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림신협이 초기 터 잡았던 한림성당 신용협동조합 제주도연합회가 1995년 2월 <제주도신협 30년사>를 발간하였다. 세계의 협동조합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용조합의 세계화 되는 과정을 소상하게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한국에서의 신용협동조합의 역사에 이어 제주도내의 금융산업의 발달과정과 함께 제주도 신용협동조합의 30년 역사를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첫 머리는 2페이지에 걸쳐 세 사람의 인물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가장 큰 사진은 우리나라에 신용협동조합의 선구자격 메리가별 수녀(Mary Gabriella Mullherin) 사진이다.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김정민 회장, 맥그린치 신부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제주신협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제민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는데 앞장섰던 현학순 제주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메리가별 수녀가 한림신용협동조합 설립을 권유했고, 맥그린치 신부가 이를 받아들여 신용협동조합의 씨를 뿌렸고, 그리고 김정민 회장은 이를 잘 가꾸어 단 기간에 전국 최고의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내에 신용협동조합을 뿌리내리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김정민
▲ 이시돌 목장 초기 소를 방목하던 장면이다. 이시돌 목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맥그린치 신부는 당초 생각대로 주민 소득을 높일 방안을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시돌 목장을 확장하면서 고용을 늘리는 것도 좋지만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목축업을 직접 하도록 하면 소득이 크게 늘 것이라고 봤다. 주민들이 직접 목장을 경영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 있고, 의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계획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양돈은 커녕 소를 키우는 기술은 고사하고 돼지와 소, 땅을 구입할 돈도 땡전 한 푼 없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외국인 신부의 착각이라고 허허롭게 웃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돼지와 소, 땅은 모두 외상으로 주면 될 것이고, 기술은 가르쳐 주면 될 것이고, 사료 역시 외상으로 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개척농가의 구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다행히 그 시절 맥그린치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민간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인 PL480 제2관에 의하여 옥수수를 일 년에 수만 톤을 받았다. PL480으로 이시돌협회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약 4년 동안 옥수수를 금액으로 치면 322만 달러어치를 지원받았다.
▲ 이시돌 목장이 활황세이던 1980년대 방목지를 따라 젖소들이 이동하던 장면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한림성당에 부임한지 3년차인 57년에 가축은행을 만들었다. 성당마당에서 키우기 시작한 돼지가 새끼를 낳자 이를 다시 4H 클럽 회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돼지가 또 새끼를 낳으면 어미 돼지 한 마리당 두 마리 새끼를 다시 가져오도록 했다. 이를 다시 지역주민들에게 분양하는 중간역할을 하는 곳이 가축은행이다. 돈을 빌린 사람이 이자를 붙여 가져 오면 이를 다시 더 많은 사람에게 빌려주는 방식으로 운영했으니 은행과 흡사했다. 가축은행은 금세 규모가 불었다. 비좁은 성당마당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돼지, 면양, 닭 등 가축이 늘어났다. 게다가 축산 악취로 골머리를 앓게 되자 성당에서 사 둔 더 넓은 부지로 돼지와 닭을 옮겨 키웠다. 하지만 그 자리도 늘어나는 가축수를 감당하긴 어려웠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쯤 이르자 소규모 축산이 아닌 대규모 축산을 생각했다. 자존심 강하면서도 성실한 지역 주민을 보노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형 목장을 꿈 꾼 것이다. 현재의 이시돌 목장을 중심으로 땅을 사기 시작하였다. 가족, 친구들의 십시일반 도움과
이시돌 의원의 원장을 맡았던 파멜라 수녀가 과로로 2년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시돌 의원을 책임질 원장은 그후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목포 성골롬반 병원도 지원해 줄 여력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의사들 역시 쥐꼬리 봉급을 내밀자 모두 손사래를 쳤다. 하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광주 기독병원에서 3~4년차 레지던트 수련의를 지원받아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레지던트들도 고충이 있었다. 전문의 수련을 받으며 진료를 해야 하는데 이시돌 병원에는 진료과라곤 고작 일반내과 하나였다. 그들은 3~4개월 근무수련을 끝으로 이시돌 의원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 1998년 귀국 직전 메리 엔다 원장수녀 나중에는 경희대 병원 내과, 서울대 소아과에서 3~4개월씩 레지던트를 보내줬다. 서울대 병원이 그나마 관심을 더 보여줬다. 그러던 중 1976년 메리 엔다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했다. 의사면허를 가진 그가 오자 이시돌 의원은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시돌 의원은 항상 적자에 시달렸다. 비영리 병원이기에 받아야 할 진료비의 30%만 받았다. 더욱이 가난에 쪼들린 환자에게는 무료였다. 엔다 수녀가 처방전에 ‘F’라고 적어주면 '공짜'(Free)
▲ 성이시돌 복지의원 전경 성 이시돌 의원( 이하 ‘이시돌 의원’-통상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현재는 이시돌 복지의원) 얘기다. 그러고보니 맥그린치 신부가 한 일을 열거하자니 끝이 없다. 축산 근대화와 목장개간, 신용협동조합, 직물사업에 이어 의료복지에까지 손을 뻗친 그를 생각하면 솔직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이시돌의원은 그를 떠올리면 꼭 기억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병원다. 그가 제주에서 60년 생을 보냈고, 이제 80 중반의 노구에 이른 마당에 더욱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의료복지사업은 가난한 지역에 선교사로 파견된 성직자가 감히 엄두를 낼 처지의 일이 아니다. 선뜻 나서기도 어렵다. 맥그린치의 말대로라면 “나는 단지 멍석만 깔아 놓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봉사로 이루어진 명품”이라는 것이다. 이시돌 의원에 대한 이야기는 각종의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에 근무했던 분들의 기억과 지역주민들의 증언 등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림에 가면 이시돌 병원에 대한 추억이 없는 분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한 때는 그 마을의 ‘제주의 의료메카’였다. 이시돌 의원의 개원 준비작업부터 일을 하고 그
한림수직, 명성을 얻다 이봉선 할머니 이야기다 이봉선(79) 할머니는 한림읍 한수리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장애가 약간 있었다. 그렇지만 큰 불편이 없었다. 할머니는 25세에 이시돌과 첫 인연을 맺었다. 한림수직을 시작할 때 창립멤버 5인 중 한사람이다. 할머니는 한림수직을 처음 열 때 기본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아일랜드수녀회 로사리 수녀와 35년간 한림수직에 근무하였다. 그리고 정년인 60세까지 일했다. 그래선지 기억은 생생했다. 맥그린치 신부 고향에서 들여온 수직기구·기계에 대한 기억도 생생했다. 처음에는 한림에서 키운 양에서 털을 뽑아내 실을 만들고 이를 물감을 입혔다. 그런데 물감을 입히는 일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았다. 이 기술을 당시 맥그린치 신부와 성당 일에 열성이던 임춘호씨가 뭍에 가서 배워왔다. 기술전수를 위해 제주에 온 아일랜드 수녀들도 취미로 수를 놓았을 뿐이지 전문가 수준은 아니었다. 염색기술까진 없었던 것이다. ▲ 1960년대 한림수직 여성들이 직물수직 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시로 맥그린치와 수녀들은 서울 등지 전문학원을 찾아가 기술을 익혔다. 처음엔 서툰 솜씨탓에 엉성했지만 갈수록 제 품질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 노구를 이끌고 현장에 나와 말을 이어가는 맥그린치 신부 이달 9일의 일이다. 한림체육관에서 맥그린치 신부를 되돌아봤다, '제주를 사랑한 푸른 눈의 신부‘란 주제로 맥그린치 신부에 대한 회고대회를 열었다. 맥그린치 신부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제주특별자치도와 한림읍이 후원했다. 대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장인 양진건 교수가 수고했다. 진행 사회는 제주MBC 라디오의 최장수 프로그램인 ’돌하르방 어디로 감수과‘의 양기훈씨가 맡았다. 회고에는 다섯 명이 나섰다. 이시돌 병원의 추억에 김수렬씨와 장창두씨가, 양돈업에 신부삼씨, 한림수직에 이봉선씨, 4H 활동에 남상민씨다. 하지만 정작 맥그린치 신부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나서는 게 아무래도 스스로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것 같아 마뜩치 않았던 모양이다. 더욱이 오늘날 이시돌협회의 성장이 스스로 혼자 일궈낸 성과가 아니란 이유였다. 기념사업회에선 이시돌협회와 동고동락한 이들의 회고전이란 이유를 들어 그를 졸랐다. 어렵사리 응낙한 그는 절대 화려하게 하지 말 것, 돈을 쓰지 말 것, 내 사진을 크게 하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대고 마지못해 그
▲ 이시돌 목장에 방목주인 소떼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의 들녘에 있는 검은 돌담을 보면서 농부들이 얼마나 어럽게 일을 하고 있는지를 느꼈다. 그는 농부들이 조랑말로 경작하는 것을 보면서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였다. 씨가 뿌려지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땅이 굳어질 때까지 조랑말 주위를 졸졸 따라 다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맥그린치는 “황소가 끄는 쟁기로 흙을 파는 것을 본다면 아마도 당신은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마지못해 느릿느릿 움직이는 소 뒤에서 힘겹게 쟁기를 미는 농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걸 보며, 말 그대로 가족부양을 위해 애쓰는 걸 보다보면 그저 동정보다 “생활이 왜 이리 고단해야 할까” 화가 치밀지도 모른다. 맥그린치는 “고생덩이 농사가 아닌 좀 더 쉬운 농법은 없을까”를 고민했다. 그 방법을 제시한 기관이 세계적인 해외 원조기관인 옥스팜(Oxfarm)이었다. 그들은 맥그린치에게 트랙터와 쟁기원판 등을 살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첫 번째 원조로 받은 트랙터가 도착하자마자 조작에 서툰 운전사 탓으로 한 소년이 다쳤다
도민들에게 돼지 사육법을 가르쳐 준 맥그린치는 이제 닭 사육법을 알려줘야 했다. 병에 걸린 닭을 격리하지 않아 손실을 보던 주민들이었다. 맥그린치는 그 방법을 몸소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는 12피트 넓이와 42피이트 길이로 돌로 집을 만들어서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방향은 하루 종일 햇볕이 들게 하기 위해 남향으로 했고 앞에는 큰 유리창을 달았다. 우리는 암탉 20마리와 나무로 된 부화기를 가지고 시작했다. 첫해에는 그렇게 썩 잘되지 않았다. 뉴케슬(Newcastle)병이 돌아 우리는 200마리의 병아리를 잃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해에 800마리의 병아리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해에는 2,000마리를 생산해 내었다. 우리는 더 많은 부하기를 설치하여 더 많은 병아리들을 계속 생산해 나갔다. 그리고 품종의 좋은 병아리를 얻기 위하여 순종 뉴햄프셔와 순종 레그혼 200마리를 길렀다. 여기에서도 돼지 분양과 마찬가지로 병아리 하나를 무상분양받은 회원들은 그 병아리가 커서 달걀을 낳으면 각 병아리당 2개를 가져오도록 하였고, 이것으로 역시 더 많은 병아리를 생산하고, 다시 분양을 거듭했다.” ▲ 한림으로 면양을 들여오던 장면이다
▲ 그 시절 농부들이 수확을 하는 장면이다 일이 잘 되기 시작했다. 미 공군은 제주도(모슬포)에도 기지가 있었는데 미 공군 군목인 죠지(George B. Gerner, 군산미군공군기지 군목도 겸하고 있었음)는 제주도의 긴박한 필요성을 알고 가톨릭 병사들과 함께 십만 달러를 모금, 송금해 주었다. 그 결과 맥그린치 신부는 한림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 고산에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 귀덕에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가톨릭 신자가 3000명이 됐다. 당시 맥그린치는 미국 가톨릭 원조단체에 의해 지원된 음식과 옷을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무상 원조방식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농부와 어부, 공무원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주민의 생활수준을 높일 것인가에 대하여 끊임없는 토론을 했다. 교사와 사업가들과 하던 토론도 줄곧 그 주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비관적이었다. 맥그린치는 그 시절 제주도민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자본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해결 능력과 그 방법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향 아일랜드의 농업에 비해 이곳 주민들의 농사기
▲ 이시돌 목장내 조형물 연재를 다시 시작한다. 선거·정치의 계절엔 잠시 피하는 게 도리이고, 또 읽히지 않을 소재라고 봤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연재를 좀 더 객관화 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이시돌 목장과 맥그린치 신부, 지역주민들의 노력을 살려봤다. 이 글은 제주가톨릭교구 초대 교구장인 하롤드 대주교의 일대기인 <동방의 빛>에서 발췌하였다. 이 책은 에드워드 피셔가 저술하였으며, 이를 1989년 10월8일 광주소재 가톨릭센타에 있는 빚고을출판사에서 백선진님에 의하여 번역, 출판됐다. 282페이지에 거쳐 27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광주교구 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의 추천사가 실렸다. 그리고 미국 뉴포트(Newport)의 대주교인 쉰(Fulton J. Sheen) 신부의 서문으로 미뤄 미국에서 출판되었다고 생각된다. 1989년 교황 바오로 2세의 한국방문을 기념, 출판됐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어느 수녀님의 도움으로 이 책을 구하여 옮긴다. 그동안의 연재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번역된 글이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약간씩 고쳤음을 밝혀 둔다. ▲ 이시돌 목장을 일군 4
국립 송당목장이 헤매고 있을 무렵 제주도내 반대편에선 조용한 성공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뒤를 이어 그의 실패를 거울 삼아 성공을 일구고 싶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노심초사 해답을 찾던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축산업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꾼 일대 사건이 터졌다. 맥그린치 신부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목장관(觀)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 맥그린치 신부는 1972년 6월5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월간경제동향회의에서 이시돌 목장의 건설과 운영현황을 보고, 박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지난 연재에서 이미 소개했던 내용이다. 이날 회의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축산개발의 공로를 기려 맥그린치 신부에게 석답산업훈장을 수여했다. 뿐만 아니라 맥그린치 신부의 숙원사업인 이시돌 목장에서 한림항까지 14㎞를 새마을 사업으로 포장해 주도록 지시까지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축산은 소와 말, 양들을 야산에 풀어 놓고 그것을 가둬 기를 수 있는 축사나 관리사만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박 대통령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람이 한림 이시돌 목장의 맥그린치 신부였다. 맥그린치 신부의 보고를 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