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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10)

“한 걸음 물러나 있다가 나중에 행동을 취하여 상대를 제압한다.”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해 조용히 준비하면서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상대를 차분히 제압한다.”

 

상(商, 약BC1600~약BC104)나라 주왕(紂王, 약BC1105~BC1046?)은 역사적으로 잔혹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하다. 황음무도한 용군(庸君)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제멋대로 종실 대신을 살해하였고 가혹한 형벌로 사람을 죽였다. 백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대신들이 여러 차례 강력하게 간언했으나 주왕은 후회해 뉘우치지도 않고 오히려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내면서 그런 대신은 국도 조가(朝歌)에서 쫓아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 ?~BC1043)이 사람을 상나라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고 국정을 살피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상황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였다. “상 왕조는 지금 간인이 정권을 잡고 있어 여러 대신이 불화반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왕은 상 왕조를 정벌할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무왕은 또 보고를 받았다. “상 왕조의 백성은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내뱉지 못하고 있습니다. 격분해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래도 무왕은 기회를 엿보면서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나중에 파견한 자에게서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상 왕조의 국세는 위태롭습니다. 민심이 동요해 커다란 폭동이 일어날 조짐입니다. 민심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제야 무왕은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였다.

 

무왕은 여러 제후국과 연합해 상나라를 총공격하였다. 주왕은 스스로 병력이 많고 강대하다고 생각해 17만 대군을 집결한 후 응전하였다.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양쪽 군대가 만났을 때 노예로 이루어진 전방부대가 갑자기 폭동을 일으켰다. 창끝을 거꾸로 돌려 주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후 조가를 공략하였다. 주왕은 녹대(鹿臺)까지 후퇴했다가 스스로 분사하였다.

 

“시기가 왔을 때 잘못 보내지 마라, 기회가 도래하지 않았을 때 무리하게 구하지 마라”고 하지 않던가. 시기가 도래하지도 않았는데 억지를 부리면 결과는 좋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일은 반드시 시기를 기다려야한다. 오이가 익기를 기다려야하는 것과 같다. 곡식이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익은 후 수확한다. 알묘조장(揠苗助長)한다면 정반대가 된다.

 

진(晉) 항온(恒溫, 312~373)의 병이 위중하자 조정에 구석(九錫)(★)을 하사해주기를 청했다. 죽은 후에 자신의 죄를 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황제는 그의 위세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사안(謝安, 320~385)이 황제의 심중을 꿰뚫어 보았다. 원굉(袁宏, 약328~376)에게 상주문을 초안하라하고 초안이 완성되자 여러 차례 읽어본 후 수정하라고 하였다. 다시 초안이 올라오자 사안은 다시 원굉에게 수정하라고 하였다. 십여 차례 초안을 작성하고 살펴본 후 수정하고 다시 작성하고 하니 항온이 죽은 후에도 초안 원고가 확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구석을 하사하는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이것은 지연하는 방법으로 사기(事機)와 세기(勢機)를 얻은 사례에 해당한다. 들인 노력은 적고 얻은 성과는 크지 않은가. 사반공배다. 사안은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도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BC221)의 정(鄭)장공(莊公, BC757~BC701)도 그런 도리를 잘 알고 있는 고수였다. 자, 이제 그의 고명한 술수를 살펴보자.

 

춘추(春秋, BC770~BC476) 초년, 정무공(武公, ?~BC744)이 죽자 대자 오생(寤生)이 즉위하였다. 정장공이다. 그런데 그의 지위는 생모와 친동생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장공이 태어날 때 친모 무강(武姜)은 난산으로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래서 장공을 무척 싫어하고 그의 친동생 공숙단(共叔段)을 편애하였다. 형제가 성장하자 무강은 여러 차례 공숙단을 태자로 옹립하라고 요청했으나 무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공이 죽자 무강은 어머니라는 신분으로 왕위를 계승한 장공에게 제읍(制邑)을 공숙단에게

 

봉토로 주도록 요청하였다. 제읍은 군사 요충지였다. 장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강은 송숙단을 대신해 쉬이 방어할 수 있고 공략하기 힘든 경성(京城)을 주도록 요구하였다. 장공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하였다.

 

공숙단이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성벽을 높고 넓게 건축하였다. 정나라 대신들은 의론이 분분해 장공에게 말했다. “도읍 성벽의 높이는 선왕께서 이미 제정해 두었습니다. 지금 공숙단은 규정을 따르지 않고 축성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제때에 그를 저지하지 않으시면 나중에 수습하기 어렵게 됩니다.” 장공이 답했다. “내 모친의 뜻이 그러하니 내가 무슨 방도가 있겠소?”

 

자신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형을 본 공숙단은 더욱 방자해졌다. 서부, 북부의 군대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 명했고 주변의 성읍을 접수해 자신의 봉지로 삼았다. 공자 여(呂, 성은 희姬 이름은 여吕, 자는 자봉子封, 정 무공의 동생)가 장공에게 말했다. “마땅히 제때에 그를 제재하기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 하나하나를 점차 그가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장공은 여전히 서두르지도 않고 여유 부리지도 않는 모습으로 말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어질지 못하고 이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스스로 자멸하게 될 것이다.”

 

 

공숙단은 형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더더욱 제멋대로 굴고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양식을 모으고 무기를 만들어 군대를 확충하였다. 장공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나라사람들이 논의가 분분해졌다. 그때 장공이 말했다. “시기가 왔다!” 사람을 파견해 공숙단이 기병하는 날짜를 탐문한 후 공자 여(呂)에게 전차 200량을 이끌고 공숙단을 공격케 하였다. 공숙단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 구석(九錫)이란 옛날 중국에서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특별히 임금이 내리던 아홉 가지 은전(恩典)이다. 거마(車馬), 의복(衣服), 악기(樂器), 주호(朱戶, 주홍색의 대문), 납폐(納陛, 궁전의 토대를 뚫어 오르게 만든 계단, 몸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하였다), 호분(虎賁, 용감한 군사, 문지기), 궁시(弓矢), 부월(斧鉞), 거창(秬鬯, 검은 기장과 향초香草를 섞어 빚은 술)이 그것이다.(『예기(禮記)』)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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