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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기...총리직인 수상에 오른 명신(名臣)

고조기(高兆基: 1085~1157)

 

중앙정계로 진출한 최초의 탐라인 고유(高維)의 아들 고조기(高兆基)는 불초(不肖)라는 말이 무색하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지방관으로서는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을 떨쳤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수상(首相)의 지위에까지 오른 제주 최고의 명신(名臣)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째 과거에 급제하였다. 여기에 아들은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째 정2품의 벼슬을 하였다. 여기에 아들의 지위는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2품인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이 겸직하는 상서(尙書) 6부의 최고벼슬인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하게 되면서 말 그대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뭇재상(宰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였지만 상전이 벽해 되고 또 다시 벽해가 상전이 되는 장구한 천년의 세월 속에 그의 이름은 닳고 존재에 대한 기억도 닳아, 오늘 우리들의 기억 속에 그의 실체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심재는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고조기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조기의 어릴 적 이름은 당유(唐愈)로, 탐라인 고유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경서와 역사서를 섭렵하고 여기에 더하여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었다."

 

 

고려 예종 정해년(1107)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는데 조정과 민간에서 청렴과 정직으로 칭송하였다.

 

인조 때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이 처음으로 정권을 좌지우지할 때, 산승(山僧)인 선서(善諝)의 말을 듣고 홍경원(弘慶院)을 수리하였다. 이때 승정(僧正) 자부(資富)와 지수주사(知水州事) 봉우(奉佑)가 그 일을 주간하여 장정들을 선발하니 주(州)와 현(縣)에 해가 됨이 아주 심하였다. 자겸의 권세가 무너짐에 이르러서 자부는 이에 연좌되어 섬에 유배되었지만 봉우만은 평소 환관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요행으로 복직되었다. 조기는 (봉우의 복직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상소를 올려 논박하였는데 재삼 (왕의 뜻을) 거스름에 벼슬을 낮추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 되었다.

 

후에 대관(臺官)으로 복직되었지만, 자겸의 난 때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자겸의) 위협에 복종하여 절개를 잃었었는데 그 잔당들이 연줄로 구차히 모면하여 재상에 이른 자가 많았다. 조기가 이를 없애고자 여러 번에 걸쳐 상소를 올려 다투어 말하기를, “비록 왕께서 관대하시어 그 흠을 가려주었지만 무슨 면목으로 조정에 서서 해와 달을 보겠느냐!”하였다. 왕이 비록 이 말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차마 대신들을 모두 내치지는 못하였다. 이윽고 조기를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발탁해 버리니 실제는 대관의 직책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의종이 즉위(1147)하자 여러 번에 동료들에 비해 높은 자리에 발탁되어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이 되었다. 다음해인 무진년(1148)에는 정당문학판호부사(政堂文學判戶部事)의 벼슬이 수여 되었고, 지공거(知貢擧)로서 진사로 이정견 등 25인이 급제한 과거를 주관하였다. 이어 참지정사권판병부사(參知政事權判兵部事)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의 벼슬을 받고 청연각(淸讌閣)에서의 연회에 초대받았다. 이때에 갑자기 왕이 가까이 불러 술상을 벌리고는 나랏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얼마 안 있어 판상서리부사(判尙書吏部事)가 되었는데 그때에 김존중(金存中)이 정권을 좌지우지하매 조정의 신하들이 이에 아부하는 자가 많았다. 임금에게 충간하는 자가 조기가 절개를 굽히고 존중에게 구차하게 영합한다 생각하고 드디어 조기를 탄핵함에 좌천되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 되지 않아 다시 평장사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의 벼슬을 받았다.

 

신미년(1151)에 중군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 겸 서북면병마판사(西北面兵馬判事)로 벼슬이 고쳐지고, 정축년(1157) 2월에 평장사(平章事)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세상을 떠남에 조정에서는 조회를 3일 동안 멈추고 유사(有司)에게 상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하고 시호를 하사하였다. 약간의 시가 있어 세간에 읊어지고 있다.

 

고조기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기도 하였다.

 

昨夜松堂雨 지난밤 송당에 비가 내리어
溪聲一枕西 베갯머리 서편엔 시냇물 소리
平明看庭樹 동트는 뜨락의 나무를 보니
宿鳥未離棲 자던 새 둥지를 아니 떠났네

 

시문의 전범(典範)만을 뽑아 놓았다는 동문선(東文選)1)에 수록된 고조기의 오언절구 ‘산장의 밤비(山莊夜雨)’다. 이외에도 ‘진도의 강가 정자에서(珍島江亭)’ 등 몇 편의 시가 동문선에 더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고조기라는 인물은 정치적으로만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최고의 문학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역사상 이와 같은 인물이 제주에 또 있었을까?

 

글=백종진(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1)동문선 제19권 오언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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