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대 제왕 중에 거지 출신 황제가 있다. 바로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거지가 아니라 행각승 면모로 사방을 돌아다닌 어린 거지였다. 용의 씨, ‘용종’으로 대어난 북제의 고위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주원장의 행각 경력은 나중에 입신양명해 황제 보좌에 앉고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중요한 복선이 된다. 얻기 어려운 잠재된 기회였다.
주원장은 원나라 천력(天曆) 원년(1328) 9월 정축에 호주(濠州) 종리〔鍾離, 현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고장(孤莊)촌의 빈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봉양현은 중국역사상 가난하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지금까지도 화고희(花鼓戱)1)로 유명할 뿐 아니라 거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한 지리 문화 환경 속에서 거지 주원장이 나타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거지가 나중에 천자 자리에 올라 명 왕조의 개국 황제가 되었다. 중국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이요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보아야 할 사건이다.
지정(至正) 4년(1344)에 주원장은 17세였다. 당시 호주 지역은 심한 가뭄, 누리의 해, 돌림병 등으로 기아와 질병이 한꺼번에 닥쳤다. 농민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게 되었다. 주원장의 아버지, 어머니와 형 한 명은 병을 얻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둘째형도 타향으로 피난하였다. 주원장은 어쩔 줄 몰라 형제 둘이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그때 이웃집 왕(汪) 할머니가 주원장의 아버지 주오사(朱五四)가 일찍이 황각사(皇覺寺)에서 부처님께 발원하여 주원장을 고빈(高彬)법사의 도제로 출가시키려고 했었던 일을 떠올렸다.
원래 주원장은 태어나서 3,4일이 됐어도 젖을 먹지 않았다. 배도 탱탱하게 부풀어 올라 살아나기 어려울 지경에 빠졌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다가 밤에 자기 아들이 죽다가 보살을 만나서야 살아나는 꿈을 꾸었다 : 앞길이 막막한 상황까지 됐으니 깨끗하게 아이를 사찰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사찰에 도착했으나 스님을 만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때 애기 울음을 듣고 꿈에서 깨어났다.
애기가 젖을 먹는 게 아닌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푼 배도 가라앉았다. 아이는 자라서도 병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 주오사는 그해의 몽조(夢兆)를 생각해내고는 황각사에 가서 주원장을 사신하기로 발원하였다.
실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지 않던가. 그해에 발원도 했으니 지금 사찰에 들어가 스님이 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몸을 편안케 하고 밥도 줄 곳이 생기니 굶어죽지는 않지 않겠는가!
둘째형의 동의를 얻은 후 왕 할머니는 향과 초 등 예물을 준비하고 고빈 법사를 찾아가 아이를 받아들여 스님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심부름하는 아이, 행동(行童)으로 삼아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처럼 단장하지만 하루 종일 청소하고 향 올리고 세탁하고 밥 짓는 잡무를 하는 자리였다. 그렇더라도 머물 곳이 있고 먹을 거친 밥이라도 주니 다행이었다.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주원장이 절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된지 50여 일,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에 사찰을 떠나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게 되었다. 행각승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거지였다.
원래 황각사는 주로 토지에 물리는 세금, 지세를 받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그해의 재난으로 지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사찰의 스님은 대부분 처와 가족이 있었다. 먹여야 할 사람은 많은데 양식은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잇따라 나가 걸식, 즉 탁발하며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치로 말하면 사찰은 그래도 괜찮았다. 주원장은 가장 마지막에 탁발하러 내보내졌다.
주원장은 사찰에 들어간 지 2달도 안 된, 잡역만 했던 젊은이일 따름이었다. 염불도 못했고 불사도 할 줄 몰랐다. 허름한 가사를 걸치고 목어 사발을 들고 다닌다하여도 실제로는 여지없는 낡은 삿갓 쓴 거지였다.
그렇게 주원장은 안휘의 합비(合肥), 하남의 신양(信陽), 고시(固始), 귀여(歸汝), 회양(淮陽), 녹읍(鹿邑)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고 다시 안휘 박현(亳縣), 부양(阜陽)2) 등지로 돌아다녔다. 3년 동안 풍찬노숙 하였다. 길거리에서 문에 기대어 걸식하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업신여김을 얼마나 당했을지 어찌 모르겠는가.
나중에 주원장은 『어제황릉비(御製皇陵碑)』에서 회상하였다.
“여럿이 각자 계획을 잡고 운수(雲水)처럼 유랑하였다. 나는 어떤 성과도 없었다.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었다. 친척과 친우를 따르려 했으나 스스로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한없이 넓은 하늘을 바라볼 뿐. 의지할 곳 없으니 내 그림자와 동행하였다. 아침에 연기가 나는 곳이 있으면 급히 달려갔고 저녁에 낡은 사찰에 들어가 투숙하였다. 어떤 때에는 높이 솟은 험한 절벽을 바라보았다. 낭떠러지에 의지해 달 아래에서 원숭이 울음소리를 들으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혼백은 요원하고 부모는 안 계시니, 넋을 잃고 곳곳을 거닐었다. 가을바람, 학의 울음, 서리 흩날려 우수수 떨어지나니. 몸은 껍질처럼 바람에 한없이 날리고 마음은 끓는 물처럼 견디기 어려웠다.”
만백성의 우두머리가 된 후에 그 3년간의 걸식하던 처지가 여전히 역력히 눈에 떠오르는 듯, 자신이 받은 깊은 인상을 표현하였다.
거지 신세로 전락한 절절한 경험이 젊은 주원장의 시야를 넓혔다. 여러 강호 친구를 사귀면서 식견을 넓혔다. 동시에 용감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형성하였다. 질투심 강하고 잔인한 성격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중에 성공을 거두는 데에 소질과 조건을 다지게 만들었다.
거지는 많고도 많다. 천하에 수도 없이 널려있다. 그러나 거지 출신 황제는 고금을 통틀어 주원장 홀로 혁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의 소질과 역사의 좋은 기회를 제대로 포착한 능력에 따랐다고 하겠다.
주원장이 거지가 돼 구걸하다가 귀향하니 때마침 곽자흥(郭子興)의 홍건군(紅巾軍)이 봉기해 있었다. 갈 곳 없던 주원장은 홍건군에 입대했다. 의병 군기 아래의 보졸이 되었다. 2개월여 만에 곽자흥에게 발탁돼 친병 구부장(九夫長)으로 승진하고 사령관 부서로 편입되었다. 심복이 되었다.
곽자흥은 양녀 마(馬) 씨를 주원장에게 시집보냈다. 나중에 마황후가 된 여인이다. 이를 바탕으로 주원장은 뜻을 이루었다. 여러 차례 순탄치 못한 과정을 겪기는 했지만 이겨내어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계속)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화고희(花鼓戱), 중국 지방 희곡이다. 중국 지방 희곡 중 같은 이름이 가장 많은 전통극 종류로 일반적으로 호남화고희(湖南花鼓戱)를 가리킨다. 호북(湖北), 안휘(安徽), 강서(江西), 하남(河南), 섬서(陝西) 등지에 같은 이름의 지방 희곡이 있다. 가장 이름이 많은 ‘화고희’ 증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영향이 큰 지방 희곡은 역시 호남화고희이다. 일반적으로 날라리와 징, 북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가무희라 이해하면 된다.
2) 나열된 지명은 현재의 지명이다. 당시 지명은 순서대로 하면 합비(合肥), 고고(固姑), 신양(信陽), 여주(汝州), 진주(陳州), 녹읍(鹿邑), 박주(亳州), 영주(穎州)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