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시 성산읍 제주 제2공항 예정 부지인 온평리 일대. [사진=뉴시스] 그래서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1949년 장제스가 제안한 제주도 공군기지 문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강정해군기지 관광미항이 처음부터 대국민 사기극이었듯, 제2공항 역시 그 전철을 밟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1992년 국토부장관과 국방부장관,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제2공항을 지을 때 함께 군사공항도 짓는다는 협약을 한 사실도 폭로된 바 있다. 2004년에는 민군 합작으로 정석비행장을 활용하려는 걸 한진그룹에서 거부한 전례도 있다. 그렇다면 현재 온평리 제2공항 부지 내에 공군이 ‘남부수색구조대’를 창설한다는 소식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 조상이 물려준 땅에 대해 뼈를 깎는 심정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땅을 판 자가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에 대해 각성할 필요가 있다. 제2공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오래전 대규모 마을공동목장을 자본가들에게 팔아버린 우리의 선조에게 원죄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사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그 업보가 어깨를 불끈 일으키고 나타나
▲ 제주 제2공항 부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원희룡 최근 제주도 전체 도민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온평리 제2공항은 반대 여론이 더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문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단순하게 공항 찬성 반대로 나눌 경우 5대 5, 기존의 제주공항을 활용하는 방안까지 포함할 경우, 기존 제주공항 활용이 더 우세한 형국이다. 대체로 제2공항 건설보다 기존 공항을 활용하는 방안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는 항목에 손을 들어줬다. 또한 제2공항에 대한 도민의 의견을 묻는 공론조사의 필요성에는 84.1%가 동의했고, 제2공항 갈등 원인으로 국토부와 제주도의 일방적인 추진이 문제라는 비율이 33.3%로 가장 높았다. 국토부의 용역을 맡은 프랑스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의 보고서가 뒤늦게 공개된 것도 여론 변화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현 제주공항을 개선하면 제주도의 장기 항공 수요인 연간 4,560만 명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를 국토부가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게 결정적으로 여론의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2020년 신년 인터뷰에서 원희룡은 제주공항 확장안은 불가하다고 재천명
▲ 서귀포시 성산읍 제주 제2공항 예정 부지인 온평리 일대. [사진=뉴시스] 2016년 제2공항 예비타당성 검토 용역의 전말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2012년 제주도는 이미 국토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하여 네 곳의 공항 후보지를 선정한 바 있다. 내륙형으로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해안형으로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와 성산읍 신산리, 해상형으로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가 후보에 올랐다. 예상 사업비는 김녕리 7조300억원, 신도리 3조7,050억원, 신산리 4조5,630억원, 위미리 해상은 18조2,299억원으로 발표되었다. 이중 해상형인 남원읍 위미리는 해안 매립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구좌읍 김녕리는 접근성이나 지형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주변의 세계자연유산 때문에 불가능해 보였고, 성산읍 신산리는 정석비행장과 공역이 겹치는 문제와 녹지 훼손 문제가 제기되었다. 누가 봐도 대세는 대정읍 신도리였다. 신도리 해안형은 기상 여건, 지형조건, 최저 사업비라는 측면에서 두루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장애물도 적고 바닷가의 평탄한 지형인 데다가 지반도 단단해서 누가 봐도 최상의 입지 조건이었다. 그러나
신구범의 증언 20여년의 집념 끝에 1995년 한진그룹은 비행훈련원의 대대적인 확장공사에 착수한다. 그 결과 1998년 2300m×45m의 활주로 1본과 1500m×25m의 보조 활주로 1본을 갖춘 지금의 규모로 거듭난다. 조중훈의 호를 따서 정석비행장이라 이름 붙였다. 당시 제주도지사는 신구범이었다. 김수남은 삼다수 공장 설립 과정을 취재하던 도중 신구범 전제주도지사로부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신구범 = 그때 조중훈씨가 저를 굉장히 좋아했었어요. 그 기초비행훈련원 비행장 있잖아요. 제 전임 관선지사 우근민은 확장사업 허가를 안해줬거든요. 교래리 쪽에서 반대가 워낙 심했으니까. 그렇지만 제가 후임 관선 도지사로 내려오자마자 제주도특별개발법 1호 사업으로 승인해주게 되었죠. 김수남 = 전에 조중훈씨를 알았습니까? 신구범 = 조중훈씨야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나? 나도 이름만 알고 있었지. 만나 본 적은 없고. 근데 그것은 간단해. 요새 제2공항 만들자고 야단이잖아요. 제주도에는 예비공항이 필요합니다. 그때가 1990년도 초니까 앞으로 항공 비행 기술은 계속 발전할 거고, 안개니 비행기 뜰 때 안각
▲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소위 가미카제호로 불리는 자폭용 비행기를 숨겨놓기 위해 만든 송악산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집념의 기초비행훈련원 조중훈은 1990년 노태우의 5·8경제조치 때 비행훈련장만큼은 비사업용이 아니라고 반발했을 만큼 이 땅에 애착을 보였다. 이후 인근 주민들과 갈등을 겪고, 소송전을 불사하면서도 평생에 걸쳐 이 훈련장 확장에 집착했다. 조중훈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비행훈련장에 목을 맨 것일까. 녹산장 땅을 산 이유도 비행훈련장 때문이라고 했다…… 그 순간 전광석화처럼 김수남의 뇌리를 때리는 게 있었다. 그렇다, 녹산장 터에는 일제가 만들어놓았던 활주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000m×100m 1본, 900m×50m 1본. 김수남의 동공이 바로 지진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조중훈은 일제가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장의 활주로를 그대로 사용하려 했다는 말인가……. 애당초 조중훈은 땅을 구입할 때부터 가미카제 비밀비행장의 활주로 재사용을 염두에 두었을 공산이 컸다. 특히 1982년 비행훈련장에 개설한 활주로 크기가 900m×25
▲ 1973년 납치에서 풀려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이 절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김대중평화센터] 김대중 납치사건 조중훈이 이토록 비행훈련장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근 지역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려 세 번씩이나 비행훈련장 확장을 시도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자료를 읽던 김수남은 의문이 들었다. 그 내막은 아주 오래전 조중훈이 박흥식으로부터 녹산장 땅을 매입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땅을 차지한 20여년 동안 조중훈의 머릿속에는 온통 비행훈련장 생각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91년 한 일간지에 연재한 자서전 형식의 글에서 조중훈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동목장이 정부의 축산장려정책에 부응해 한라산 기슭에 문을 연 것은 1972년 3월이다. 이 한라산 기슭 황무지는 흥한화섬 사장인 박흥식씨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매물로 내놓은 물껀을 사들인 것이다. 박흥식이 해방 전에 이 황무지를 불하받은 데는 나름의 애국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곳에다 활주로를 닦고 조종사 훈련장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박흥식은 20대의 젊은 나이로 선일지물 사장을 역임했을 만큼 사업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 1989년 1월 대한항공 자체 조종사 양성기관인 기초비행훈련원 개원. [사진=한진칼 홈페이지] 노태우의 5·8경제조치 이후 한진그룹은 승승장구했다. 꼼꼼히 뒤를 봐주고 챙겨주었던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서울의 봄’이 오고, 6·29선언이 나올 때까지 제주도에서 영향력 1위의 재벌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다. 신제주가 개발되면서 그룹 소유의 부동산 가치 역시 동반 상승하게 된다. 1989년 한진그룹은 제동목장 내 기초비행훈련원 비행장 확장사업을 강행한다. 1년 전 정부로부터 훈련비행장 시설 확장 허가를 받고 추진하다 인근 주민과 축산 농가들이 반발하고 나서자 포기했던 사업이었다. 제동목장 주변 15개 마을과 인근 목장에 사육되고 있는 3000마리 소에게 심각한 소음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1982년 개설된 활주로 900m×25m 외에 2000m×45m의 대형 활주로 1본을 추가하기로 하고, 격납고와 훈련원 기숙사의 환경영향평가를 의뢰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 인근 마을의 격렬한 반대가 제주사회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을 무렵, 이
▲ 한진상사 설립. [사진=한진그룹 홈페이지] 기업형 목장의 선두주자 제동목장 정부의 축산진흥정책이 가열화되자 제주도에서 기업형 목장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은 한진그룹 조중훈이었다. 조중훈은 제주 동부지역의 녹산장(鹿山場) 터를 사들여 제동목장을 건설했다. 다른 기업들도 이에 뒤질세라 대단위 목장 매입에 나섰다. 대원목장, 남영목장, 건영목장 등이 그것이었다. 조중훈은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이 확전하자 전장에 ‘전쟁특수’가 따른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전략물자 하역과 수송용역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조중훈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베트남 시장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하역능력과 운송 서비스에 신용과 자신을 얻게 되자 미 국방부로부터 더 많은 용역을 받게 된다. ▲ 한진상사, 주한 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계약 체결. [사진=한진그룹 홈페이지] 한진상사는 120인승 비행기를 구입하고, 외화벌이로 나선 근로자들을 수송하기 위해 서울과 베트남을 운항했다.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의 항공기가 홍콩까진 운항했으나 결항이
▲ 1967년 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도립목장(현 축산진흥원)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제주도청] 개발독재 시대의 축산업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는데도 국립송당목장이 사면초가 신세를 면치 못하자, 박정희의 수심은 깊어만 갔다. 그 무렵 제주도 서부 중산간지대에서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소를 방목할 수 있는 야산과 축사만 있으면 된다고 축산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박정희의 고정 관념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한림 일대에서 파란을 일으킨 ‘파란 눈의 신부(神父)’였다. 이시돌목장의 맥그린치 신부였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가 제주 땅을 밟은 것은 1954년 4월, 스물다섯 젊은이의 눈에 비친 제주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는 제주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라는 한림 금악에 터를 잡는다. 맥그린치 신부의 소식을 듣고 박정희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자신이 그토록 관심과 지원을 기울여도 현상 유지에 급급하던 제주도 축산이 내국인도 아닌, 외국의 젊은 신부가 대규모 목장을 성공적으로 조성했다는 데 호기심과 질투가 일었다. 박정희는 곧바로 맥그린치 신부를
▲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제주에 와 지역주민들과 대화하고 있다.(1962년 추정) [사진=제주도] 제주도 개발의 서막 반민특위 제1호로 잠깐 체포되었던 박흥식은 5·16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로 다시 지목된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의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구속되어, 반민법 공판에서 무죄 언도를 받기까지 103일간 옥고를 치렀던 박흥식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일주일 후 5월 23일 밤 박흥식은 자택에서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혁명정부는 그가 민주당 정부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달하고 막대한 이권과 특혜 융자를 챙겼을 거라 생각했다. 당국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은 화신산업의 회계장부를 말 그대로 ‘탈탈’ 털었으나, 공식적으로 낸 정치자금 100만원 외에 어떤 혐의도 발견하지 못한다. 43일의 옥고를 치른 박흥식은 소정의 벌과금을 내고 석방된다. 그 즈음 혁명정부는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안을 발표하는데, 박흥식에게도 국가재건에 적극 참여해서 타기업의 모범이 되어달라고 종
▲ 송당목장 박흥식은 친일파인가 박흥식이 생산하려던 キ79丙 고등연습기가 여차하면 히엔으로 전환 가능한 기종이었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이번에는 김수남의 두뇌가 금속 절삭기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불꽃을 튀겼다. 해방 후에 박흥식은 자신이 조선비행기공업을 경영했다는 사실만이 부각되어서 ‘매판자본가 제1호’라는 오명과 함께 ‘저주받은 삶’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단지 목철혼합 시작기 1대를 제작했을 뿐, 결과적으로 약 2500여명의 조선인 청년들에게 강제징용의 피난처를 제공했다고 박흥식을 두둔하는 학자도 있다. 전시체제 말기 박흥식의 기업행동이 명백한 군수협력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반역자로 단정하기에는 과정보다 결과가 썩 괜찮았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었다. 박흥식이 반민특위에 끌려가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쳤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1945년 8월 이후 일본인 조선군사령관이 일본 망명을 권유하면서 비행기까지 내주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던 이유도 이러한 신념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이 있다. 교래리 비밀비행장은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소위 가미카제호로 불리는 자폭용 비행기를 숨겨놓기 위해 만든 격납고. 제주도흥업 실제로 일제가 1938년 조사한 제주도 목장의 통계 자료에는 ‘녹산장은 면적 1000정보(300만 평)로 섬 제1의 평탄지이고, 개간에 착수했다’라고 적혀 있다. 이때 개간에 착수한 회사가 바로 제주도흥업이었다. 김수남의 눈길을 사로잡는 또 다른 문장이 있었다. 1941년 박흥식은 제주도흥업 주식 100%를 인수하였다. 취체역이 아니라 사장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조금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녹산장 일대는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을 세운, 한때 ‘조선의 제일 갑부’ 박흥식이 조종사 훈련장으로 불하받은 땅이었다. 녹산장 땅 중 일부는 가시리 마을공동목장으로 편입되었고, 사정이 어쨌든 나머지 땅은 통째로 박흥식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박흥식은 해방 이후에도 이 땅의 소유권을 인정받게 된다. 조선비행기공업 박흥식은 1944년 10월 2일 주식회사 조선비행기공업 사장에 취임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비행기공업에 1945년부터 5년 동안 소득세와 사업세 등 면세 혜택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