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나 가곡이 조화를 이루는가, 미묘한가를 판별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 서법이나 조각이 아름답고 뛰어난가를 감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으며 ; 말하는 것 그대로 문장이 되거나 달변인 사람이 있기도 하고 ; 소설이나 시를 마음속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 사격이나 운전, 서법, 술수 모두에 정통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보잘 것 없는 재주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한 사회의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끄는 능력이 있으니 위에서 말한 분야에 공력을 기울이면 출류발췌하리라. 눈빛은 이루(離婁)와 같이 예리하고 청력은 사광(師曠)과 같이 예민하며 화살을 쏘면 후예(后羿)처럼 정확하고 서법은 왕희지(王羲之)(★)처럼 뛰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한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밖에. 큰일을 도모하고 성사시키는 데에는 크게 쓰일 데가 없지 않은가. 공자도 일찍이 생계에 짓눌려 여러 가지 일을 했어야했다. 그렇기에 다재다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도 얘기했잖은가, 그런 경력 때문에 너무나 많은 힘을 낭비해 정치적 발전에는 장애가 됐다고. [후예사일조상(后
지모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타인이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일 때 큰 것에서 착안한다. 다른 사람이 가까운 것을 보려할 때 먼 곳을 본다. 타인이 바빠서 일을 망칠 때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을 바로잡는다. 다른 사람이 속수무책일 때 힘들이지 않고 여유 있게 일을 처리한다. 식은 죽 먹기처럼 솜씨 있게 일을 처리한다. 어떤 낌새도 없이 작은 부분까지 사고한다. 행동은 타인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고려한다. 그렇게 어떤 어려움도 여반장으로 처리한다. 아무리 많은 문제도 일소에 부친다. 중국역사에서 작은 일에 몰두해 큰일을 그르친 인물이 수두룩하다. 가장 일찍 보이는 인물이 춘추시기 노(魯)나라 장공(莊公)(★)이다. 그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췄다. “연주가 틀리면 주랑이 돌아본다”는 경지를 넘어섰지만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엉망진창이었다. 백성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폐구(蔽笱)』를 써서 그를 풍자하였다. 남북조(南北朝, 420~589)시대에 양(梁) 원제(元帝) 소역(蕭繹)(★★)은 어릴 적에는 총명하며 준수하고 쾌활하였다. 하늘이 낳은 인재랄까. 다섯 살 때 『곡례(曲禮)』를
“임기응변(臨機應變)” 지혜는 민첩(敏捷)함도 포함한다. 옛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임기응변하는 지혜를 ‘첩지(捷智)’라 하였다. 춘추시기에 제(齊) 양공(襄公)에게는 아들 두 명이 있었다. 규(糾)와 소백(小白)이다. 관중(管仲)은 규를 따랐고 친구 포숙아(鮑叔牙)는 소백을 따랐다. 공자 규는 노(魯)나라로 몸을 피했다. 공자 소백은 거나라(莒國, 지금의 산동성 쥐(莒)현에 있었던 주대(周代)의 나라 이름)로 도피하였다. 오래지 않아 제나라에 반란이 일어나 제 양공은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제나라는 일시에 국군(國君)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공자 두 명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나라로 진군하였다. 귀국 후 왕위를 계승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공자 소백은 포숙아 등을 거느리고, 공자 규는 관중 등을 거느리고 귀국하다가 제나라 변경지역의 좁은 지역에서 만났다. 양보할 여지가 없었다. ▲ 관중 [사진=한국인문고전연구소 중국인물사전] 관중은 말은 탄 채로 소백에게 문후하는 척하다가 활을 뽑아들고 소백을 쏘았다. 적중은 했지만 소백은 죽지 않았
“한 걸음 물러나 있다가 나중에 행동을 취하여 상대를 제압한다.”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해 조용히 준비하면서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상대를 차분히 제압한다.” 상(商, 약BC1600~약BC104)나라 주왕(紂王, 약BC1105~BC1046?)은 역사적으로 잔혹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하다. 황음무도한 용군(庸君)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제멋대로 종실 대신을 살해하였고 가혹한 형벌로 사람을 죽였다. 백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대신들이 여러 차례 강력하게 간언했으나 주왕은 후회해 뉘우치지도 않고 오히려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내면서 그런 대신은 국도 조가(朝歌)에서 쫓아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 ?~BC1043)이 사람을 상나라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고 국정을 살피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상황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였다. “상 왕조는 지금 간인이 정권을 잡고 있어 여러 대신이 불화반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왕은 상 왕조를 정벌할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무왕은 또 보고를 받았다. “상 왕조의 백성은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내
기회가 왔다하여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대단히 촉박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할까? 기회가 없으면 기회를 만든다. 기회가 생기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기회가 오면 곧바로 기회를 빌린다. 곳곳에서 수원(水源)을 얻는다. 일이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 낸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둔다. 사반공배(事半功倍)다! 우둔한 사람은 어떻게 할까? 정반대이다. 기회가 코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한다. 잡지 못한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좋은 기회를 헛되이 보내버린다. 오히려 무리하게 일하다가 벽에 부딪치고 만다. 진(晉) 문공(文公, BC697~BC628)은 즉위하자마자 온힘을 다하여 민중을 훈련시켰다. 이듬해에 문공은 그들을 쓰려 하자 자범(子犯)(★)이 말했다. “진나라는 여러 해 동안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백성은 여전히 무엇이 의(義)인지 모르고 여태껏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문공은 외교활동을 강화하고 주(周) 양왕(襄王)(★★)을 호송해 귀국시킨 후 복위시켰다 ; 자기 나라로 돌아온 후 적극적으로 백성을 위하여 이익을 도모해 백성은 점차 생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생계에 만족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타인을 경복시킬 수 있는 지모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람이 한 번 보면 대단히 수준이 높고 솜씨가 뛰어나야한다. 고대 변사(辯士)의 유세처럼 끊임없이 흘러넘쳐야 한다 ; 둘째, 표면적으로는 무미건조하고 평담하지만 지극히 현묘한 이치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쉽게 간파당하지 않아야한다. 제갈량(諸葛亮)이 놓은 석두진(石頭陣)(★)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안개에 가려진 산과 강이 드러내듯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야한다. ‘현산로수(顯山露水)’(★★)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 사람을 확연대오하게 만들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어야 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BC221)에 범려(范蠡, BC536~BC448)는 월(越)나라 왕을 도와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후 월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이름으로 바꾸고 제나라 대신 전성자(田成子) 문하로 들어간다. 나중에 전성자가 제나라를 떠나 연(燕)나라로 도망갈 때 범려는 부신(符信)을 지고 전성자를 따라갔다. 망성(望城)에 도착하자 범려가 말했다. “주인께서는 물 마른
말에 문채가 없으면 오래도록 전하지 못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 침묵은 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두 가지 말은 언뜻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따져보면 언(言, 말)과 행(行, 행동)의 정도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위(魏) 명제(明帝, 226~239 재위) 시기에 어떤 사람이 초군(楚郡) 태수 원안(袁安, ?~92)에게 물었다. “이미 돌아가신 내무대신 양부(楊阜, 172~244)는 충언하였고 직간했는데 태수께서는 어찌 그를 충신이라고 칭찬하지 않는가요?” 원안이 대답하였다. “양부와 같은 그런 대신은 그저 ‘직사(直士)’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충신이라고 부르지는 못하오. 왜 그가 ‘직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지 아시오? 신하가 된 자로써 군주의 행위에 불합리하거나 규율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게 있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해 군왕의 과오를 천하에 전파하면서 반대로 자신은 강직한 선비라는 명성을 얻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오. 이미 고인이 된 사공(司空) 진군(陳群, ?~237)은 학문이나 인품 모두 훌륭하오.
“냉정을 유지하고 기회가 오면 즉시 행동에 옮기자.” “상황에 따라 대처하여야한다.” 전국시기 ‘농가(農家)’학설의 대표인물 허행(許行 : BC372~BC289)은 자식기력(自食其力)을 제창하였다. 자식기력이란 현대어로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생활해 가는 것을 말하지만 허행의 뜻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 써야한다는 말이다. 만부득이 할 때에만 교역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사회분업을 부정하였다. 허행은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삼고 자리를 만들면서 삶을 유지하였다. 유가사상을 신봉하는 진상(陳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허행을 만난 후 유가사상을 버리고 새로이 ‘농가’학파를 신봉하게 되었다. 어느 날 진상이 맹자(孟子)를 만나게 되자 전력을 다하여 농가사상을 설파하였다. “나는 허행 선생님의 관점이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현명한 군주는 모두 백성과 더불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자신이 직접 밥을 지어 먹어야 합니다. 국정도 겸임해 처리하여야 합니다. 자급자족 할 수 없다면 어찌 현명한 군주라 할 수 있겠습니
특정 상황 아래 신용이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신의 매력을 뚜렷하게 나타내 보이게 하거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동한(東漢, 25~220)말년에 태사자(太史慈)(★)가 군(郡)에서 관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시비를 쉬이 가릴 수 없는 사건이 군(君)과 주(州)에서 발생하였다. 각기 나누어 시비를 가려주기를 상주하였다. 도성인 낙양(洛陽)에 먼저 도착하는 상주서가 우세를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주(州)에서 상주한 상소는 이미 보낸 상태라 군의 관리는 뒤처질까 염려돼 태사자를 선발한 후 주에서 보낸 상소를 가진 사람을 뒤쫓게 하였다. 태사자는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전문적으로 신민이 보낸 상소를 받는 공거(公車) 아문에 상소를 제출하였다. 때마침 주에서 파견한 관원이 도착해 문을 지키는 관원을 찾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소를 제출하려 하였다. 태사자가 물었다. “상소를 전하려는 모양이지요?” 주에서 온 관원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태사자가 물었다. “당신의 상소는 어디에 있소? 표제의 낙관이 잘못된 것은 아
우리가 신용을 지키라고 제창하는 목적은 교역 중에 상대방에게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려하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자기편이나 맹우에게 믿음으로 대한다. 만약에 적이라면? 적에게도 신용을 지켜야 할까? 그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 머물 때의 일이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려면 포(蒲)나라를 경유하여야했다. 때마침 포나라의 공숙씨(公叔氏)가 군사를 일으켜 위(衛)나라와 대적하려 하였다. 공숙씨가 공자가 포나라를 경유해 위나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사를 보내 공자를 도중에 막아서서는 공자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을 보내줄 것이오.” 공자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길을 막아선 병사에게 위나라에 가서 맹약을 맺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병사는 그 말을 믿고 성을 나서게 하였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공자는 곧바로 마부에게 위나라 방향으로 질주하라고 명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방금 맺은 약속을 위반하여도 되는 것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강요당하여 한 약속은 성하지맹(城下之盟)(★)이다. 신도 준수할 수 없다.” 가장 신용을 지키는 사람
반드시 기억해둬야 한다. 경솔하게 승낙해서는 안 된다. 승낙한 사람과 승낙을 받은 사람, 두 방면에서 이 문제를 분석해보자. 먼저 승낙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타인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승낙했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특정한 환경 아래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였을 것이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였을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너무 쉽게 승낙했다면 그때 상대방이 그 승낙을 실천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려해봐야 한다. 특히 승낙한 특정 정세가 사라진 후에도 상대방은 그런 희생을 감수할 지를 고려해봐야 한다. 위(魏) 소왕(昭王) 6년, 진(秦)나라는 조(趙)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승리를 거둔 후 위나라의 업성(鄴城)을 조나라에 나누어주기로 하였다. 위나라 왕은 진·조 양국의 위협해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급히 군신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였다. 상국(相國) 망묘(芒卯)가 말했다. “왕이시여, 우려하지 마옵소서. 신이 적군을 물리칠 대책이 있습니다.” 위왕이 다급히 대책을 얘기해 달라고 다그쳤다. 망묘가 말했다. “조나라와 진나라는 본래부터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번
신용은 개인의 미덕이기에 어떠한 공리(功利)도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아니다. 생활의 방법과 목적이 섞갈린 판단이다. 틀려도 한참 틀린 생각이다. 삼국시대에 유비(劉備)가 조조에게 의탁한 적이 있다. 조조(曹操)는 유비를 예주목(豫州牧)에 임명하였다. 어떤 모사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뛰어난 재능이 있고 원대한 계략이 있어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같은 장수는 만 명이 당해 내지 못할 정도로 용감무쌍합니다. 그들은 유비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유비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고 책략 또한 헤아리기 매우 힘듭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라도 적을 놓아두면 몇 세대가 지난 후손까지 화가 된다’(『左傳·僖公33年』)고 하였습니다. 지금 일찌거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다 곽가(郭嘉)(★)에게 의견을 물었다. 곽가가 말했다. “그 관점도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시작됐는지 말하려 합니다. 승상께서 지금 군대를 일으킨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을 위하여 잔악한 나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