식이나 농작물이나 곡식들을 매일 한 묶음, 한 홉씩 저축하고 이를 모아 월말에 공동 판매하여 현금화하려 했던 것이다.
제주도 성산리(城山里) 현재성(玄才性) 장태혁(張泰奕) 양씨(兩氏)가 여자의 저축심(貯蓄心)을 양성하기 위하야 거(去) 십이월 십오일 오후 육시부터 한재준(韓才準)씨 댁에서 공익저축조합창립회(共益貯蓄組合創立會)를 개최하얏는데 정각 전부터 십오육세 이상 소년 여자 사십명이 집합하야 장태혁군(張泰奕君)의 취지 설명이 잇슨 후 고봉이양(高鳳伊讓)이 조합 정관(定款)을 낭독 통과하얏스며 조합장(組合長) 고봉이(高鳳伊) 부조합장(副組合長) 한정연(韓丁涓) 이사(理事) 정산옥(鄭山玉) 강기선(康己善) 서기(書記) 고봉련(高鳳蓮) 홍정순(洪丁順) 제양(諸讓)이 당선되고 오후 십시에 폐회(閉會)되얏는대 조합원(組合員)은 매일 속 일합식(束 一合式) 저축하얏다가 월말에 방매(放賣)하야 대부식리(貸付殖利)하기로 하얏다더라(동아일보, 1922.01.04).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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