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ATM(현금인출기)’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 ‘떨어질 때는 폭삭, 오를 때는 찔끔’. 허약 체질의 한국 증시를 빗댄 표현이다. 미국발 경기침체 우려에 사상 최대 하락폭을 기록한 5일 ‘검은 월요일(블랙 먼데이)’ 증시가 이를 거듭 입증했다.
블랙 먼데이 전후 사흘간의 주가를 보면 일본은 폭락분의 약 70%를 회복했다. 하지만 한국은 역대 하락분을 만회하기에 힘이 부쳤다. 그나마 코스피를 반등시킨 주역은 개인투자자들이었다. 외국인과 기관의 매도 물량을 사들였지만 역부족이었다.
7월 초까지 국내 증시는 외국인이 주도했다. 상반기 외국인의 주식 순매수 규모는 22조9000억원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였다. 시가총액 대비 외국인 보유 비중은 7월 10일 36.1%로 연중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지난 5일 외국인이 1조4495억원을 순매도하자 코스피는 8.87% 폭락했다.
외국인 비중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외국인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가 증시가 흔들리는 ‘윔블던 효과’가 현실화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신흥국에서 먼저 돈을 빼내가는 속성이 있다. 그러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선진국부터 투자한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이라지만, 금융시장은 여태 신흥시장(이머징 마켓)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출(대외) 의존도가 높아 세계경제 상황에 쉬이 영향을 받는다. 외국인 투자 동향에 따라 흔들릴 가능성이 높은 구조다.
정부는 올 초부터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밸류업(기업가치 개선)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하지만 정작 시장을 짓누른 경기침체 공포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주주환원, 자사주 매각 등을 통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최근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합병은 소액주주 이익을 침해하고 ‘오너만 밸류업’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재벌총수 일가의 장악력을 해소하는 등 실질적인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한국 증시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외풍(外風)에 취약한 한국 증시의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려면 선진국지수 가입을 서둘러야 한다. 글로벌 15조 달러 투자 자금이 벤치마크로 삼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지수에서 일본은 최상위인 선진 시장(DM)에, 한국은 둘째 등급인 신흥 시장(EM)에 속해 있다.
한국은 2008년부터 여러 차례 MSCI 선진지수 편입을 시도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외환시장 24시간 운영이나 공매도 전면 재개처럼 MSCI가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숙제를 풀지 못해서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1월 시행한 공매도 전면금지 조치 시한을 올해 6월 말에서 내년 3월 말로 연장했다. 외국인 투자자로선 공매도가 금지된 한국 시장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당장 외국인자금 이탈을 보충할 뾰족한 수단이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서 기관투자가가 시장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하지만 수탁자 자산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수익을 내야 하는 기관들이 선뜻 나서기 어렵다.
결국 관건은 외국인이 기꺼이 들어와 오래 머물 만한 증시의 매력과 신뢰도다. 상장지수펀드(ETF) 등 장기 투자금이 많이 들어오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한국 국채를 세계국채지수(WGBI)에, 증시를 MSCI 선진국 지수에 편입시켜야 한다.
MSCI 선진국 지수에 편입되면 연기금이 선진국 지수에 투자하는 비율 등이 정해져 외국인들이 지금보다 한국에 더 투자할 것이다. 투자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돌발 상황이 생겨도 상대적으로 자금이 덜 빠져나간다.
한국이 신흥시장에 남아있는 한 ‘글로벌 ATM’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 상황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밸류업의 주요 목표에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포함시키고 적극 움직여야 한다.
국내외 증시가 요동친 것은 미국의 실업률 상승, 시장 기대치를 밑돈 빅테크 실적 등 경기침체 우려와 중동지역 정세 불안이 영향을 미쳐 주식투매를 촉발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한국은행 등 금융당국은 대내외 변수를 면밀히 점검하며 복합위기 대응책을 마련할 때다.
여당 국민의힘 대표가 주가 폭락 시점에 맞춰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다. 주식ㆍ채권ㆍ펀드ㆍ파생상품 등 금융투자로 연간 5000만원 이상 소득을 올린 투자자에게 부과하는 금투세는 2020년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것으로 2023년부터 시행하려다 2025년으로 2년 유예됐다.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 존폐 여부와 과세 기준 변경 등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개원한 지 두달여 동안 극한 대치로 공전한 22대 국회가 따가운 여론을 의식한 듯 ‘여야정 민생협의체’를 구성해 현안 법안들을 처리할 움직임이다. 여야 정당들은 구호로만 민생을 살피겠다고 외쳐선 안 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실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