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총관 고적(高適) =제주출신 수상(총리)이었던 고조기의 손자. 삼별초란 직후 어진 덕성으로 인해 탐라의 백성들을 위무(慰撫)하는 유총관(留摠管) 직에 임해졌던 성주(星主)족. 원과 고려 사이에서 고난 했던 시절을 시로 달래고 글씨로 달랬던 인물이다. 김석익의 「탐라인물고」에는 고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고려 탐라인이다. 문장과 글씨로 고려에 이름을 떨쳤다. 원종 신유년(1261)에 과거에 합격하여 바로 조정에 들어갔다. (후에) 부모님을 찾아뵈러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탐라가 삼별초의 난을 당하여 병사와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에 고적은 숲과 계곡이 있는 곳에 은거하며 산자락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왕이 그의 청렴함과 정직함을 듣고 사신 유희망(柳希望)을 보내어 말이 끄는 수레로 그를 맞이하게 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 고려의 조정이 바다를 건너 군사를 보내어 삼별초를 토평(討平)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적이 본래 탐라인으로, 탐라인들이 그 어짊을 알아 민심을 진정시키기에 마땅하다 하여 드디어 탐라유총관(耽羅留摠管)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니 충렬왕 2년(1276)의 일
탐라성주 고인단(高仁旦) =925년(태조 8) 고려에 방물(方物)을 바치기 시작한 이래, 김통정의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패하여 1273년(원종 14) 원의 직할령이 되면서부터 탐라는 고려의 부용(附庸)이면서 동시에 100여 년간 원의 직접적 지배를 받게 되는 고달픈 시기였다. 「탐라인물고」에는 고인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고인단은 탐라성주다. 그 선조인 고을나가 탐라의 한라산 아래로 내려와 한 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후세에 이르러 고후(高厚) 고청(高淸)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에 입조하니 신라의 왕이 내린 성주의 작호(爵號)를 자손이 세습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성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를 보내어 입조케 하니 이때부터 조공(朝貢)을 비로소 부지런히 하였다. 원종 12년(1271)에 몽고에 저항한 김통정(金通精)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며 귀일촌(貴日村;현 애월읍 하귀리)에 웅거(雄據)하고는 이듬해에 안과 밖으로 토성을 쌓아 험난함을 믿고 날로 창궐(猖獗)하였다. 성주 고인단과 왕자 문창우(文昌祐)가 조정에 보고하니 왕이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와 홍다구(洪
고조기(高兆基: 1085~1157) 중앙정계로 진출한 최초의 탐라인 고유(高維)의 아들 고조기(高兆基)는 불초(不肖)라는 말이 무색하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지방관으로서는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을 떨쳤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수상(首相)의 지위에까지 오른 제주 최고의 명신(名臣)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째 과거에 급제하였다. 여기에 아들은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째 정2품의 벼슬을 하였다. 여기에 아들의 지위는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2품인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이 겸직하는 상서(尙書) 6부의 최고벼슬인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하게 되면서 말 그대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뭇재상(宰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였지만 상전이 벽해 되고 또 다시 벽해가 상전이 되는 장구한 천년의 세월 속에 그의 이름은 닳고 존재에 대한 기억도 닳아, 오늘 우리들의 기억 속에 그의 실체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심재는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고조기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조기의 어릴 적 이름은 당유(唐愈)로, 탐라인 고유
제주사人-인물이야기를 연재하며 제이누리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제주의 사람, 제주의 인물을 다시 들춰봅니다. 그것도 근현대사가 아닌 고대사부터 우리 제주의 인물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역사의 인물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먼 과거의 인물을 통해 제주사를 되돌아보고, 지금의 현실에서 다시 미래를 열어갈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앞으로 100여명을 다룰 제주사 인물이야기는 제주문화원이 그동안 축적한 자료와 문헌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편집자 주 제주에는 인물이 별로 없다. 조선시대 이래로 중앙의 관직을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토로 진출하여 소위 고관대작에 이른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제주의 역사 속에서도 자취마저 가뭇해진 탐라, 그리고 제주. 장구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또 이어지며 지금 제주의 모습을 만들어온 수많은 사람들. 잊혀졌을 뿐 인물이 없지는 않았다. 고유(高維:생몰년 미상) : 탐라국(耽羅國) 역사상 최초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물 고려 정종 11년(1045) 탁라도(乇羅島)의 성주족(星主族) 탐라 고씨인 고유가 남성시(南省試)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법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