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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6)

 

 

연재를 다시 시작한다. 선거·정치의 계절엔 잠시 피하는 게 도리이고, 또 읽히지 않을 소재라고 봤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연재를 좀 더 객관화 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이시돌 목장과 맥그린치 신부, 지역주민들의 노력을 살려봤다. 이 글은 제주가톨릭교구 초대 교구장인 하롤드 대주교의 일대기인 <동방의 빛>에서 발췌하였다. 이 책은 에드워드 피셔가 저술하였으며, 이를 1989년 10월8일 광주소재 가톨릭센타에 있는 빚고을출판사에서 백선진님에 의하여 번역, 출판됐다.

 

282페이지에 거쳐 27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광주교구 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의 추천사가 실렸다. 그리고 미국 뉴포트(Newport)의 대주교인 쉰(Fulton J. Sheen) 신부의 서문으로 미뤄 미국에서 출판되었다고 생각된다. 1989년 교황 바오로 2세의 한국방문을 기념, 출판됐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어느 수녀님의 도움으로 이 책을 구하여 옮긴다. 그동안의 연재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번역된 글이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약간씩 고쳤음을 밝혀 둔다.

 

 

헨리 대주교가 자립을 도운 가장 극적인 사건은 남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제주도에서 생긴다. 중심인물은 아일랜드 도네갈 주 출신의 훤칠하고 금발머리를 가진 맥그린치(Patrick J. McGlinchey) 신부다. 그는 세 명의 새로 임명된 사제들과 함께 1953년 4월 14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한국에 들어온 첫 골롬반 신부들이었다. 그들이 탄 비행기가 활주로 아래로 속력을 낮추어 착륙할 때 동시에 양 쪽에서는 B-17 폭격기들이 날아다니고 착륙한 주변에는 폭탄이 가득 찬 창고들이 즐비해 있었다. 6,25 전쟁의 와중이기 때문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목포에서 여러 달 동안 한국어를 배우느라고 씨름하였다. 그리고 순천에서 잠깐 동안 보좌신부로 근무했다. 그 젊은 신부가 채 일년을 지내기도 전에 헨리 대주교는 제주도 한림에 초대 본당 신부로 보냈다. 헨리 대 주교는 맥그린치 신부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제주도 주민들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줄 자질이 충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맥그린치가 한림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에 온지 만 1년이 되는 1954년 4월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는 4·3으로 불타버린 마을과 황량한 벌판, 그리고 처절하리 만큼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말했다. “나는 배고픈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면 무릎을 끊으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땅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주민들을 설득한다. 경작하고 기도하는 두 가지 일을 위해 왜 무릎을 끊지 않는가(일을 하지 않느냐고).”

 

그가 쓸 성당은 조그만한 오두막이었는데 크기가 10피트⨯24피트(약 6.6평)정도였다. 여기에 방 두 개가 있는데 이중 하나는 전교사인 김 마리와 남편이 사용했고, 하나는 맥그린치가 사용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성당을 건축하려고 사 두었던 근처의 토지를 보러 나갔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 당시 신자가 24명이었는데, 이들과 함께 성당이 신축될 때까지 땅을 놀리지 말고 작물을 심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의 주머니에는 부임할 때 헨리 대주교가 준 미화 1천 달러가 있었다. 그 돈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맥그린치 신부는 상세하게 설명을 하여 주었다.

 

“그 당시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고 공산주의자(월맹군)들은 하노이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었다. 미국은 폭탄과 무기를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에 지원하고 있었다. 미군은 이를 위하여 일본과 인도차이나를 왕복할 목적으로 특별히 건조된 산 마태오(San Mateo)라는 9,000톤짜리 화물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배는 1954년 4월 또 다른 무기를 싣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다가 레이더 장치의 고장으로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에 한림성당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에 전속력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그 산 마태오의 재난은 우리가 성당을 짓기 위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이었다. 그 배는 선체에 큰 구멍이 난 채로 꼬박 한달 동안 바위틈에 끼어 있었다. 미군은 그 배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기 때문에 구출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잠수부 팀은 그 배를 빼내기 위해서 바위를 폭발시키느라 하루 종일 일했다. 그때 나는 자주 뱃전에 나가 그곳 관리인들과 친했다. 배에는 폭탄을 얹기 위해 사용된 목재로 된 바닥재가 많았다. 산 마태오를 바다로 빼낼 수 있을 때가 되면 아래 선창은 물론 가득차게 될 것이며, 모든 목재는 물에 젖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인 미국의 관대함을 보이며 내가 가질 수 있을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그때 내가 그 목재를 나르기 위하여 주민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자 스스로 많은 비신자들이 위험한 바위를 지나 무거운 선목을 열심히 날라주었다."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글.번역=양영철/ 17편으로 이어집니다>

 

하롤드 헨리(Henry, W. Harold; 1909∼1976) 대주교

 

=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선교사, 대주교. 제5대 광주(光州) 대교구장, 초대 제주(濟州)교구장. 한국명은 현해(玄海). 미국 미네소타주 노드필드(North Field)에서 출생. 미국에서 골룸바노 신학교와 밀턴대학을 졸업한 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포교지가 한국으로 바뀌어 1933년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 한국어와 한국풍속을 익히고 1934년 전남 노안본당 보좌신부, 1935년 전남 나주본당 주임신부를 역임했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日帝)당국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강제 추방된 뒤 1943년 미(美) 육군에 입대, 유럽에서 군종신부로 사목하였다. 1945년 군에서 제대하고 1947년 한국에 재입국, 광주교구 경리부장을 거쳐 1950년 6.25동란으로 광주교구장 브레난(Brennan) 몬시뇰이 북한공산군에게 납치되자 광주교구장서리 겸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광주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1954년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5월 1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뒤 1962년 3월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어 서울 · 광주 · 대구 등 3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1971년 제주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제주 교구장으로 전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제주교구의 교세 신장에 힘쓰는 한편 광주교구장 시절부터 힘써 온 교육 · 의료 · 사회개발 분야에 걸친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하였다. 1976년 3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 유해는 제주도의 첫 순교자들이 묻힌 황사평(黃沙坪)에 안장되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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