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나 정계, 사업에 발붙이려면 신용(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입신처세의 근본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76), 제(齊) 영공(靈公)(★)은 후궁의 후비들에게 남장을 시키기를 즐겼다. 남자 모자를 씌우고 남자 장화를 신겼으며 남자 장식물을 패용하도록 하였다. 그런 풍조가 시작되자마자 윗사람이 하는 대로 아랫사람이 따라하면서 전국이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조류가 형성되었다. 영공은 백성이 궁정을 따라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 각급 관리에게 엄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모든 거리, 시장, 마을에서 남자 의복을 입은 여인이 발각되면 덧저고리를 찢어버렸고 띠를 잘라버렸다. 남장하는 풍조를 여러 차례 금지했으나 근절되지 않았다. 영공은 화가 치밀어 안자(晏子)(★★)에게 물었다. “과인이 명령을 내렸는데도 백성은 어찌해 거역하는가? 금지하든 말든 근절되지 않고 있으니 말이요.” 안자가 말했다. “왕이시여. 궁정에서는 장려하고 궁 밖에서는 금지하는 것은 문 앞에 소머리를 매달아놓고 말고기를 파는 것과 똑같습니다. 온 나라의 여인에게 남자 의복을 입지 못하게 하려면 먼저 궁정의 여인에게 남자 옷을 입히지 않으면 됩니다. 궁정에서
마지막으로, 어린이 황제는 누가 있었을까? 중국 봉건전제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황위에 오른 개국 황제들은 정권과 천하 강산을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여겼다. 그 사유재산은 절대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황제는 절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위를 영원히 점유하려 하였다. 그렇기에 황제들은 모두 장생불로를 도모한다. 그러나 태어난 자가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으랴. 태어난 자는 모두가 죽는 것이니.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황위를 가장 가깝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바로 아들이다. 친자야 말로 그나마 가장 믿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황위 세습제도다. 설사 황자가 아직 어린 나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심지어는 아직 강보에 쌓여있다고 할지라도 황위를 계승하였다. 그렇게 중국역사에는 많은 어린이 황제가 존재한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역사상 어린이 황제가 29명이나 된다고 한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어린이 황제는 서한(西漢)의 소제(昭帝)로 기원전 86년에 황위를 계승하였다. 최후의 어린이 황제는 청대 선통(宣統)으로 1909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중 나이가 가장 어린 어린이 황제는 동한(東漢) 상제(殤帝) 유륭(劉
이외에 ‘장기’ 황제라 부를 수 있는 황제는 누구일까? “심심할 때 장기를 내오시게. 사(士)와 상(象)이 되는 법을 배워 효과 있게 집안일을 처리하게. 졸(卒)은 앞으로 나가니 되돌아온다는 말 하지 마소. 반드시 곧바로 가는 차(車)를 배우고 마(馬)처럼 경사지게 가지 마소. 만약 다른 사람이 내 은정을 막아서면 나는 포(包)처럼 곧바로 때리리다.”(『계지아桂枝儿·영부팔권咏部八卷』)당唐 숙종(肅宗) 이형(李亨)은 장기에 열중을 넘어 몰두하였다. 그러면서도 사(士)나 상(象)을 배우지도 않았고 졸이나 차를 닮지도 아니하고 그저 비뚜로 가는 마만 배웠다. 전대의 폐해가 쌓여 천보지란(天寶之亂, 안사〔安史〕의 난)이 발생한다. 숙종과 총비 장량제(張良娣)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북방향으로 피난하였다. 도망치는 와중에서도 숙종은 장기를 잊지 못했다. 산처럼 쌓인 전선의 군정 보고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저 장 씨와 장기를 두며 놀기에 바빴다. 승상 이밀(李泌)이 낭떠러지에서 말고삐를 제대로 잡지 않으면 ‘마외파(馬嵬坡)사건’(사병들이 들고 일어나 양국
동성애란 현재에는 뭐 그리 별스럽지 않은 언어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야 유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고대 중국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동성애가 존재했었다. 한(漢) 애제(哀帝) 유흔(劉欣)이 바로 그다. 동현(董賢)은 재능 있고 잘생겼으며 시원스러웠다고 한다. 어사(御史) 동공(董恭)의 아들로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천거되었다. 애재는 그와 왕래하는 사이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곧바로 동문랑(董門郎)에 봉하고 그의 부친을 패릉령(霸陵令)에 봉했으며 광록대부(光禄大夫) 직을 하사하였다. 그러고 나서 오래지 않아 동현을 또 부마도위시중에 봉했다. 『한서漢書·동현전董賢傳』에 “출궁하면 오른쪽에 함께 탑승해 모셨고 들어오면 곁에서 모셨다. 10일 사이에 거액을 하사하니 그 존귀함이 조정을 뒤흔들었다”라고 기록돼있다. 그 둘은 언제나 함께 하였다. 같은 침대에서 공침하였다. 한 번은 같이 잠을 자다 애제가 먼저 깼다. 그런데 동현이 자신의 옷깃을 깔고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애제는 자신의 ‘애인’이 잠에서 깰까봐 가위로 자신의 옷깃을 갈라내었
청대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3대 황제가 재위한 140년간 망문생의(望文生義, 본래 의미를 잘 검토하지 않고 문자를 힐끗 보고 그럴싸한 해석을 내림), 포풍착영(捕風捉影,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듦), 임의라직(任意羅織, 제멋대로 모해함) 등의 형태로 죄상을 들어 지식인을 박해하고 그들 가속과 족인들까지 도살하는 문자옥을 서슴지 않았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하였을 뿐만 하니라 처자와 자녀조차 죽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죽은 자를 부관참시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 그야말로 “살인을 초개처럼 여기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구나(殺人如草不聞聲)”이었다! 어찌 사람이 초개보다도 못할까. 듣도 보도 못할 정도로 살인을 자행하였다. 많은 폭군들은 백성과 지식인을 도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부하인 문신과 무장에게도 칼을 휘둘렀다. 중국역사상 공신을 주살하기로 이름 난 인물은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명 태조 주원장이다. 유방은 원래 군력이 약했다. 부하 한신(韓信), 소하(蕭何), 장량(張良), 번쾌(樊噲) 등의 문신과 무장의 책략과 무공을 등에 업고서 팽월(彭越), 영포(英布) 등 투항한 장수의 협력아래 강대한
아예 백치(白痴)라 할 수 있는 황제는 누가 있을까? 황위를 계승한 자가 어린애가 아니고 멍청한 천치였다면 바로 백치 황제라 할 것이다. 중국 역사상 백치 황제는 어린애 황제보다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해악은 심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백치 황제는 서진(西晋)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이다. 진 무제 사마염(司馬炎)의 둘째아들이다. 그의 형 사마궤(司馬軌)가 일찍 죽자 적장자가 돼 동궁태자가 되었다. 당시 태자를 교육하는 동궁 관리들은 태자가 백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고 미래에 자신이 황제의 스승이라는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오랜 기간 한패가 돼 무제를 속였다. 무제가 죽자 사마충은 황제가 된다. 그가 진 혜제다.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백치라는 진상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한 번은 외출했는데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맹한 채로 시종에게 물었다. “爲官乎?爲私乎?” 무슨 말인가? 지금 우는 개구리가 공공의 것인가 아니면 사유 재산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시종이 듣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대답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그저 부연해 말했다. “관전에 있으면 공공의 것이고 사전에
황당한 괴벽의 황제, 혼군(昏君)에는 어느 제왕이 속할까? 황제란 국가의 최고 통치자다. 군정대사를 장악하고 관리하였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 혼군, 즉 어리석은 황제가 적지 않다. 국가 군정대사를 놀이로 여겼고 국가를 모든 정력을 다하여 자신의 오락거리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황당한 괴벽까지 있었다. 그중 광적으로 구기(球技)를 좋아한 황제가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 당(唐) 희종(僖宗)과 송(宋) 휘종(徽宗)이다. 당 희종은 격구(擊毬, 폴로〔polo〕같은 구기)를 무척 좋아하였고 공을 다루는 기술도 뛰어났다. 그는 “내가 만약 격구로 진사 시험을 본다면 분명 장원이 될 것이다”라며 득의양양하게 허풍떨며 자랑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 번은 사천절도사에 결원이 생겼다. 그 관직에 진경훤(陳敬暄), 사립(師立), 우면(牛勉), 라원과(羅元果) 등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절도사란 지극히 중요한 관직이었다. 이런 중요한 관원을 인선하면서 희종은 격구 기술을 보이라고 명령하고 그중 가장 뛰어난 진경훤을 사천절도사로 보냈다. 송 휘종은 축국(蹴鞠, 고대 축구 일종)을 좋아하였다. 축국 기술이 뛰어난 시정잡배 고구(高俅)를
5. 명 인종(仁宗) : 5명의 비를 순장. 인종 사후 5명의 비를 순장하였다. 귀비(貴妃) 곽(郭) 씨, 숙비(淑妃) 왕(王) 씨, 여비(麗妃) 왕(王) 씨, 순비(順妃) 담(譚) 씨와 충비(充妃) 황(黄) 씨가 그들이다. 6. 명 선종(宣宗) : 10명 순장 선종(宣宗)의 경릉(景陵)에 8명을 순장했다고 한다. 혹은 순장한 사람은 7명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명사(明史)·후비전(后妃傳)』의 기록에는 마지막에 시호를 내린 명단이 보이는데 10명으로 돼있다. 7. 명 대종(代宗) 경제(景帝) : 구체적인 인수 불명 역사서 기록에 따르면 “비빈 당(唐) 씨 등”을 순장했다고 되어있으나 구체적인 명수는 기록하지 않았다. 상기 다섯 명의 황제를 더하면 순장한 비빈의 총수는 100여 명에 이른다. 이렇게 순장한 비빈은 대부분 자녀가 없거나 지위가 비교적 낮았다. 예를 들어 선종과 함께 순장한 10명의 여인 중 한 사람만이 생전에 비(妃)에 봉해져 있었고 나머지는 궁녀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인종과 함께 순장된 곽 씨는 생전에 이미 귀비였고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렇다면 순장의 ‘표준&r
9. 홍타이지 : 2명 순장 태종 홍타이지 사후 비 장긴(Janggin) 둔다리, 안다리를 순장하였다. 둔다리, 안다리는 청초 역사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관직이 모두 ‘니루(niru, 우록〔牛綠〕) 장긴’이었다. 숭덕(崇德) 8년(1643) 태종 홍타이지가 죽자 둔다리가 먼저하고 안다리가 뒤따라 ‘자원’해 순장되었다. 당시 ‘충신’으로 받들어 특별히 예우하였다. 그녀들의 자손들은 대대로 영광을 누렸다. 안다리는 원래 하급 관원 집안 출신이었다. 나중에 전공이 혁혁해 승급되었다. 따라서 홍타이지의 ‘지우(知遇)’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홍타이지가 죽자 안다리는 둔다리를 본받아 자청해 순장되었다. 그들의 요구는 제왕의 찬양을 받았다. 안다리는 임종 전에 제왕에게 질의하였다 : 다른 세상에서 태종 홍타이지의 영을 만났을 때 태종께서 후사에 대하여 물으시면 제가 어찌 대답하여야 합니까? 제왕은 말했다 : 우리 제왕은 유주(幼主, 순치제)를 옹립해 잘 모실 터이니 태종께서도 보우해 주십사고 전하여 달라. 말이 끝나자 안다리는 제왕 앞에서 자진하였다. 둔다리와 함께 부
3. 주원장(朱元璋) : 46명의 비빈을 참살해 순장. 명 태조 주원장이 죽은 후, 비빈 46명을 함께 부장하거나 순장하였다. 태조 이전에 죽은 비빈 2명을 태조 능묘의 동서 양측에 부장한 것 이외의 나머지 38명은 순장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주원장을 매장할 때 ‘미혼진(迷魂陣)’을 펼쳤다고 전해온다. 매장 당일 13개 성문에서 동시에 출관하였다. 이 이야기는 600여 년을 전해져 내려오면서 남경(南京) 민간에 전설처럼 퍼져있다. 남경에 다음과 같은 민요가 전해져왔다. “남경에는 세 가지 괴이한 것이 있다. 용담(龍潭)의 아가씨는 노부인 같고, 무를 반찬으로 삼아 팔고, 13개 성문에서 관을 들고 나가고.” 이처럼 주원장이 죽고 나서 기이하게 매장하였던 이야기는 놀랍게도 남경을 상징하는 얘깃거리가 되었다. 물론 황당무계한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날까? 사료에도 기록돼있다. 명 주국정(朱國楨)의 『황명대정기(皇明大政記)』에 기록돼있다. 주원장을 매장하는 그날 “발인했는데 각문하장(各門下葬)”했다고. ‘각문하장(各門下葬)’이
고대 10대 황제들은 자신이 죽어 묻히면 후궁도 같이 순장(殉葬)하기를 바랐다. 전제제국의 절대 권력자들은 죽어서도 재세의 영광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람에서 생겨난 고대 매장제도, 특히 중국 고대 제왕의 매장제도 중 가장 잔인한 것이 순장이다. 진한(秦漢)시기, 순장제도는 비교적 성행했었다. 한(漢) 왕조 이후에 와서 통치자들이 비인도적인 제도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점차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고고학자들이 주원장(朱元璋)의 능묘에서 많은 궁녀의 백골을 발굴됐다는 점이다. 한둘이 아니었다. 이는 분명 명(明) 왕조 개국황제 주원장이 죽었을 때에도 진한시기와 같은 순장제도가 실행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유학을 바탕으로 국태민안을 외쳤던 황제가……. 그렇다면 어떻게 순장을 했을까? 살아 있는 채로 묻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비빈(妃嬪)들이 잠든 후 옆에 있던 태감들이 머리를 잘라내었다. 구리 주걱을 들고 있던 집행인들은 잘려진 부위를 통하여 수은을 집어넣었다. 일정량의 수은을 집어넣은 후 바늘과 실을 가지고 두부를 봉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순장했는데 그
넷째, 오누이 통혼 풍습이 있었다. 복희(伏羲)와 여왜(女娲)는 중국 신화전설 중의 인류의 시조다. 바로 성경 속 아담과 이부처럼. 그들은 부부가 돼 인류를 창조하였다. 그런데 복희와 여왜는 오누이이다. 지금까지도 중국 소수민족 중에 전하여 내려오는 ‘나(儺)’ 문화 중의 ‘나공나랑(儺公儺娘)’ 신화도 오누이가 결혼해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사실 원시시대 혈연가족 시기에 인류는 ‘잡혼(雜婚)’을 끝내고 다른 항렬끼리의 혼인은 금지했지만 형제자매 사이에는 통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복희와 여왜 오누이가 부부가 된 것은 ‘혈연혼’으로 보면 도덕적이었다. 중국 원시시기에 성년 남녀 사이에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오누이가 결혼하는 데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최초 인류는 혼인이나 가족의 관념이 없어 남녀사이가 ‘난잡’한 상태였다.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남녀사이에 명확한 분공이 일어나게 됐으며 동시에 인류의 지혜가 점차 발전함에 따라 사유도 진보하게 되었다. 그때 모자간, 부녀간 등 다른 항렬의 혼인은 점차 사라졌으나 오누이 결혼처럼 같은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