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와서는 1대 여의손(呂義孫) 목사부터 286명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그중 문씨 성을 가진 목사는 두 분이다. 세조 때인 1465년에 부임한 문여량(文如良)과 중종 때인 1517년에 부임한 문계창(文繼昌)이다. 제주목사를 거쳐 직제학과 한성판윤에 이른 문여량이, 1466년 3월 행호군(行護軍)으로 제수되어 제주를 떠나니, 세상 사람들이 명환(名宦)이라 칭했다. 조선왕조실록은 1465년 9월 “제주 삼읍에서 호패를 내주는 일과 고을에 소속된 관창노비와 보충군들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누락되니, 입회하는 법관과 경차관을 시켜 대장 2통을 작성하여 각각 1통씩은 그 고을에 보관하고, 관청노비 1통은 도관에, 보충군대장 1통은 병조에 보내어, 뒷날에 근거로 삼을 수 있도록 지시한 내용을 문여량 목사가 잘 이행했다.”라고 전한다. 다음은 문계창 목사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제주목사는 왜적을 막기 위해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직급에 구애받지 말고 널리 후보자를 선택하라는 중 종의 특명이 내려졌다. 당시 거창현감으로 있던 문계창은 당상관 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일찍이 왜구를 물리친 공이 있다
흔히 왕자는 왕의 아들을 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왕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성주라 불렀고, 왕자는 왕의 아들이 아닌 성주 다음의 벼슬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씨 가문에서는 성주집안인 고씨로부터 탐라왕자를 이어받아 6대(1270-1402: 창우昌祐, 공제公濟, 승서承瑞, 신보臣輔, 충걸忠傑, 충세忠世)에 걸쳐 세습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탐라왕자손’이 라고 곧잘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탐라왕자에 대한 기록들을 역사서 여기저기에서 모아보았다. 1270년 삼별초 김통정 장군이 애월읍 하귀리로 상륙하여 토성을 구축하니, 도내 민심은 풍운에 휩싸였다. 성주 고인단과 왕자 문창우(탐라부사耽羅副使로 재임하다 감란구민戡亂救民으로 탐라왕자에 봉작封爵됨)가 이를 왕께 알리니, 왕의 친병 김방경 장군과 몽고군이 이를 토벌하고, 원은 이후 탐라를 점령하려고 초토사(招討司) 를 설치하였다. 100년 뒤인 1373년(공민왕 22년) 원과 결탁한 목호가 관리를 살해하니, 왕자 문신보가 아우 문신필을 조정에 보내 이를 아뢰었다. 1374 년 명나라 황제가 고려 조정에 말 진상에 대해 ‘이전에 사막을 징벌 하러 갔을 때 길이 멀어서 말의
어려서 나는 문씨 성에 대한 긍지를 느끼기 전에 놀림을 받으면서 자랐다. 벗들이 ‘뭉개 여덥발’이라 부르며 연체동물처럼 뼈대 없는 집안이라고 놀리면, 나는 그저 주눅 드는 아이였다. 커가면서 뭉개라는 말이 문가(文家)에서 비롯된 말임도, 임금께서 성을 하사한 유일한 고기가 문어(文魚)임도 깨치게 되니, 문씨 성에 대한 남다른 긍지와 자랑이 더욱 커져 갔다. 세종대왕인지 성종대왕인지 확실치는 않다. 글을 좋아하는 대왕께서는 먹물이 떨어질 정도로 밤늦게까지 글을 쓰곤 했다. 벼루의 먹물이 떨어지면, 내시는 문어 대가리에 있는 먹물을 대령하곤 했다. 그날도 밤새도록 시문을 짓고 글을 쓰다 보니 먹물이 떨어지자, 임금께서는 ‘그거’ 가져오라고 하명했단다. 내시는 준비한 문어 상퉁이 먹물을 대령하면서, ‘그거’ 대신에 이름을 지어달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생각에 잠시 젖은 대왕께서는, 글(文)을 짓고 쓰는데 도움을 주는 물고기란 의미로 문어(文魚)라는 교지를 내렸다 한다. 학창시절 나의 부친은 문씨가 고•양•부 삼성을 제외하고는, 입도가 가장 빠른 성씨라고 말하곤 했다. 왕명으로 제주에
탐라(耽羅)는 신라와 같은 나라의 의미이다. 반면, 제주(濟州)는 ‘물 건너에 있는 고을’이란 뜻으로, 광주·나주·신의주처럼 고을의 의미이다. 신라의 국명은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 이란 말에서 비롯되었다. 즉 덕을 쌓는 일을 매일 새롭게 하면, 그 영향으로 국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탐라, 성주, 왕자라는 명칭은 언제 어떠한 과정으로 지어졌을까? 국가의 뜻을 지닌 나라는 한자 라(羅)에서 비롯된 데서 보듯, 탐라는 신라 와 조공관계의 나라 즉 어엿한 왕국이었다. 이즈음의 제주역사가 기록된 한 대목이다. 고을나 15대 손인 고후·고청·고계 3인이 배를 만들고 바다를 건너 탐진(강진)을 거쳐 신라 서라벌에 갔다. 이때 객성(客星)이 남방에 나타나므로 태사가 아뢰기를, ‘이국인이 내조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도착하니)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장자는 성주 (星主), 이자(二子)는 왕자(왕께서 둘째인 청을 아들처럼 대한 까닭), 막내 계자(季子)는 도내(度內)라 하였다. 읍호를 탐라라 하였는데, 신라로 올 때 처음에
1980년대 교사시절 말띠이며, 말의 고장 남원읍 출신이고, 말하기 좋아하는 12년 선배 교사와 나는 입씨름을 하였다. ‘저는 이래 봬도 탐라왕자 손 이우다. 제주에서는 고씨가 성주를, 문씨가 왕자를 했덴 햅디다. 책에도 경 써 있고 마씸.’이라고 하자, 제주에 무슨 왕이 있고, 왕자가 있느냐는 것이다. 제주에 왕은 있었지만, 왕 대신 성주라 칭했고, 필자가 말하는 왕자는 왕의 아들이 아닌, 세습적인 벼슬이름이라고 말했으나, 상대방을 설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하원동 탐라왕자묘 안내판 다음 날 관련서적을 보여주어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만치 왕궁이 없는 제주에선 역사도 사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에, 우리의 논쟁은 싱겁게 끝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로 된 성을 삼국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성을 가진 사람보다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게다. 조선 초기에는 양민도 성을 가질 정도로 성씨가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은 조선 후기에도 성을 쓸수가 없었다.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 시행으로,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질 수 있도록 비로소 법제화 되었다. 2015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성씨는
▲ 매 바위. 차귀도를 바라보며 올레길을 걷다 거인이 누운 섬과 독수리 같은 매 바위를 발견한 것도 이번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언제 보아도 이곳은 제주 최고의 매력덩어리이다. 하지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섬들을 보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보느냐에 따라 섬의 형태도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것도 이런데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관점의 차이는 이래서 생기는 모양이다. 이곳에 오면 섬들을 품은 바다와, 오름이 낳은 신화가 있어 좋다. 게다가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하는 유물유적이 있다. 관점의 차를 인정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품게 하는 자연도 있다. 가끔은 섬도 변화를 꿈꾸는가 보다. 이곳은 관점을 생각하게 하는 숨겨진 비경이 있고 신화가 있어 더욱 좋다. ▲ 수월봉 서북쪽 아래 진지동굴. 제주섬 도처에서 파헤쳐 진 진지동굴들을 만나는데, 이곳 수월봉 절벽 아래에도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동굴도 있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당시 대미항전의 마지막 보루를 일본본토가 아닌 제주도로 삼았다. 이 진지동굴이 바로 일제의 악랄했던 역사를 말해주는 흔적인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미국에게 밀리기 시작
▲ 고산리 한장밭에 구축 중인 유물 전시관 전면 우연히 애월읍 빌레못 동굴 입구에 간 적이 있다. 그곳 안내판을 읽다보니, 제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하는 역사적 의구심이 조금 풀리기도 했다. 제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4만 년 전인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라 한다. 애월읍 빌레못 동굴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은 제주도에 흔한 돌인 현무암을 떼어내어 찍개나 긁개, 돌칼, 톱날과 같은 도구를 만들었고, 갈색곰•사슴•노루 등을 사냥하면서 생활했었을 것이다. ▲ 시계방향으로 고산리식토기, 화살촉, 돌날, 고산리식토기, 화살촉 및 찌르개, 융기문토기, 결상이식, 찌르개 [제이누리 DB] 제주시 삼양동 삼화지구와 외도동, 한림읍 동명리, 서귀포시 천지연 바위그늘 집자리에 살았던 후기 구석기인들도 이와 비슷한 도구를 사용하며 생활하였을 것이다. 구석기 시대는 빙하 시대와 간빙기 시대가 번갈아 있었던 시기로서,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서 한반도와 중국대륙이 서로 연결되었던 시대이다. 그러기에 인류는 물론 갈색곰과 대륙에 살던 사슴과 노루와 같은 다양한 동물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았던 시기에는 화산활동 등
특이한 지질형태를 보여주는 이곳 해안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다. 용암 쇄설물이 바닷물과 만나 약해지면서 사구를 특이하게 형성해 놓았다. 절벽 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으는 샘터를 만났다. 녹고의 눈물이라 하는 약수터이다. 한 모금 마시고 입안을 다시고는 내뱉었다. 소금기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맛이다. 세계적인 지질명소로 선정된 이유는, 엉알이라 불리는 해안가의 단애가 세계 수성화산 중에서 가장 멋진 응회암의 퇴적구조이기 때문이라 한다. 수만 년에 걸쳐 변동하는 해수면과 그에 따른 화산체의 침식작용과 강한 바닷바람은, 아직 채 굳어지지 않은 화산재층을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그 화산재층 언덕 위에 신석기 초기의 고산리 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니.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지도에는 수월봉을 고산(高山)으로 표기 했다. 표고가 70여 m의 높이로 낮은 해안 언덕인데도 불구하고 ‘높은 산’이라 부르고 있다. 수월봉은 지각에서 상승하는 마그마가 물과 만나서 격렬한 폭발로 만들어진 수성화산으로 응회환(tuff ring) 이고,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당산봉도 수성화산으로 응회구(tuff cone)란다. 수월봉은 화산재를 비롯한 화산성 물질들
▲ 제주시 한경면 고산 수월봉. [제이누리 DB] 태평양의 넘실대는 파도와 한라산 자락의 풍광에 도취되다 보니 내딛는 걸음마다 가볍다. 게다가 이곳은 나만의 추억이 도처에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77년 갓 사범대학을 나와 새내기 교사가 된 나는, 이 마을에 있는 고산상고(지금의 한국뷰티고) 교사로서 1년간 근무했었다. 틈나면 주변의 한적한 길을 찾아 마냥 걷기도 했던 그 시절, 당산봉은 전경대가 주둔하여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지금은 오름 안이 개방된 지 오래 되어서인지 꽤 넓은 분지가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안가 절벽으로 이어진 오름 등성이를 걷는 기분은 더욱 환상적이다. 앞으로는 전설이 서린 차귀도의 섬들이 떠있고, 동쪽으로는 용수리의 절부암 바닷가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풍차들이 바람 따라 돌아가고, 서쪽으로는 수월봉과 한라산 사이로 드넓은 평야지 대가 펼쳐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당오름을 내려오니 저만치서 ‘자구내’ 포구가 우리를 반긴다. 자구내 바닷가를 거닌 일행은 고산평야라고 불리는 드넓은 지대를 가로지른다. 내가 근무할 당시에는 이곳은 밭이 아닌 논이었고, 평야 동쪽에는 자그마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
▲ 고산리 차귀당 내부. 옛날 옛적에 장나라 장설룡과 송나라 송설룡이 부부가 되어 살았다. 큰 부자였지만 5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자 온갖 제물을 준비하고 절에 가 백일불공을 드려 딸 하나를 얻었다. 딸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장설룡이 천하공사, 어머니 송설룡이 지하공사 벼슬 살이를 가게 되었다.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딸을 단단한 방에 가두어 놓고 떠났다. 집안일을 돌보는 정하님에게 잘 키우고 있으면 벼슬 살이 마치고 와서 종 문서를 돌려주겠다고 부탁했다. 며칠 후 아기 씨가 보이질 않았다. 찾지 못한 정하님은 상전에게 편지를 띄웠다. “아기씨가 사라졌으니 어서 바삐 돌아오십시오.” 딸은 부모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문이 제대로 닫혀 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방을 빠져나와 부모가 갔다는 나라를 찾아 산길을 달렸다. 길은 끝이 없고, 두 이레 열나흘을 울다 보니 아기씨는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스님 셋이 지나가고 있었으나 아기씨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아기씨가 힘을 내어 불렀다. “앞에 가는 대사님아, 나를 살려 주옵소서.” 세 번째 스님만이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