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항주(杭州) 단두(團頭) 김노대(金老大) (2)

  • 등록 2024.11.13 1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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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34) 부를 이뤄도 여전히 비천한 사회 지위 단두

이 이야기가 전개되기 전에 교묘하게 복선을 깐 줄거리가 하나있다. 당시 거지의 상황을 묘사한 풍속화라 할만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김노대가 막계를 데릴사위로 들인 후 신혼 한 달 만에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사위에게 동문과 친구를 초청하도록 하였다. 가문을 빛내려고 예니레 동안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현임 단주 김나자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단주 김나자는 생각하였다.

 

“당신도 단주이고 나도 단주인데. 당신은 몇 대씩이나 단주로 있으면서 큰돈을 벌지 않았는가. 조상을 논하자면 피차없는데도 말이다. 조카딸 옥노가 사위를 맞이하는데 마땅히 나를 초청해 결혼 축하주를 대접해야 하지 않던가. 30일이 되어 예니레 동안 잔치를 벌이면서도 3촌 길이 1촌 넓이밖에 안 되는 초청장조차도 내게 보내지 않는단 말이냐. 당신 사위가 수재이긴 하지만, 나중에 상서, 재상이 된다한들 나는 삼촌이 아니더냐? 마주 앉지도 못한다는 말이더냐? 결국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말.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말이지! 내 가서 한바탕 훼방을 놔주지. 남을 무시하면 스스로 망신당한다는 걸 보여주지!”

 

그래서 오륙십 명의 거지를 데리고 한꺼번에 김노대 집에 들이닥쳤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었다.

 

 

구멍 난 모자에 홑 윗옷은 묶었다. 깔개는 낡은 모포로 맞추고 짧은 대나무에 깨진 그릇 매달았다. 아저씨, 아주머니 부르고, 부자 어르신 불러재끼며 문 앞에서 슬쩍슬쩍 곁눈질하면서 떠들어 댔다. 뱀을 부리고 개와 장난치기도 하고 원숭이를 부리며 입으론 각종 재주를 부렸다. 판을 두들기며 양화를 부르고 욕설이 난무하니 요란스럽기 그지없다. 벽돌을 부숴 얼굴에 분칠하고 참지 못할 추태를 부렸다. 일부 나쁜 놈들이 무리를 이루니, 종규(鐘馗)라 한들 거둘 수 없었다.

 

김노대는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려 할 때 김나자가 이끄는 거지 떼가 문안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여 떠들어댔다. 김나자도 곧바로 술자리에 뛰어 들어가 좋은 술,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으면서 말했다.

 

“내 조카와 조카사위 어서 와서, 빨리 외숙부를 알현하도록 하여라!”

 

놀란 여러 수재들이 발붙여 설 자리를 잃자 술자리를 벗어났다. 막계조차 여러 친구와 함께 피했다. 김노대는 어찌할 줄 몰라 재삼재사 간청하였다.

 

“오늘은 내 사위가 손님을 초청한 것이네.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 다른 날에 따로 술자리를 마련해서, 내가 사과할게.”

 

많은 돈을 가지고 나와 거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술 항아리 두 통과 닭, 오리 등을 들고 나와 거지에게 건네주면서 김나자의 집으로 보내라고 당부하였다. 사람을 초대하는 대신에 그 비용을 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거지 떼는 한밤중까지 떠들며 어지럽힌 후에야 흩어졌다.

 

김옥노는 방에서 화가나 두 눈 가득 눈물이 흘렀다. 그날 밤, 막계는 친구 집에서 묵고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김노대는 사위를 보자 체면을 잃었다는 생각에 민망하여 얼굴을 붉혔다. 막계도 기분이 좋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야말로 벙어리가 함부로 황백을 맛보고는 쓴 맛이 있어도 자기만 알 뿐이었다.

 

 

이렇듯 남송 때부터 중국은 이미 ‘단(團)’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 항방 조직이 정식적으로 출현하였고 세습제인 우두머리를 ‘단두’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단’을 거지의 조직 개방(丐幇)의 명칭으로 삼은 데에도 근거가 있다. 어의로 고찰하면 ‘단(團)’은 ‘원(圓)’의 처음 뜻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되어 ‘모이다, 반죽하다’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제도적으로 볼 때 ‘단(團)’은 먼저 군대의 편제 단위의 하나로 썼다. 예를 들어 『수서(隋書)·예의지(禮儀志)』에 “다시 보졸(步卒) 80대(隊)를 4단(團)으로 나누고 단에는 편장(偏將) 1명을 둔다.”라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 때에 시사(市肆, 시전)를 ‘단(團)’이라 불렀다. 예를 들어 송대 관포(灌圃) 내득옹(耐得翁)의 『도성기승(都城紀勝)·제행(諸行)』에 “또 단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성남의 화단(花團), 이로(泥路)의 청과단(靑果團), 강간(江干)의 상단(鯗團), 후시가(後市街)의 감자단(柑子團)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환경에서 거지들이 시사(시전)를 주요 구걸 장소로 삼아 몇 개의 시사를 한 단위로 항방(行幇)을 결성하고 ‘단’이라 이름 지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시 단의 우두머리 단두(團頭)는 거지를 관할하며 부당한 이익을 챙겨 생계를 유지하였다. 필요할 때에는 모두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했다. 단두가 지위를 이용하여 부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사회상의 지위는 여전히 비천하였다. 세속 관념으로 볼 때에 거지 두목이요 무뢰한일 따름이었다.

 

가난한 수재가 데릴사위로 간 것도 갈 곳이 없었던 까닭이다. 궁지에 몰리니 억지로 응한 것일 따름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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