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혹한의 기후가 유럽을 지배한 후 10세기에 들어오면서 온난기가 찾아왔다. 온난한 기후는 사람들의 생활을 여유 있게 만들었다. 풍요한 시대가 닥치면서 사람들은 신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높이 치솟은 고딕 성당을 짓고, 성지순례를 통해 신께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 당시 중동지역을 통일한 셀주크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성지순례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슬람에서는 명장 살라딘이 나타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는 갈릴리 호수 근처의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주둔 십자군을 전멸시켰다. 하틴 전투는 1187년 7월 4일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과 이슬람의 살라딘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현재의 이스라엘 갈릴리의 티베리아스 근처로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2개의 산 중간 지역으로 이 전투에서 살라딘은 날씨를 이용해 대승리를 거뒀다. 이날 새벽 이슬람군은 연기를 피워 십자군의 시야를 가렸고 보강된 병력으로 십자군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십자군은 전날의 무리한 행군에다가 물이 공급되지 못하면서 심한 갈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때를 기다려 온
기원전 356년,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Philippos)왕과 올림피아스(Olympias)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로스는 매우 용감하고 강한 전사였고 명예욕도 강했던 젊은이였다. 세계 정복의 야심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정벌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정복전쟁에서 승리한 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한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에 도달한다. 이때 파우라바(오늘날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 지방)의 왕 포루스는 기병 4000명에 보병 3만명, 코끼리 100마리로 편성한 부대를 이끌고 강 건너편에서 알렉산드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다스페스 강의 폭은 800m나 됐으며 폭우로 인해 강이 범람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일단 강물이 줄어들 때까지 공격하지 않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한편,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함성을 질러 곧 공격할 것처럼 양동 작전을 펼쳤다. 이에 포루스군은 경계를 늦출 수가 없어 불면의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으며 병사들의 피로는 쌓여가기만 했다. 이렇게 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경계심이 풀리면서 전투태세 또한 이완돼 갔다. &ld
아일랜드에서는 1845년부터 시작된 긴 장마로 인해 감자잎마름병이 돌았다. 감자 생산량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800만 명의 아일랜드 인구 중 약 2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약 200만 명은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일랜드의 인구를 절반으로 감소시킨 감자 대기근(大飢饉, 흉년으로 식량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상태로 필요한 물자가 크게 부족한 현상을 비유한 말)은 기후변화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영국의 서쪽에 있는 섬나라인 아일랜드는 우리나라보다도 작으며 인구는 350만명 정도다. 조그만 국토에는 늪지대와 얕은 호수가 많으며 토양이 산성이라서 나무가 잘 자라지 않아 가난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살아왔었다. 기후는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50°나 되는 고위도 지방이지만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하지만 흐리거나 비가 자주 내려 서울보다 비 오는 날이 3배 정도 많다. 영국의 식민지로 가난에 찌들려 살아가던 아일랜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감자가 전파되면서다. 1600년대 초반에 남아메리카에서 도입돼 아일랜드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상당한 규모로 재배됐다. 비가 많이 내리
국토의 4분의 3이 바닷물 높이보다 낮은 나라, 지하자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라가 ‘네덜란드’다. 국토가 넓지도 않으며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 최강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성공 뒤에는 나쁜 조건을 기회로 바꾸는 지혜가 있었다. 소빙기로 날씨가 추워지자 해수온도가 낮아지면서 청어 어장이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북대서양으로 남하했다. 다른 나라는 폭풍이 잦아지고 날씨가 나빠지자 청어잡이 어선을 줄였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대규모 선단으로 고기잡이에 나섰다.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가 잡은 고기보다 네덜란드가 잡은 청어가 훨씬 많았다. 청어는 훈제하거나 소금에 절여 전 유럽에 팔렸다. ‘네덜란드의 금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어는 네덜란드의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줬다. 이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는 미힐 드 로이테르(Michiel De Ruyter)의 해상전술에서도 잘 나타난다. 네덜란드 함대사령관이었던 로이테르는 적이 예측하기 어려운 창의적인 장군이었다. 그는 해전에서의 풍상측(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전함의 경우 바람을 등지고 싸울
이집트에 기원전 3000년경 국가가 세워졌는데 역사는 이 나라를 ‘고왕국’이라고 부른다. 고왕국은 더운 계절과 서늘한 계절이 반복되는 온화한 기후에서 급속히 발전했고 특히 미술 공예품 생산이 증가했다. 이집트는 부를 축적하며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메네스라 불리는 강력한 통치자가 통일을 이룬지 600년도 지나기 전에 제4왕조의 왕들은 풍부한 재정으로 장대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군을 만들었다. 이집트 고왕국의 화려한 영광이었다. 기원전 2000년경 날씨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온화했던 기후가 찌는 듯한 무더위로 바뀌었다. 강폭은 차츰 좁아지고 풀 대신 관목이나 모래가 들어섰다. 삼림도 모래 바람이 불어 대는 황야로 변했다. 새도 짐승도 물고기도 없어졌다. 아프리카 북부지방이 지금의 사하라 사막과 황야지대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농업생산성이 악화되자 사회체제 역시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하면서 고왕국의 이집트인은 각지로 흩어졌다. 일부는 북쪽으로 향해 지중해 연안에 도달해 현지인과 함께 베르베르 문화를 창조했다. 일부는 남쪽으로 옮겨가면서 아프리카 대륙 중앙으로 들
▲ 단노우라 전투를 그린 그림 과거 전쟁사를 보면 조류(潮流·밀물과 썰물 때문에 일어나는 바닷물의 흐름)가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끼친 사례가 많다. 기원전 480년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섬 부근의 강한 조류를 이용해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했다. 베트남의 찬 홍 다오 장군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썰물과 조류를 이용해 바익당 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717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강한 조류를 이용해 이슬람 해군을 격파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조류를 이용해 군사들이 최소한의 힘만을 사용한 한 뒤, 전투에서는 최대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한 구절이 나오기도 하며, 울돌목의 강한 조류를 이용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쾌승을 거둔다. 9세기경 일본은 전형적인 봉건제도가 발전해가는 시대였다. 중앙정부의 힘이 약하다보니 지방 세력이 강해지면서 영토 쟁탈전이 계속됐다. 힘이 있는 토호(土豪)들은 힘으로 개인 영토를 늘려나갔고 절이나 무사, 농민들은 토호에 대해 충성하고 보호를 받는 체계가 뿌리 내렸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군대간의 적대적 관계는 한층 심화됐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고대부터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핵심루트 중 하나였다. 바닷길이 열린 후에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은 주변국들로부터 계속 침공을 받는 불행한 역사를 가지게 된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온 때는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 제국 시대부터였는데 페르시아를 상세히 고찰한 로마인들에 의해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최초의 이민족은 페르시아인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인 키루스 대왕은 두 차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했다. 1차 침입에서 그의 군대는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던 게드로시아 사막에서 날씨로 인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후퇴한다. 하지만 그 이후 칸다하르를 관통해 진군한 다음 북쪽으로 카불강 계곡까지 진출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 다음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오늘날의 헤라트 부근인 아리아(Aria)로 진입하자 페르시아인인 사티바르자네스 총독이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
1941년 독일군은 10주 이내에 모스크바를 점령한다는 계획 하에 전면 공격을 단행한다. 초기 국경지역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 100만명을 사살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좋기만 했던 날씨가 갑자기 변하면서 며칠 동안 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뚝 떨어졌다. 전쟁이 벌어진 1941년 겨울은 예년보다 빨리 찾아와 유달리 추웠다. 게다가 석 달 이내에 전쟁을 마무리하려 했던 독일군은 겨울을 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비로 인해 진창길이 돼버리자 히틀러의 명령에 독일군은 젖 멎던 힘까지 다 내어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한다. 그러나 독일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를 25km 눈앞에 두고 탈진하고 만다. ‘소련은 동장군과 진흙장군이라는 영원한 동맹군이 있다.’ 침공군에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소련의 날씨와 지형이었다. 먼저 독특한 소련의 기상과 지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볼가(Volag)강을 비롯한 4개의 큰 강이 모스크바의 천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대부분 지형이 구릉과 황야지대, 늪지와 소택지 그리고 대삼림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기계화 기동을 중시하는 독일군에게 상당히 불리할 수밖에
영국에서는 일기예보에서 눈이나 결빙 주의보가 내리면 병원 응급실이 1년 중 가장 바빠진다. 결빙된 도로에서 발생하는 교통사고 때문이 아니다. 기온이 10℃ 떨어지면 영국에서는 다른 의학적 질병 증가와 함께 심장마비 발생 비율이 13% 증가하기 때문. 추위의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사람들은 고혈압 환자와 뇌일혈과 심장마비 가능성이 있는 50대 이후의 장년층이다. 추위가 몰려올 때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 한편 생체기상학에서는 천식의 발생 정도와 추위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스위스의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통상 겨울에 천식이 가장 심해지는 이유는 갑자기 낮아진 기온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기압골이 통과한 후 온도가 뚝 떨어지면서 추워질 때, 천식환자는 각별한 주위가 필요하다. 혈압은 날씨에 따라 그 수치가 변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혈압이 올라가고 따뜻해지면 혈압이 내려간다. 또 기온이 떨어지면 혈관이 수축되고 혈압이 높아지기 때문에 혈관이 터지면서 뇌졸중이 일어나는 것이다. 과거 시골에서는 새벽에 옥외 화장실에 가다 쓰러져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았다. 따뜻한 온돌 방안에 있다가 바깥의 추운 곳으로 바로 나가게 되면 확
현대에서 고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들의 날씨에 대한 민감도는 높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날씨가 농업과 어업, 사냥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고, 주거와 의복의 형태를 전적으로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조상들은 현재의 우리보다 날씨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과학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날씨에 대한 육감이 발달했다. 물론 이것이 우리 선조들이 오늘날의 우리보다 기상학적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날마다 자기 자신의 몸과 주변의 징후들을 통해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 사실이고, 이를 토대로 날씨변화와 관련된 기초 지식을 축적해나갔다. 기상학자들의 예측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대인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옛 속담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몸이나 주변의 징후와 날씨의 상관관계를 그들의 축적된 경험을 통해 일반화하여 속담이라는 형식으로 전승했다. 따라서 날씨 관련 속담 속에는 축적된 경험의 과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날씨 관련 속담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봄추위가 장독 깬다. - 봄에도 혹한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봄비는 쌀 비. - 봄
왕건의 군사였던 태평(泰評)이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기도의 덕분이었을까. 강하게 불던 북서풍이 잦아들면서 풍향이 남동풍으로 바뀐다. 밀리던 왕건군은 이 순간에 화공을 이용해 견훤의 수군을 공격하고 대승을 거둔다. 지난 2001년 역사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방영된 장면 중 하나다. 이 장면을 보고 세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사용한 남동풍을 모방한 것인가. 둘째, 과연 겨울철 서해바다에서 남동풍이 부는가. 셋째, 북쪽에 있던 왕건이 어떻게 남쪽에서 공격해 갈 수 있었는가 등이다. 가장 먼저 첫 번째 물음에 대해 “태조 왕건이 풍세를 타서 화공하니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군사가 태반이고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며 이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바람을 이용한 화공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실제로 겨울철 서해상에서 주로 부는 바람은 북서풍이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1년에 한번정도 남동풍이 분다. 중국 화남지방에서 기압골이 북동진하면서 서해상에서 발달한 경우다. 1년에 많아야 1~2회 정도 발생하는데 지난 2001년 1월
날씨를 만드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바람이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으로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기에 그 존재가 무시되기 쉽다. 하지만 날씨 변화는 공기의 흐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옛날에 중국이나 이집트 사람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알기 위해 바람개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세종대왕 때 ‘풍기죽’이라 불린 풍향계를 ‘풍기대’에 꽃아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관측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람이 불 때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이용한 온도 지수가 바로 체감온도다. 캐나다 환경국에 따르면 겨울철에 야외 훈련이나 운동을 할 때 체감온도에 따라 인체가 받는 영향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체감온도가 영하 9℃에서 16℃까지는 노출된 피부가 냉각되며, 영하 17℃에서 영하 23℃까지는 동상이 증대된다. 영하 24℃에서 32℃사이에서는 단 시간 내에 노출 피부가 동상에 걸린다. 영하 32℃미만인 경우에는 극히 위험하므로 야외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기온이 낮지 않더라도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더욱 두툼한 옷을 챙기는 것이 삶의 지혜다. 겨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