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납고 거친 거지를 만나면 첫 번째 하류 인물 부류와 비교해보면 된다. 마음 씀씀이를 보자.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강도나 도둑이 되어 깊은 밤에 남의 집에 뛰어든다면 집안 재물을 말끔히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 생명조차도 그들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어찌 돈 1·2 문, 밥 한두 사발에 그치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은덕을 베풀지 않고 핍박해 강도가 되게 하는가.
사람마다 이런 마음으로 그런 부류를 관대하게 대우하여야 관계가 친밀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귀를 누릴 수 있으며, 후세에 거지가 되는 자손이 없게 되고 창녀와 배우들이 점점 적어지며 도적과 강도가 점차 희소해진다.
……하물며 예부터 거지 중에서 충신 의사가 많이 나왔고 문인 묵객이 그중에 숨어있었으니, 대충대충 봐서는 안 될 일이다.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후 혁명의 초기에 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 충신 목양국〔牧羊國, 소무(蘇武)〕, 의사 채미산〔采薇山,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 되고 문인 묵객이 갱유(坑儒)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았는가. 무릇 머무를 집이 없고 돌아갈 나라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빌붙어 산다.
세상의 도의에 마음 있는 사람은 마땅히 초현납사(招賢納士)의 예로 밥 한 끼에 세 번 토하고1) 감던 머리 세 번이나 꽁꽁 싸매어 나아가2) 초청하여 높여야지, 어떻게 버리는 차나 남은 밥으로 그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이어의 거지에 대한 측은지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여러 연고로 거지로 전락한 불운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있다.
이어가 나눈 여러 가지 거지의 부류는 본질적으로 아직 타락하거나 변질되지 않은, 가난에서 비롯된 인물들이다. 그러기에 “가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면 되고 거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하면 된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단도직입적으로 예부터 있어온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라는 전통 가치 관념을 부정하고 있다.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는 명나라 무종(武宗) 주후조(朱厚照)가 황제 자리에 앉은 정덕(正德) 연간(1506~1521)에 재물을 하찮게 여기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던 산동 명문세가의 자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재물을 내어놓아 의로운 일을 하다가 불공정한 일로 여러 차례 소송하면서 천금의 재산을 소진한 후, 지팡이 하나와 그릇 하나만을 가지고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로 전락했음에도 품성이 변하지 않았다. 조상과 친척에게 욕될까봐 이름을 숨기고 호를 ‘궁불파(窮不怕, 가난해도 두렵지 않다)’라 하였다.
그는 걸식으로 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항상 “도의를 행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도를 중얼거렸다.”
“거지가 된 사람조차 그럴진대 어찌 사람이 거지보다 못할 수 있는가?”
무슨 말인가? 부르다〔규환(叫喚)〕할 때의 ‘규(叫)’, 탁발하다 뜻인 모화(募化)의 ‘화(化)’인 거지〔규화(叫化)〕를 배움을 권하다 뜻인 권교(勸敎)의 ‘교(敎)’, 변화하다의 ‘화(化)’〔거지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교화(敎化)’다〕가 되게 했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경계 하게 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실로 꽤 높은 식견을 가진 인의덕행을 행하는 사람이 거지 즉 규화자(叫化子), 규화(叫化), 화자(化子), 교자(敎化)가 됐다는 말이다.
오래지 않아 ‘궁불파’는 북경, 하남, 산동, 산서 등지에서 협골(俠骨)로 유명한 거지, 명사가 되었다.
어느 날, 고양(高陽)성 거리에서 걸식할 때 ‘궁불파’는 어느 향신(鄕紳)의 집 문 앞에서 절하면서 “천관(天官) 어르신 내 딸 돌려주세요.”라며 애걸하고 있는 중년부인을 보았다.
며칠 동안 계속 그렇게 하자 ‘궁불파’는 측은지심이 생겨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부인은 묻는 사람이 거지인 것을 보고 퉤! 침을 뱉고는 떠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궁불파’는 집까지 쫓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전후는 이랬다.
그 부인에게는 용모가 수려한 16살 난 딸이 있었다. 3년 전에 남편 주(周) 씨가 세상을 떴다. 어머니와 딸은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갔다. 생각지도 않게 지방 불량배가 예쁜 딸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딸을 자신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며 거짓말하면서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고 집에 찾아왔다. 어머니가 반대하자 고발하겠다며 위협하였다. 그때 그 지방 향신이 집사를 보내 말했다.
“우리 집 어르신이, 지역 깡패가 당신 딸을 거저 데려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는 옳지 않다고 여겨, 나에게 나서서 해결하라고 했다네. 당신이 거짓으로 매도계약을 맺어 우리 집 어르신에게 팔았다고 말하면, 그가 자연스레 망상을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그가 당신을 찾아오면 우리 어르신이 계약서를 현청에 보내어 그 개 같은 놈의 인대를 잘라버릴 거요. 일이 마무리 되고 나서 1년 반 정도 지나면 당신에게 딸을 돌려줄 거요. 그때 좋은 짝을 찾아 결혼시키면 되지 않겠소.”
부인은 호의를 철석같이 믿었다. 몸을 판다는 계약서에 30량 은자의 허위 가격을 쓰고는 딸을 향신의 집으로 보내면서 여러 번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지금, 시비는 가라앉았고 딸도 다 자랐다. 부인이 딸을 데리고 와 사위를 맞이하고 여생을 보내려 했다. 생각지도 않게 향신이 불량한 마음이 생겨, 딸을 첩으로 삼으려 했다. 부인은 그제야 자신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 향신의 부인은 고양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질투가 심한 여인이었다. 갖은 방법과 수단으로 부인의 딸을 괴롭혔다. 부인이 딸을 데려가지 않으면 매일 가죽 회초리로 100대를 때린다는 규정을 정하여 핍박하였다.
부인이 데려 오려하자 이번에는 향신이 놓아주지 않았다. 계약서상에 허위로 기록된 30량 은자의 원금과 이자를 지불해야 가능하다고 억지 부렸다. 거금을 모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매일 문 앞에서 절을 하면서 간청하였다. 향신이 자비심을 내서 딸을 돌려보내주도록 애걸할 심산이었다.
어제 딸이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까지 만 대 이상의 회초리를 맞아 온몸이 짙은 심홍색으로 변했다고, 멀쩡한 데가 한 곳도 없다고 하였다.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부인은 하소연할 데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일반삼토포(一飯三吐哺)’, 주공(周公)이 어진 사람을 구함에 있어 한 끼의 식사에 세 번이나 입에 넣은 밥을 도로 뱉고 일어나 객(客)을 맞아들였다 한다.(『사기(史記)·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2) ‘일목삼악발(一沐三握髮)’, 한 번 머리를 감는 동안에 세 번이나 이를 중지하고 머리를 묶어 쥔 채로 찾아온 사람을 맞이한다. ‘어진 사람을 정성껏 대우함’을 이르는 말이다. 토포악발(吐哺握發)이라고도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