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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22)

성 이시돌 의원( 이하 ‘이시돌 의원’-통상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현재는 이시돌 복지의원) 얘기다.

 

그러고보니 맥그린치 신부가 한 일을 열거하자니 끝이 없다. 축산 근대화와 목장개간, 신용협동조합, 직물사업에 이어 의료복지에까지 손을 뻗친 그를 생각하면 솔직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이시돌의원은 그를 떠올리면 꼭 기억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병원다. 그가 제주에서 60년 생을 보냈고,  이제 80 중반의 노구에 이른 마당에 더욱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의료복지사업은 가난한 지역에 선교사로 파견된 성직자가 감히 엄두를 낼 처지의 일이 아니다. 선뜻 나서기도 어렵다. 맥그린치의 말대로라면 “나는 단지 멍석만 깔아 놓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봉사로 이루어진 명품”이라는 것이다.

 

이시돌 의원에 대한 이야기는 각종의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에 근무했던 분들의 기억과 지역주민들의 증언 등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림에 가면 이시돌 병원에 대한 추억이 없는 분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한 때는 그 마을의 ‘제주의 의료메카’였다. 이시돌 의원의 개원 준비작업부터 일을 하고 그 병원에서 정년을 마무리 한 김성택(69·제주시 한림읍)씨의 기억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분과의 대담은 2014년 10월 14일 점심식사를 겸해 약 2시간 30분 동안 이뤄졌다.

 

반주까지 곁들인 점심이다보니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평생을 이시돌의원에 몸 바친 그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다. 그는 한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잠시 몸을 두다가 제주시 건축직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한 수녀가 의료분야에서 공부를 해 볼 의향이 없느냐는 말을 듣고 이시돌 의원에 몸을 담궜다. 솔깃한 마음에 나선 일이 인생을 바꾼 것이다. 그의 나이 20대 초반에 의료봉사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4월 한림에 부임하자마자 의사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지역현실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 한 첩, 주사 한 대로 살아날 사람들이 어이없이 저승길로 떠나거나 불구의 몸이 되는 현실을 보며 땅을 치도록 가슴이 아팠다. 당시 제주 전역을 통틀어 의사숫자는 고작 40여명. 그것도 피난길에 제주에 몸을 잠시 의탁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떠나는 형편이었고 물론 제주는 의료사각지대였다. 물론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없었다. 1957년 제주시에 세워진 제주도립병원이 제주도내에 있는 유일한 종합병원이었다. 그후 한참을 지나 1964년도에야 따로 문을 여는 전문의가 나타났고, 1969년 제주 첫 민간병원인 나사로 병원이 문을 열었다. 너무도 열악한 제주의 의료시설 환경이었다.

 

제주의 중심지인 제주시가 그 정도였다. 그럴진대 농촌인 한림은 더 이상 거론할 수준이 아니었다. 한림에서 환자가 생기면 제주시내 병원으로 가야하는데 제주시로 가는 길은 지금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보다 더 어렵고 멀었다. 물론 의료보험이라곤 꿈도 꾸지 않던 때다. 몸이 아파도 돈이 없기에 병원은 한 마디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찌보면 맥그린치 신부가 병원을 세우겠다는 결심을 한 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한림주민들이 쉽게 갈 수 있고, 돈이 없어도 찾아 갈 수 있는 병원이 그의 목표이자 구상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어려운 병원 설립이 그 때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

 

맥그린치 신부는 같은 아일랜드계인 골롬반 수녀회를 찾아 갔다. 골롬반 수녀회는 목포에서 성 골롬반병원을 이미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전남교구 대주교로 있던 헨리 신부가 역시 골롬반 출신이어서 일은 잘 풀려가기 시작했다. 시설과 이에 따른 비용은 이시돌 농촌개발협회(이하 ‘이시돌 협회’)가 책임을 지고 운영은 골롬반 수녀회가 맡기로 했다. 지금으로 치면 이른바 위탁운영·경영이다.

 

골롬반 수녀회는 1968년부터 준비단을 만들고 개원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필요한 인력이 의사와 간호사, X레이 기사, 임상병리사, 간호보조원이었다. 필요인력 중 의사와 간호사는 목포 성골롬반 병원에서 파견받기로 하였다. 나머지 인력인 X레이 기사와 임상병리사, 간호보조사는 제주 현지에서 뽑아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이 때 선발된 분이 김성택씨다. 그는 방사선 기사로 선발돼 2년간 목포 성골롬반 병원에서 연수와 교육을 받은 후에 국가고시에 합격, 당당하게 기사자격증을 땄다. 방사선 기사 등록번호가 811호다. 우리나라 811번째 방사선 기사란 의미다. 제주에서는 6번째이니 귀한 몸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간호보조사 2명도 여기에서 훈련을 받아 자격증을 받고 한림으로 돌아왔다. 임상병리사는 찾지 못해 병원을 개원한 지 5년 뒤 1명을 선발, 원주 기독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돌아왔다.

 

이시돌 의원은 1970년 4월 1일 개원했다. 초대 원장에는 목포 성골롬반 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수녀 의사인 베넥누수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했다. 간호사는 역시 그 병원에 근무하던 말타 수녀가 맡았다. 1971년에 제주도내 간호사가 의사보다 적은 28명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개원 당시 직원은 14명. 남자 직원은 방사선 기사인 김성택씨가 유일했다. 베넥누수 원장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한국 의사시험에 합격, 의사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병원은 개원과 동시에 환자로 미어터졌다. 전도에서 몰려들었다. 심지어 병원 주변 여인숙에 아예 묵을 곳을 만들고 접수순번을 기다릴 정도였다. 지금의 이시돌복지의원의 장창두 과장에 따르면 하루에 수백 명이 찾아 왔지만 진료를 다 못할 정도였다. 하루 130명에 육박했다고 그는 당시를 기억했다. 김성택씨는 그 이유를 두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제주도내에 병원이 드물어 병원에 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료비가 쌌고, 돈이 없는 환자들은 아예 무료진료를 해줬다.

 

두 번째 이유론 약이 좋았다. 약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선진 신약이었고, 약 복용이 흔하지 않을 때라 항생제 ‘약발’도 잘 들었다. 물론 우리나라에 약다운 약이 없던 시절이다.

 

그런 기억은 필자에게도 있다. 당시 중학생이던 필자도 심한 두통을 치료하기 위하여 서귀포에서 한림까지 갔다. 접수를 하고자 병원 옆 여인숙에서 어머니와 함께 머무른 건 필자도 같은 기억이다.

 

끼니를 거르며 진료에 매진했던 원장 수녀는 결국 3년만에 피로가 겹쳐 쓰러졌다. 더 이상 진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고향 아일랜드로 귀국하였다. 곧이어 역시 목포 성골롬반 병원에서 진료하던 파멜라 수녀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분 역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병을 얻어 귀국길에 올랐다. <23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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