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 오태직(吳泰稷:1807~1851) 京洛逢渠始識姿 歸來粧點效嚬眉 土人曾視無名草 半破瓦盆分亦宜 서울에서 수선을 보고 그 자태를 알았는데 이곳에 와서는 본대로 꾸며 놓았지만 지방 사람들 유명한 꽃인 줄 알지 못하니 조각난 화분에 심는 것이 그럴싸하지 않는가 제주에 목사로 왔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재임기간 : 1841년~1843년)의 「탐라록」(耽羅錄)에 실려 있는 시다. 사람들은 추사에 의해 제주의 수선화가 처음으로 육지에 그 존재가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 추사는 제주유배 당시 밭두둑에 널려 있는 수선화를 보고 이곳 사람들은 수선화의 귀함을 모르고 잡초처럼 짓밟고 뽑아서 던져버린다 나무랐지만, 추사 이전 이곳 선비들 한겨울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고 노래하고 있었다. 위의 시는 당시 이 고장의 선비 오태직(吳泰稷:1807~1851)이 지은 수선화시의 운을 따라 지은 것으로 원제(原題)는 ‘선비 오태직이 지은 수선화시 절구 10수를 차운하다(次吳生泰稷水仙花十絶)’이다. 오태직의 자는 여빈(汝濱) 또는 여대(汝大), 호는 소림(小林),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추사가 글씨를 인정한 제주의 명필, 오점(吳
영주십경을 처음 품제한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 1818~1881) 영주십경(瀛洲十景)은 제주의 토박이를 비롯하여 외래의 방문객들에게 제주는 곧 ‘영주십경’이라는 등식으로 제주를 설명하며 덧붙이는 제주의 대명사다. 그리고 이 말이 제주의 비경 10곳을 선정한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 누가 이러한 열 곳을 선정하여 영주십경이라 이름 붙였는지 그 유래와 취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제주시 동쪽, 조천읍 신촌리 신촌초등학교 정문 옆 화단 위에 ‘매계 이한진 기념비’라는 비가 세워져 있다. 한글세대인 요즘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는 그 비가 바로 영주십경을 처음으로 품제(品題:논하고 평한 글)한 매계 이한우를 기념하는 비이다. 매계는 1818년(순조18) 조천읍 신촌리에서 태어나 1881년(고종18) 돌아갈 때까지 줄곧 고향에서만 살았다. 매계는 생전에 효행이 도타웠고, 시에 능하여 그 명성이 서울에까지도 잘 알졌다고 하는데 심재 김석익의 『심재집』파한록 320쪽을 보면 매계가 젊었을 때 당시 제주에 귀양살이 왔던 추사에게 시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매계의 문하에서는 안달삼, 김희정, 이계징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적소(謫所)이지만 명사(名士)를 찾는 제주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터이고 이에 따른 추사에 얽힌 많은 일화들이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전벽해의 변화와 구전자들이 유명(幽明)을 달리함과 함께 숱한 전설은 사라져버렸고 추사가 머물다간 이곳 제주에는 다소의 억측이 섞인 기담(奇談) 몇 토막, 그리고 제주 향토사가의 문적에 실려진 간략한 추사관련 기사가 남아있을 뿐이다. 제주 대정현에서의 추사의 유배기간은 1840년(헌종 6년) 9월부터 1848년 12월까지 만 8년 3개월, 햇수로는 9년 동안이었다. 처음에는 대정성 동문밖 막은골 교리(校吏) 송계순(宋啓純)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후일 강대유의 집으로 옮겼는데 현재 ‘추사적거지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또한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에는 물(식수) 때문에 안덕면 창천리(倉川里)로 옮겼다고 구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추사의 유배에 관련된 제주유생들과의 종유(從遊)의 흔적은 이후 편찬된 향토지 등에 간략히 등재되어 전한다. 대정읍 상모리 출신인 정재(正齋) 고병오(高炳五ㆍ1899~1972)가 편찬한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에는 추사의 적려 유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오점(吳霑:1764~1856) 흔히 명필이라 하면 제주에 유배 왔던 추사 김정희를 일컫는다. 추사체가 제주 유배시절에 완성되었기에 제주에서의 명필이라 하면 일반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를 머리 속에 떠올리곤 한다. 그렇다면 제주가 고향인 사람 중에 명필이라 할 만한 인물은 없을까? 오점은 조선시대 정조에서 순조, 헌종, 철종조에 활동했던 제주의 명필, 더 나아가 호남의 명필로 알려진 인물이다. 여기에 그는 문장까지 겸해 진정 서예가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추어 오늘날 ‘글씨만을 잘 쓰는 명필’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또한 금석학에까지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전하여 진다. 하지만 오점의 자취는 앞서 등재된 제주사 인물의 기사에서처럼 자세하게 남아있지 않다. 그의 글씨 또한 명필이라는 호칭에 무색하게 몇 작품이 남아있지 않다. ▲ 한 묘비에 새겨진 오점의 서체 호남명필로 일컬어진 오점의 자(字)는 시지(時之), 호는 청파(靑坡),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제주 성안에서 성장하였다. 정조 10년(1786) 사마시에 뽑혔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필법이 뛰어났는데 특히 송설체(松雪體)를 중시해 썼으며 당대 금석서(金石書)에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장사 찰방 오영관(1694~1755) 오찰방의 아버지는 튼튼한 자식을 낳으려 해서 부인이 임신하니 소 열두 마리를 잡아 먹였다. 튼튼한 아들놈이 태어나려니 기대했는데, 낳은 것을 보니 딸이었다. 아버지는 약간 서운하였다. 다음에 다시 임신이 되었다. 오찰방의 아버지는 다시 소를 잡아 부인에게 먹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시 딸을 낳을는지 모르니 아홉 마리만 잡아 먹였다. 그런데 낳은 것을 보니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열두 마리를 잡아 먹일 것을 잘못했다고 약간 서운해 했다. 소를 아홉 마리나 먹고 태어났으니 오찰방은 어릴 때부터 힘이 셀 수밖에 없었다. 대정 고을에서 씨름판이 벌어지면 언제나 오찰방 독판이었다. 제주 삼읍에서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모여들어도 오찰방을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 오찰방은 어느 날 누님에게 힘센 자랑을 하였다. 제주 삼읍의 장사들이 모인 씨름판인데 자기를 당해 내는 놈이 하나 없더라고 뽐낸 것이다. 그러자 누님은, “이번 한림읍에서 씨름판이 있을 터인데 거기 출전하면 반드시 너를 이길 장사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오찰방은 픽 웃어 넘겼다. 오찰방은 다시 힘을 과시하려고 한림읍 씨름판에 나갔다. 씨름이 벌어졌
변경붕(邊景鵬:1756~1823) 변경붕은 대정읍 신도리 출신으로 자(字)는 중거(仲擧), 호는 일재(一齋)다. 정조 18년(1794) 치러진 향시에서 논(論)으로 수석을 차지하고, 다음 해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되어 급제하였다. 내직으로는 성균관 학유(學諭), 봉상시 부봉사(奉常寺 副奉事), 성균관 전적(典籍)과 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뒤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대정현감과 만경현령을 지냈고 순조 19년(1819)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변경붕에 대한 심재 김석익의 『탐라인물고』 기사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끈다. ‘…만경현령 재직 시 백성에게 씨를 뿌리는 법을 가르쳐 지금까지 현인(縣人)들이 그 공에 힘입고 있으며, 신인(神人)이라 칭송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정종 14년(1814) 6월 전라도 만경현감에 부임하고 나니 가뭄이 심해 모종을 낼 수 없게 되자 만경현민들이 “복이 없는 제주 놈이 원님으로 와서 이런 지경이다!”하며 원망하였다. 이에 궁지에 몰린 변경붕이 생각 끝에 제주의 밭농사 식으로 모종을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이윤(李火允:1650~1708) “아! 슬프다. 이별장(李別將)이 죽었구나.” 경주 이씨 입도조 이익의 손자 이윤(李火允:1650~1708)이 숨졌을 때 제주사람들이 영결(永訣)하며 울부짖던 한 마디다. 평소 남을 위해 베풀기를 좋아했다고 전하는 덕스럽던 그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심재 김석익의 「탐라인물고」에는 이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윤은 자(字)가 여명(汝明)이고, 본관이 경주(慶州)로 간옹(艮翁) 이익(李瀷:1579~1624)의 손자이다. 무과에 등제하여 별장(別將), 훈련판관(訓練判官)을 역임했다. 덕행과 기국(器局)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죽음에 이르러 그를 떠나보내며 “이별장이 죽었다.”라고 탄식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된 간옹 이익은 제주에서 헌마공신 김만일의 딸을 맞아 2년 뒤에 아들 인제(仁濟:1620~1669)를 낳았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그는 5년 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 현 제주시 거로에 유배되었던 부부인 노씨(府夫人 盧氏)와 함께 상경
부종인(夫宗仁:1767~1822) ‘부종인은 자(字)가 자량(子諒)이며 정의(旌義)사람이다. 정조 갑인년(1794)에 대책(對策)으로 등제하여 벼슬이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이르렀고, 서울과 지방에서 관리로 일할 때에는 청렴하고 능력이 있다고 칭찬받았다. 일찍이 대정현령(大靜縣令)으로 있을 때는 학문을 일으키고 선비를 권장하여 지금도 백성들이 칭송하고 있다.’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의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에 쓰여 있는 부종인에 대한 설명이다. 부종인은 위의 설명처럼 청렴하고 능력 있는 목민관이면서 또한 문장에 능하고 시를 잘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심재는 그를 평가하는 짧은 글에서 특히 대정현령으로 있을 때의 치적(治積)으로 학문을 일으킨 사실을 꼽고 있다. 대정현에 서당이 처음 생긴 것은 1796년(정조 20)에 현감 고한조(高漢祚)가 읍 안에 세운 것이 시초인데, 이를 1799년(정조 23)에 부종인(夫宗仁)이 대정 현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광해군 때 대정현에 유배 왔던 정온(鄭蘊:1569~1641)의 적거터에 옮겨 열락재(悅樂齋)라 이름 지으면서 대정현의 유생(儒生)들이 머물러 공부하게 하였다. 그런데 부종인은 왜 정온의
박계곤(朴繼崑;1675~1731) “우리 부모님을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 없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나이다. 하늘이여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표식을 아버님 집으로 보내주소서. 하늘에 빌며 절하며 통곡합니다.(哀我父母, 幾乎永訣, 天其矜怜, 標送父家, 祝天拜哭)” 애월읍 옹포리 출신의 박계곤(朴繼崑;1675~1731)이 목사 일행을 따라 육지로 가다 파선되어 사서도(斜鼠島) 근처에 표착하고는 부모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하며 널빤지에 적어 내려간 글귀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 널빤지는 물결을 따라 곧바로 제주성 북문 앞 바닷가에 도착했고 자식의 도항을 걱정하던 아비가 이를 발견하고 관가에 고하여 박계곤은 결국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감천(感天)의 효자(孝子)라 알려진 박계곤에 대해 심재 김석익은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박계곤은 본관이 밀양으로 독포촌[현 애월읍 옹포리]에서 살았고, 어려서부터 효자라고 칭찬받았다. 일찍이 일이 있어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바다 가운데서 부서져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거의 죽게 될 때에 배의 널판 한 조각에 부모에게 이별하는 글을 쓰고는
효자 홍달한(洪達漢:1666-1749) 심재의 [탐라인물고]는 제주사에 있어 각 방면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 효자로는 영조 때 정려(旌閭)된 홍달한(洪達漢:1666-1749)이 처음 등장한다. ‘홍달한은 본관이 남양(南陽)이며, 정의 고성촌(현 성산읍 고성리)에 살았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일찍이 변을 맛보며 증상을 진단하였고, 손가락의 피로 효험을 얻었다. 모친상을 당하니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부친을 추모하여 3년 상을 지냈다[爲父追服: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 삼년복을 입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기가 지났지만 추모하여 복을 입었다는 뜻]. 숙종이 승하하니 초하루와 보름에 단을 설치하고 북쪽을 향하여 향을 피워 돌아가신 부모처럼 통곡하니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었다. 이 일이 알려져 충효(忠孝)라고 정려(旌閭)하였다.’ 기록상 조선시대 효자로 정려된 이는 구좌읍 김녕리의 김칭(金秤)이 성종 18년(1487)에 정려된 것이 최초다. 그런데 심재는 김칭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효자로서 영조 20년(1744)에 정려된 홍달한을 먼저 거론하고 있다. 효와 더불어 충
고처량(高處亮:1688~1762) 세인들은 성안 동쪽 가락천변 언덕 위(현 제주기상청 남쪽)에 있던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언급할 때면 으레 화북포의 축항공사를 진두지휘하며 스스로 등짐을 지어 날랐던 일화로 유명한 김정(1670~1737) 목사만을 기억한다. ‘김정 목사가 삼천재(三泉齋)를 세웠다.’ 물론 그렇다. 김정이 남긴 시와 글, 삼천서당 주변 곳곳에 새겼던 마애명 등에서 삼천서당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제주의 역사가 아니다. 제주인의 손길과 숨결을 느낄 수 없다. 그 이면, 김정의 삼천서당 창건과 관련한 제주의 이야기, 그 역사와 관련된 제주의 인물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이원진 『탐라지』의 숨은 주인공 고홍진처럼. 제주 사학의 명문이었던 삼천서당과 관련된 제주의 인물, 그 단서를 다음 심재의 「탐라인물고」의 짤막한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처량(高處亮:1688~1762)은 자가 명숙(明叔)이며 숙종 무진년(1688)에 태어났다. 병신년(1716)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좌랑에 이르렀고, 구례(求禮)와 진해(鎭海)의 관장(현감)을 역임했다. 일찍이 고을 학교의 교육
오흥태(吳興泰:1700~?) 국가의 위기 상황은 절도(絶島)의 이름 없는 선비의 가슴에 의분의 불을 질렀다. 3백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까지도 공맹(孔孟)의 의리(義理)를 온몸으로 실천했던 조선 선비의 의로운 행의(行誼)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전히 가슴을 울리게 한다. 정의현(旌義縣) 의사(義士) 오흥태(吳興泰)에 대한 사실(史實)은 다음과 같다. 영조 4년(1728)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정계에서 배제되자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무력으로 정권쟁탈을 꾀하는 역모를 일으켜 전국이 어수선해지자 정의현 난산리(현 성산읍 난산리) 유생 오흥태가 삼읍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의병 수백 인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여 출육(出陸)하려 할 즈음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됨에 따라 이내 곧 군사를 해산하여 돌려보냈다. 정조 18년(1794) 어사 심락수의 보고로 이 사실을 안 국왕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실적이 없으면 정려를 명하지 아니하는 전례를 깨고 의사로 정려(旌閭)토록 하였다. 철종 원년(1850) 목사 장인식(張寅植)은 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정의서당 안에 의사묘(義士廟)를 세워 오흥태(吳興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