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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26.끝)

 

신용협동조합 제주도연합회가 1995년 2월 <제주도신협 30년사>를 발간하였다. 세계의 협동조합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용조합의 세계화 되는 과정을 소상하게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한국에서의 신용협동조합의 역사에 이어 제주도내의 금융산업의 발달과정과 함께 제주도 신용협동조합의 30년 역사를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첫 머리는 2페이지에 걸쳐 세 사람의 인물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가장 큰 사진은 우리나라에 신용협동조합의 선구자격 메리가별 수녀(Mary Gabriella Mullherin) 사진이다.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김정민 회장, 맥그린치 신부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제주신협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제민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는데 앞장섰던 현학순 제주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메리가별 수녀가 한림신용협동조합 설립을 권유했고, 맥그린치 신부가 이를 받아들여 신용협동조합의 씨를 뿌렸고, 그리고 김정민 회장은 이를 잘 가꾸어 단 기간에 전국 최고의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내에 신용협동조합을 뿌리내리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김정민 회장은 이화여대 사범대학을 나와 한림공고에서 교사를 하던 보기 드문 엘리트였다. 김정민 선생은 이 때부터 신협 일에 혼신을 다하여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교사생활에, 저녁에는 중앙에 공문 보내는 일에서부터, 재무보고서 작성 등 궂은 일은 모두 도맡아서 했다. 나중에 장학사 직도 그만 두고 신협 일에 혼신을 다하였다.

 

김정민 회장은 한림신협이 출발할 때부터 회계이사로 선출되어 이후 이사장을 거쳐 10년간 신용협동조합제주도연합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제주도 신용협동조합의 토대를 만들었다. 현학순 교수의 회고다.

한림신용협동조합(이하“한림신협”)의 출발과정을 살펴본다.

지금도 한림지역의 고령층 주민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옛 시절을 말한다. 1950·60년대 얘기다. 못 먹었던 이야기는 단골이지만 그 중에 돈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돈이 없기에 돈에 대한 사연이 있을 리 없다.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제주도에 와서 보니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데 돈이 아니라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는 소위 물물교환 방식이 주였다고 회고한다. 한국은행의 통계를 보면 제주도에 얼마나 돈이 없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1965년 제주도내 은행 예금 총액은 5억원이었다. 전국의 785억인 점을 고려하면 0.6%에 불과하다. 이 시기에 제주도내 은행 대출액은 11억에 불과했다.

 

1970년이 되어도 제주도내 예금 총액은 57억이다. 전국이 7840억인데 역시 0.6%수준이다. 1970년 1인당 연간 소득이 6만6000원이었느니 어디 저축할 돈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돈이 꼭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사업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경조사나 학비 등 불가피한 일에는 할 수 없이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자녀들 교육을 위해 유일한 재산인 밭도 파는 지역은 제주도에나 볼 수 있지 자신의 동네나 유럽,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을 하였다.

 

1960년대 한림에는 은행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저축의 한 수단으로 매달 돈을 내고 정해진 순서가 되면 목돈을 타는 일종의 적금 같은 계를 이용하여 돈을 모았다. 그러나 계를 조직한 사람이 망하면 곗돈을 부었던 사람들은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떼이는 경가 많았다. 그래서 그 충격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성당의 신자가 곗돈을 떼이고 한 푼도 찾을 수 없게 되자 자살하는 일이 일어났다. 충격이었다. 또 그 당시에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던 시절이다. 연 40%에 이르는 고리 이자를 물면서 개인에게 돈을 빌려다 쓰는 일이 허다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사람들이 돈을 안전하게 맡기고 또 싼 이자에 꾸어 쓸 수 있는 은행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은행을 설립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우연히 부산에서 구호활동을 하면서 1960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신협인 ‘성가신용조합’ 을 설립한 메리가별 수녀를 만나게 되었다. 메리가별 수녀는 한국이야 말로 신협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홍보조직인 ‘협동조합 교도봉사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신협 설립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메리가별 수녀의 설명을 듣고 맥그린치 신부는 “옷이 없어 가지 못하겠다”는 한림성당의 신자인 홍성묵, 문제헌 씨를 설득했다. 부산에 가서 9일 간 (1962.2.24~3.3) 신협에 대하여 집중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해 5월 5일부터 5일간 국내 최고 신협전문가이자 교도봉사회 소속인 박희섭씨와 이상호씨가 한림성당에 직접 내려와 신자들을 대상으로 집중교육을 시켰다. 교육이 끝나자 마자 이 두 전문가의 지도로 창립총회를 가졌다. 제주도에 최초의 신협이 탄생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7번째였고, 도시가 아닌 농촌지역으로서는 제1호 신용협동조합이다.

 

전깃불도 없던 시절 창립총회는 촛불 조명으로 새벽 2시 끝났다. 맥그린치 신부는 출장관계로 보좌신부를 보내 축사를 하도록 하였고, 회원들이 스스로 임원들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초대 이사장에 임춘호씨가 선출되었다. 당시 정한 규정을 보면, 저축하는 날과 시간은 1주일에 1회, 매주 일요일 미사 후에 하기로 하고 저축하는 장소는 천주교 한림교회 회의실 한편에 하는 것으로 정했다. 당시에 여신위원으로 선출되었던 신희자 여사의 회고다. 지금 80을 바라보는 신 여사는 현재도 한림성당 앞에서 한복 짓는 일을 한다. 지금까지 50년 동안 하는 일이다. 그 날 일들을 눈에 선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한림신협은 출발은 했지만 사무실은 없어 처음에는 한림성당 한 구석에 저축할 때만 간이사무실이 마련됐다. 그러다가 훗날 이시돌협회 사무실 한 쪽에 책상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여신위원으로 선출돼 대출받고 돈을 제 때에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사정도 듣고 돈도 갚도록 하는 역할에서 한림신협 홍보까지 도맡았다고 한다. 별 다른 급료도 받지 않고 한 일이다.

 

초창기에는 모든 회원, 특히 한림성당 신자회원들이 모두 봉사자인 동시에 직원 역할을 하면서 한림신협을 정상으로 올려놓았다고 추억처럼 말했다.

사실 초기 신협 설립과 운영에 대해 많은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의 걱정과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맥그린치 신부는 의지를 꺾지 않았고, 오랜 시간동안 신용협동조합의 상부상조 정신과 소액 저축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림 신용협동조합이 자리를 잡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럴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당시 신자들이 워낙 가난하였기 때문에 신협에 맡길 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가 너무 적어 아무리 돈을 모아도 돈을 꾸어 갈 조합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결국 조합원의 자격을 천주교 신자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으로 넓히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림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한 지 6년 만에 뿌리가 박히기 시작했다. 조합원 수와 자산이 늘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융자해 줄 수 있게 됐다. 그런 성과를 내기 까지 “김정민 선생의 노고가 대단히 많았다”고 맥그린치 신부는 그 업적을 김정민 선생에게 돌렸다.

 

한림신협이 성공하자 1년 후 두 번째 신협인 ‘제주천주교 신용협동조합’(현 제주중앙신협)에 이어 한림중고교 신협, 한경평화신협, 서귀포 신협 등으로 신협 붐이 일었다. 지금은 경영난으로 사라져 버린 한림신협을 보면서 맥그린치 신부는 ‘만인은 1인을 위하여, 1인은 만인을 위하여’라는 신협정신을 잊어 버렸기에 그런 아쉬운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적은 돈을 많은 사람들이 모아 다시 적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대출해 주어야 하는 데, 큰 돈을 몇 사람들에게만 대출해 주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다.

 

근대축산과 주민주도 개발, 수직으로 소득은 물론 고용까지 창출, 신용조합 등 금융사업 수완, 그것도 모자라 병원은 물론 호스피스 복지사업까지 -. 

 

우리 제주도가 맥그린치 신부에게 진 빚은 수도 없이 많다. <끝>

 

** 지금까지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연재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그동안의 연재와 관련, 맥그린치 신부와의 독점 인터뷰를 게재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제주정착 60년이 되는 2014년 말엔 아일랜드 대통령이 대통령 훈장을 추서했고, 협성문화재단이 사회봉사부문 상을, 제주MBC가 자랑스런 제주인상을 시상한데 이어 대한민국 정부 역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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