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56년,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Philippos)왕과 올림피아스(Olympias)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로스는 매우 용감하고 강한 전사였고 명예욕도 강했던 젊은이였다.
세계 정복의 야심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정벌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정복전쟁에서 승리한 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한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에 도달한다.
이때 파우라바(오늘날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 지방)의 왕 포루스는 기병 4000명에 보병 3만명, 코끼리 100마리로 편성한 부대를 이끌고 강 건너편에서 알렉산드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다스페스 강의 폭은 800m나 됐으며 폭우로 인해 강이 범람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일단 강물이 줄어들 때까지 공격하지 않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한편,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함성을 질러 곧 공격할 것처럼 양동 작전을 펼쳤다. 이에 포루스군은 경계를 늦출 수가 없어 불면의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으며 병사들의 피로는 쌓여가기만 했다. 이렇게 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경계심이 풀리면서 전투태세 또한 이완돼 갔다.
“이때다, 가자” 폭우가 휘몰아 치는 험악한 날, 알렉산드로스는 출격을 단행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 5000명과 보병 6000명을 이끌고 강의 상류 25㎞ 지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포루스군은 악시정과 천둥소리로 알렉산드로스군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곳은 강 중앙에 섬이 있어 홍수 때 강을 넘기가 가장 쉬운 곳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강을 건너자마자 정예기병부대를 인도군의 배후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포루스 진영의 전면을 향해 진격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포루스군은 주력군을 우측으로 이동했지만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이날 알렉산드로스군은 1000명의 손실로 인도군 2만 30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에서 기습의 원칙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했다. 즉 공격이 가장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폭우가 내릴 때(시간), 대규모 원거리 우회 이동 및 도하(장소), 주력을 적의 배후로 이동시켜 공격한 것(방법) 등이다. 특히 인도의 몬순기에 내리는 폭우를 이용한 그의 리더십은 놀라울 뿐이다.
여기서 몬순이란 아시아 지역에 독특하게 발생하는 기상현상으로 우리나라 장마와 비슷하다. 해양과 대륙의 비열 차이로 생기는데 인도 지역의 경우 6월부터 우기가 시작돼 9월까지 많은 비가 내린다. 그는 인도를 정복한 후 포루스 왕을 그대로 인도의 왕으로 세워 안정적인 통치를 꾀한다.
인도 지역은 독특한 기상현상을 보인다. 기상학자들에게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지역을 물으면 많은 사람이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라고 말한다. 인도 대륙은 6월부터 9월까지 엄청난 비가 내리고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건조한 날씨를 보인다. 이것은 일 년 중 아주 습하고 건조한 두 계절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알렉산더 프레이터는 ‘계절풍을 쫓아서’에서 “매년 아시아를 껴안고 벵골 만 위로 흘러 방글라데시를 지나 서쪽으로 도는 힘과 남서쪽에서 아라비아 해로 불어오는 바람의 힘, 이 두 힘이 인도를 삼켜버린다”고 말한다.
여름철은 습하고 많은 비가 내리게 되고, 반대로 육지가 차가워지면서 대륙 쪽에서 부는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계절풍이 부는 지역은 습하고 건조한 두 계절이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인도의 체라푼지(cherrapunji) 지역의 경우 연강수량이 1만 3000㎜나 된다. 우리나라 일 년 강수량의 10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알렉산드로스가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는 동방원정길에 나선 지 이미 8년이 흘렀고 원정거리는 2만 7200㎞에 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더 이상의 원정을 원하지 않았다. 사흘 동안 계속된 알렉산드로스의 부탁과 회유와 협박에도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부하들은 지칠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 더 중요한 원인이 바로 ‘몬순’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몬순기 폭우를 이용해 히다스페스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두 달간 쉬지도 않고 쏟아지는 엄청난 비와 홍수를 경험한 부하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는 것.
그리스의 온화한 지중해 기후에 살았던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에게 인도의 몬순기에 내리는 비는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홍수와 장마로 인해 생기는 전염병도 무서웠지만 심리적인 압박 또한 컸을 것이다.
최근 인도의 오래된 묘지를 조사한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생물기상학자들은 몬순 때문에 매우 습하고 많은 비가 내리는 날씨로 생긴 심리적인 압박감이 자살을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하들에게 인더스 강을 따라 인도양까지 내려간 후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인더스 강 하구에 있던 그리스의 지원 선박 편으로 일부 병력을 돌려보낸 뒤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에서 마크란(이란 남동부와 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 지방의 해안지역)에 이르는 480㎞의 사막을 통과해 귀환했다.
이 행군을 위해 인도양의 해안을 따라오던 그리스 함대가 보급품을 조달했다. 그러나 이 해에 심한 몬순이 불어 닥쳐 알렉산드로스의 함대는 인더스 강 하구에 발이 묶여 버렸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로스는 사막 횡단을 강행했다.
이 당시 기록에 따르면 허리까지 파묻히는 모래로 인한 체력 저하 및 피로, 일사병으로 많은 병력이 행군 중에 쓰러졌다. 무려 전체 병력의 75%에 달했다. 정복전쟁에서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몬순과 사막기후로 잃은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이자 전사, 지휘관이었다. 훗날 나폴레옹, 워싱턴, 패튼도 모두 알렉산드로스에게 큰 존경을 표하고 그의 전략기술을 이용했다.
그런 그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계절풍이 몰고 온 몬순이었다. 만일 이때 몬순이 없었다면, 또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원정했던 시기가 겨울이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혹시 이때 계속 동쪽으로 진군했다면 한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온케이웨더>
☞반기성은?
=충북 충주출생. 연세대 천문기상학과를 나와 공군 기상장교로 입대, 30년간 기상예보장교 생활을 했다. 군기상부대인 공군73기상전대장을 역임하고 공군 예비역대령으로 전역했다. ‘야전 기상의 전설’로 불릴 정도로 기상예보에 탁월한 독보적 존재였다. 한국기상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군에서 전역 후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위원을 맡아 연세대 대기과학과에서 항공기상학, 대기분석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기상종합솔루션회사인 케이웨더에서 예보센터장, 기상사업본부장, 기후산업연구소장 등도 맡아 일하고 있다. 국방부 기후연구위원, 기상청 정책자문위원과 삼성경제연구소, 조선일보, 국방일보, 스포츠서울 및 제이누리의 날씨 전문위원이다. 기상예보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날씨를 바꾼 어메이징 세계사>외 1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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