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3일 558조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을 의결했다. 국회선진화법이 시행된 2014년 이후 6년 만에 몸싸움 없이 법정시한을 지켰다. 예산안이 본회의를 통과하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제1 야당인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포옹했다. 예산안 처리를 볼모 삼아 대치하며 파행하던 것과는 다른 장면이었다.
외형적으론 실로 오랜만의 여야 협치協治로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선거를 의식한 나머지 정부 예산안을 꼼꼼히 따져 삭감하기는커녕 오히려 증액했다. 졸속 부실 심의, 밀실 야합 심사, 지역구 민원성 사업 예산 끼워넣기 등 구태 또한 여전했다.
헌법 제57조는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국회는 정부 예산안보다 2조2000억원을 증액했다. 예산이 국회에서 늘어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11년 만이다.
내년 예산은 올해보다 8.9%(45조7000억원) 많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증가율(5.8%)을 크게 웃도는 사상 최대 초슈퍼 예산이다. 코로나19 사태 대응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내년 4월 서울ㆍ부산시장 재ㆍ보궐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이 적잖게 작용한 결과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구태는 재연됐다. 여야는 회의록조차 남기지 않는 ‘3인 협의체’의 밀실 심사를 통해 예산을 늘렸다. 21조원 규모 ‘한국판 뉴딜’에 부실 사업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됨에도 6000억원 삭감에 그쳤다.
대신 구체적 내용조차 밝히지 않은 민생ㆍ지역 현안 대응 예산이 1조4000억원에 이른다. 정부 예산안에는 없었는데 여야 실세 의원들이 끼워 넣은 지역구 사회간접자본(SOC) 민원이 5000억원이 넘는다. 여야 원내대표나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예결위 여야 간사 등의 지역구 관련 토목사업이 다수를 차지한다.
정부 예산안에 없던 3차 재난지원금 3조원과 전 국민 코로나19 백신접종 비용 9000억원을 추가한 것은 내년에도 이어질 코로나 사태에 대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들 긴급지원금 성격 예산을 포함하는 대신 효율성이 떨어지는 불요불급한 예산을 가려냄으로써 적어도 예산총액을 늘리진 않았어야 했다.
이미 정부 예산안 자체가 올해보다 8.5% 많은 데다 무려 90조원의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적자예산인데도 예산총액을 늘렸다. 야당인 국민의힘도 정부 여당의 선심성 예산을 가려내기는커녕 예산 나눠먹기에 숟가락을 얹었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부산 가덕도신공항 관련 예산을 반대하지 않았고, 3차 재난지원금을 먼저 주장하고 나섰다. 선거를 겨냥해 대규모 토목사업 집행을 앞당기려는 민주당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ㆍ완화 법안에도 동조했다.
정부와 여당은 그동안 소득주도 성장과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제로(0)화, 부동산 대책 등 정책 실패를 땜질하기 위해 확장재정 정책을 펴왔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추가경정예산을 네차례나 편성했다. 국내 경제ㆍ사회 상황 및 대외여건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맞춤정책보다 재정 살포에 의존하는 재정중독이 심했다.
문재인 정부의 2017년 집권 당시 400조원이었던 국가예산이 3년 만인 올해 500조원을 넘어섰다. 내년에는 정권 출범 때보다 40% 가까이 불어난 558조원 예산을 쓰기로 했다. 경기가 침체돼 세금이 덜 걷히는 판이라 결국 약 100조원 규모의 적자국채를 찍어야 한다.
정부는 재정중독증, 국회는 포퓰리즘에 빠져 있는 사이 국가채무가 급속도로 불어났다. 국회예산정책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시시각각 움직이는 국가채무 시계가 보인다. 4일 오후 6시 현재 총 국가채무는 803조7442억원, 1초에 193만원씩 불어난다. 국민 1인당 1550만꼴이다. 치솟은 집값과 전셋값 등으로 이미 적잖은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국민의 숨을 막히게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660조원였던 국가채무가 올해 말 847조원에 다다른다. 내년에 956조원, 현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에는 1000조원도 훌쩍 넘어선다.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져온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40%는 이미 올해 무너졌다. 내년에는 국가채무 비율 50%를 향해 달려간다.
급증하는 나랏빚은 고스란히 미래세대 부담으로 전가된다. 내 돈, 자기 집, 자기 회사 돈이라면 이렇게 쓰며 빚을 늘리겠나. 여야 정치권의 무책임한 나랏돈 씀씀이를 막으려면 국민과 시민단체들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