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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5)

국립 송당목장이 헤매고 있을 무렵 제주도내 반대편에선 조용한 성공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뒤를 이어 그의 실패를 거울 삼아 성공을 일구고 싶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노심초사 해답을 찾던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축산업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꾼 일대 사건이 터졌다. 맥그린치 신부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목장관(觀)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1972년 6월5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월간경제동향회의에서 이시돌 목장의 건설과 운영현황을 보고, 박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지난 연재에서 이미 소개했던 내용이다. 이날 회의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축산개발의 공로를 기려 맥그린치 신부에게 석답산업훈장을 수여했다. 뿐만 아니라 맥그린치 신부의 숙원사업인 이시돌 목장에서 한림항까지 14㎞를 새마을 사업으로 포장해 주도록 지시까지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축산은 소와 말, 양들을 야산에 풀어 놓고 그것을 가둬 기를 수 있는 축사나 관리사만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박 대통령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람이 한림 이시돌 목장의 맥그린치 신부였다. 맥그린치 신부의 보고를 듣고 박정희 대통령은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자신이 그토록 관심과 지원을 기울여도 진전을 보지 못했던 축산이 내국인도 아닌, 외국인 신부가 대규모 목장을 만들어 성공해내고 있다는 데에 자존심이 매우 상한 것이다. 이후 박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국인 신부가 우리나라에 와서 목장을 성공시키는 마당에 도대체 우리 축산은 지금까지 초지 하나 개발하지 못하고 뭐 있느냐"며 개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맥그린치 신부와 약속한 대로 1973년 2월 17일 오전 이시돌 목장을 직접 방문한다. 이시돌 방문 전날에 제주도청에서 이승택 도지사로부터 도정 현황을 보고 받았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은 업무보고를 끝낸 이승택 지사에게 "제주도가 앞으로 축산진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야산에 소들을 풀어놓아 기르는 재래식 가축사육방식인 방목을 점차 줄여나가고 목초재배에 힘써나가야 한다. 방목은 몇 백 년 전의 유목민들이나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지금은 목초재배만이 축산을 진흥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한림 이시돌목장과 협업목장의 초지조성 성공사례를 하나하나 예를 들면서 "제주축산은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것을 진드기가 있어서 안 된다는 소리만 하고 들과 산에 불이나 지르고 있으면 되겠는가. 대학의 농대와 농고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새로운 축산방법을 교육시키고 축산농가에게도 목초재배기술을 보급시켜 축산개발에 힘쓰라"고 강한 어조로 지시했다. 맥그린치 신부가 운영하는 이시돌 방식으로 초지조성과 목장영을 완벽히 전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한 날은 겨울 비가 내려 길이 매우 질퍽거렸다. 대통령이 탄 관용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한 끝에 겨우 목장에 다다를 정도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주저함이 없었다. 형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4시간동안 목장 곳곳을 살폈다. 냄새가 나는 돈사에도 들어가 돼지들을 살폈다. 그 시절 야화가 있다. 대통령이 돈사에서 큰 돼지가 새끼 10마리를 낳아서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대통령은 이것을 가만히 보면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 때 카메라 기자가 그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 소리에 어미 돼지가 깜작 놀라서 뛰어 다녔다. 젖을 먹고 있는 새끼들도 놀래서 날뛰었다.

 

대통령도 당황했다. “사진을 찍지 말라”며 대통령이 사진사에게 진노했다. 그 사진사는 얼론 자리를 피했다. 박 대통령은 나중 밖에 나가서도 “돈사에서는 사진을 절대 찍어선 안된다”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애국심은 물론 농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맥그린치 신부의 박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저녁 제주관광호텔(지금의 하니관광호텔)에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맥그린치에게 말했다. 저녁무렵 식사자리엔 동행한 내무, 농림, 건설, 교육부 장관과 경제수석비서관, 그리고 이승택 제주도지사가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은 맥그린치에게 자기 옆에 앉으라고 했다. “감명을 많이 받았다”고 넌지시 말하더니 도와 줄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것이었다. 맥그린치는 우선 목장에서 한림 항으로 가는 길을 조속히 포장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에게 즉시 지시했다.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하라고 했다. 그러더니 박 대통령은 또 없느냐고 되물었다. 맥그린치가 전기가 없어 불편하다고 말을 붙여봤다. 박 대통령은 전기 없이 어떻게 그 많은 가축을 키우겠냐고 하면서 전기를 바로 설치해 줄 것도 지시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박 대톨려은 또 없느냐고 물었다. 맥그린치는 무안하기도 했지만 “기회는 이 때다”라고 생각했다. 전화가 없다고 했다. 역시 정부예산으로 전화선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시돌은 박 대통령 덕에 중요 인프라를 다 갖췄다. 질퍽질퍽한 비포장 도로가 지척에 널린 때였다. 포장도로라고 한다손 치더라도 제주에선 공항에서 제주시내로 가는 길이나 5·16도로가 고작인 때였다. 그렇기에 한림항에서 이시돌 목장 사이에 도로를 닦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렇게 ‘통 큰’ 지원을 한 덕인지 이시돌은 뒤를 이어 성공스토리를 더 쓰기 시작했다. <글=양영철/ 16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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