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인연이 깊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無垢淨光大陀羅尼經·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모사본 서첩 실물이 1934년 사진으로 공개된 이후 90년 만에 제주에서 공개된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오는 4일부터 8월 18일까지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을 연다고 3일 밝혔다.
이건희 회장 유족은 2021년 4월 28일 2만1693점의 문화유산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후 네 번째 순회전인 이번 특별전에서 눈길을 끈 전시품은 추사 김정희의 낙관이 찍힌 62면짜리 서첩이다.
이 서첩은 신라 문성왕인 김경응이 855년 경주 창림사에 세운 3층 석탑인 무구정탑 안에서 1824년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금동판에 새겨진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를 기름종이로 실제와 똑같이 모사한 것이다.
하나의 서첩으로 엮인 이 두 가지 모사본에는 각각 '김정희인'(金正喜印)이라는 인장(낙관)이 찍혀 있다.
서첩에는 젊은 시절의 김정희가 해서체로 쓴 글도 있다. 무구정탑이 무너질 당시의 정황과 탑 안에서 출토된 다라니경 1권, 탑을 세운 내력을 기록한 동판 1매, 구슬, 거울 조각, 동제 받침 등 공양구 구성품을 기록한 글이다.
금석학으로 한국과 중국의 서예 교류를 고증한 김정희는 창림사 무구정탑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가 구양순체 이전의 고아한 서법을 보여주는 실물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건희 기증 이 모사첩은 김정희가 보기 드문 통일신라 사경과 탑원기 진본을 고증한 사례로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서첩의 존재는 1934년 일본인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청구학총 15호'에 발표한 논문 '신라창림사 무구정탑원기에 관하여'에서 처음 소개됐다. 현재까지 사진 자료만 전해졌다.
이재호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사는 "학자들이 1934년 발표된 사진 자료만 가지고 연구를 해왔는데 국립박물관이 조사를 통해 이건희 회장 기증품 중에서 실물을 확인하고 이번에 처음 전시하게 됐다"며 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모사본 서첩에 찍힌 인장을 근거로 최소한 김정희가 이 서책을 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며 "학계에서는 김정희가 직접 모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는 8월 18일까지 열리는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에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한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와 보물 16건 26점을 포함해 이건희 회장 기증품 총 187건 360점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제주 관련 작품을 추가해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을 재구성한 것이다. 특히 기증 3년째를 맞아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22건 72점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앞서 2022년 11월 박물관 야외에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제주 동자석과 문인석 55점을 설치한 '동자석 정원'을 꾸렸다. 이는 이건희 회장 기증품을 국립박물관 상설 전시에 처음 활용한 사례다.
이번에는 '제주궤'(濟州櫃)를 처음 전시한다. 제주 특산의 붉가시나무로 짠 반닫이로, 무쇠 장석의 힘 있는 형태와 판재의 나뭇결이 잘 어우러진 목가구다.
또한 1404년(태종 4) 제주에서 간행한 현존 최고의 도서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제주 무관 고근손(高根孫)이 큰 글씨로 펴낸 불교 교육서인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문집 '병와집'(甁窩集), 유배인 정온(鄭蘊, 1569∼1733)의 '동계집'(桐溪集),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윤양집(雲養集)을 통해 제주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전시는 제1부 '수집가의 환대', 제2부 '수집가의 몰입', 제3부 '수집가의 성심'으로 구성됐다.
국립제주박물관은 빛에 쉽게 손상되는 서화를 보호하고 더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현재 걸려 있는 작품들을 다음달 14일까지 전시하고 나서 같은 달 16일부터 다른 작품들로 교체한다.
국보 '인왕제색도'는 6월 한 달간만 전시하고, 보물 '추성부도'(秋聲賦圖)는 다음달 16일부터 8월 11일까지만 선보인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청각장애인도 범종의 울림을 시각으로 대신 체험할 수 있게 영상을 설치하고, 4종의 촉각 전시물로 대표 전시 작품의 형태와 질감을 손으로 느껴볼 수 있게 했다.
전시품에 담긴 자세한 설명은 QR코드로 확인할 수 있다. 전자기기 사용이 어려운 분들이나 저시력자를 위해 대표 전시품을 소개하는 큰 글씨 책자도 전시실 입구에 비치됐다. [제이누리=양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