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이 그 회의장에 들어설 때 표면적으로는 영수로 대접했지만 유소기, 등소평과 그 그룹의 마음속에는 이미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들은 의기투합해 있었다. 순서대로 하나씩 진행하고 있었다. 모택동이 들어오자 모두 곤란해 하는 게 분명하였다. 태도가 부자연스러웠다. 자신들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신들을 불신임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자신들을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즐겁게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집안어른을 갑자기 만난 듯한 태도였다. 어쩔 수 없이 존중은 하지만 뼈 속 깊이에서는 눈이 빠지게 자신들을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모택동은 당시 유소기 일당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읽었다. 사나운 얼굴빛과 목소리로 발언하는 도중, 내내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겉으로만 존중하고 있었다. 유소기는 내내 연필을 손등에 올려놓고 돌리고 있었다. 눈빛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면만 응시하였다. 등소평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말을 듣는 듯이 보였다. 때때로 고개를 숙여 손에 들고 있던 자료에 몇 글자 적기도 했지만 사실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준이회의(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중요한 편지가 한 장 있다. ‘문혁’ 초기 모택동(毛澤東)이 강청(江靑)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다. 1966년 7월 8일, 모택동이 소산(韶山) 적수동(滴水洞)에서 작성해 강청에게 보냈다. 모택동은 이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먼저 주은래(周恩來), 왕임중(王任重) 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주은래로 하여금 상해에 있는 강청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강청이 보고 난 후 주은래에게 또 그 편지를 대련(大連)에 있던 임표(林彪)에게 보내어 읽도록 하였다. 모택동의 일생 중 개인적으로 쓴 편지는 많지만 그렇게 길게 쓴 것은 없다. 그 편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감정을 써서 보낸 것이라 보기 어렵다. 모택동의 정견을 표현한 특수한 방법인 셈이다. 당시 중국 정치 형세에 대한 고민과 예측의 결과물이었다. 모택동은 그 편지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그리고 자기 내면의 남모르는 근심 등을 모두 써내려갔다. 모택동이 그 편지를 쓴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 이미 형성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사고의 방향을 강청에게 얘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로 &lsquo
비서 중 한 명이 주은래의 업무 스타일을 토로한 적이 있다. 주은래가 업무가 과중해 이틀씩이나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서 그 비서가 권했다. “총리님, 최고 지도자 중에 총리님이 가장 바쁘십니다. 이런 서류는 등소평 동지에게 보이시는 게…….” 주은래는 태양혈 위에 청량유를 바르고 계속 서류를 보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난 총리야. 이런 구체적인 일들은 내가 좀 더 처리해야 해. 등소평이는 더 큰 일을 처리해야지. 정책을 결정하는 일을 하여야 하는 거야.” 주은래가 위의 말을 한 시기는 신중국이 들어선 후 환란을 겪던 해였다. 그때도 주은래는 등소평이 “큰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통솔 능력이 있는 인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주은래가 처리하였던 일 중 어떤 일은 부장, 국장조차 거들떠 볼 가치도 없는 자질구레한 일도 있었다. 주은래는 관여하기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세밀하였고 성실하였다. 모택동이 그런 사실을 듣고서는 많은 사람 앞에서 감격해하며 말한 적이 있었다. &ldquo
처음은 잡담 수준이었는데 점차 광범위한 내용까지 얘기하게 되었다. 주은래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민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박일파 동지, 당신이 진기로예(晉冀魯豫, 산시성,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에서 유백승(劉伯承), 등소평과 함께 여러 해를 보냈는데, 그 두 명의 업무 처리능력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박일파가 말했다. “업무를 하는데 둘의 호흡이 참 잘 맞습디다. 확실히 한 마음 한 뜻이요, 융합이 잘 되었죠.” 주은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내가 묻는 것은 그들이 협력했느냐가 아니고, 그들의 업무 방법이 어땠냐는 것이요?” 박일파는 농담 반 진담 반, 유머러스하게 스마트하게 반문하였다. “총리님, 당신은 경험이 많으신 지도자잖소. 그리고 그들과 알고 지낸지가 오래되었고. 총리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좋지.” 주은래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또 문제를 그대로 내게 되돌려 보내는구먼.” 박일파도 웃었다. “방울을 풀려면 방울을 단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잖습니까.
‘문화대혁명’시기 유소기를 무너뜨릴 때 이런 평가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중국의 동지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외국의 공산당원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평가를 함에 있어 전후가 모순된다는 것은 정치적 원인에 의한 것이지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님을. “둘째는 등소평.” 모택동은 두 번째 손가락을 꼽았다. 현장에 있던 동지들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명성이나 직무로 볼 때 분명 주은래를 꼽을 줄 알았는데 등소평을 먼저 꺼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정치성이 강하죠. 사원행방(四圓行方, 지식은 해박하고 다 갖춰져 있으며 일을 처리함에 정직하고 소홀히 하지 않음)이라 할까. 원칙성이 있으면서 융통성이 남다르고.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지요. 외유내강이지요. 발전성이 많아요.” 흐루쇼프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나도 그 사람 대단하다 느꼈어요. 쉽게 상대하지 못하겠더라고. 문제를 관찰하는 것도 예리하고…….” 흐루쇼프는 입을 다물고 손시늉을 하면서 확고하며 과단성이 있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모택동도 웃었다. 등소평
중국인들은 주은래(周恩來)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주은래(1898~1976),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전문가, 외교가, 당과 국가 주요 영도자 중 한 명, 중국인민해방군 주요 창건인 중 한 명,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원 원훈, 모택동(毛澤東)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의 제1대 중앙 영도 집단의 중요한 성원이다. 신중국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은 반세기 동안 ‘신성(神聖)’이 있었다고, 신(神)은 모택동(毛澤東)이요 성(聖)은 주은래(周恩來)라고. 그래 좋다, 모택동은 신단(神壇)을 세우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였던 것은 인정하자. 그럼, 주은래는? 성단(聖壇)을 만들려고 했거나 만들 수 있었을까? ‘단(壇)’을 만들어 그 둘을 초청한다면 인간세계로 내려와야 할 것인데. 그들의 위대함, 고명함, 영명함은 바라볼 뿐 결코 가까이 할 수는 없으리라. 그 둘은 살아있을 때 인민들과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죽어서는 민중과 융화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인민들이 예배하고 숭배하는 우상이 돼서는 안 될 일이다. 중국 오천년 문명사에서 ‘선양(禪讓
임표는 왜 도망가야만 했는가? 몇 가지 행적을 보면 임표는 원래 도망갈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어쩌면 임표는 운명이 주어지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결코 자아비판을 하지 않았다. 모택동이 마음대로 처리하면 어떻게 하냐고? 지가 알아서 하라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고 보인다. 다시 남쪽 광주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것도 단지 복안이었을 따름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광주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그의 ‘사대금강’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런 계획이 있었다면 계획을 잡은 이들은 섭군과 임립과였을 것이고. 임표도 동의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임표가 탔던 256호 비행기에 탑승한 것도 분명 수수께끼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북경의 임두두에게 알린 것은 분명한데 반응이 너무 늦었다. 왜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둘째, 북경에서는 임두두에게 256호 비행기를 타라고 하였을 텐데도 임두두는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셋째, 비행기를 몰았던 기장은 반경인(潘景寅)이다. 20세기 80년대에 등
임표는 모택동과 맞섰다. 결코 자아비판을 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치세학은 줄곧 성공한다. 요령 있게 통솔하였다. 정치적으로 위협되는 적이라 간주되는 상대는 끝내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곧바로 쓰러지거나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려야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모택동이 천하를 경영하는 데에 적수가 없었다. 그런데 ‘9.13사건’만은 예외였다. 모택동에게는 좌절이나 다름없었다. 왜 그럴까? 임표는 과묵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심계가 굳었다.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영웅주의자였다. 대만(臺灣) 군사기록 중 임표를 분석한 자료에는 임표를 지극히 도도한 개인주의자이고 영웅주의자이며 명예를 대단히 존중하였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 평가돼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오랫동안 전쟁하면서 임표와 몇 차례 교전을 경험한 대만 군인들이 임표에게 내린 평가는 상당히 믿을만한 근거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 평가처럼 임표는 스스로 존귀하다고 여겼다. 1967년 5월 1일, 임표가 천안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모택동을 만났을 때의 장면은 유명하다. 둘이 만났으면서도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임표는 시아누크(캄보디아의 전 국왕) 면전에서 버럭 화를 내고는 떠나버
임표(林彪, 1907.12~1971.9)는 일찍이 중공중앙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장, 중공중앙군위 제일부주석을 역임한 신중국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왜 모택동은 임표를 죽였을까? 임표의 ‘일호 명령’이 모택동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모택동은 임표가 가만히 있기를 바랐다. 그저 어떤 일에도 상관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어쩌면 더 나아가 자신이 시키는 일만 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1969년 ‘진보도사건’(3월 중·소 국경 우수리 강에 있는 진보도〔珍寶島, 러시아명 다만스키〕에서 일어난 양국 국경경비대의 무력 충돌사건) 이후 중소 양국 외교부장 담판이 있었다. 북경에서 담판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임표는 대단히 긴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일을 주관하기 시작한다. 그는 황영승(黃永勝)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국 비행장의 비행기를 은폐하고 전쟁 준비를 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군위(軍委)의 부총참모장 염중천(閻仲川)이 몇 글자를 더하여 임표 부주석의 ‘일호 명령’이라고 명명하였다. 큰 실수였다. 왜? 임표는 모택동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왕영승에게 통
모택동의 이러한 말은 어쩌면 그저 팽덕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 새로운 업무를 주고 “명예를 회복시키고” 동산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어쩌면 팽덕회가 여산회의에서 잘못된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하여 그저 핑계의 입바른 말일 따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자신의 입으로 기본적이나마 누명을 벗겨주는 말이었다. 팽덕회의 무죄를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에 대한 일, 보기에 과한 비판이었소. 잘못된 거지요. 몇 년 지내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분명 모택동이 초보적이나마 팽덕회의 누명을 벗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모택동의 그런 고심은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화대혁명’도 어쩌면 최소의 소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후의 일은 누구도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택동조차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풍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모택동이 팽덕회를 서남삼선으로 보내어 보호하려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팽덕회의 불행한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마귀의 손아귀는 풍우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지역까지 뻗혀나갔다. 오
중국학자의 서술을 원용하면 팽덕회(彭德懷, 1898.10~1974.11)는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 중 한 명이다. 덕망이 높은 무산계급혁명가요 군사전문가이며 정치가이다. 중국 개국 원훈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모택동은 팽덕회를 죽음으로 몰아갔는가? 모택동 만년의 성격은 호둣속 같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200년 인생을 자신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과거 행동에 대해서도 회의하거나 부정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1959년 여산회의와 그 이후 자신이 팽덕회에게 한 행위가 과했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요문원(姚文元) 등이 시작한 오함(吳晗) 등을 비판하는 운동이 결국은 팽덕회를 총알받이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해 진솔하면서도 자신과 수년을 생사고락을 함께하였던 전우를 보호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택동은 팽덕회를 서남삼선(西南三線, 운남〔雲南〕, 귀주〔貴州〕, 사천〔四川〕 3개성 전역이나 대부분, 호남〔湖南〕 서부, 호북〔湖北〕 서부) 업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문화대혁명 시기 예측하지 못할 군중의 핍박을 피하도록 안배한 것이라 좋은 평가를 내리는 부류도 있다. 과연 그럴까? 1965년 9
유소기는 여전히 자기 견해를 견지하면서 가르침을 받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 ‘파(派)’라는 걸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자본주의노선을 걷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소. 그러나 자산계급을 이미 모두 소멸됐잖소. 어찌 무슨 파(派)라고 까지 할 수 있겠소? 파를 얘기한다면 사람이 너무 많아야 될 것이오. 그럼 도처에 깔린 게 모두 적대적 모순이란 말이잖소. 석탄부, 금속 제련부 어디에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가 있다는 말이오?” 모택동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장림지(張霖之)가 바로 그요!” 유소기는 감히 다시 묻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서 모택동이 누군가를 지명하면 그 사람은 타도되어야했기 때문이었다. ‘문혁’이 시작되자마자 장림지는 맨 먼저 재난을 당했다. 비참한 고문과 혹형을 당했고 문혁 당일 새벽에 북경에서 몰매 맞아 죽었다. 문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문혁’이 진행되는 와중까지도 유소기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소. 우리가 하는 것은 사회주의‘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