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중국에 “‘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유명한 전고가 있다. 모욕적인 베풂은 받지 않는다는 말로, 멸시하거나 모욕적인 보시는 결코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전고는 『예기(禮記)·단궁(檀弓)』에 기록돼 있다.
춘추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쓰러졌다. 검오(黔敖)가 길가에 음식을 늘어놓고는 지나가는 배고픈 사람을 기다렸다. 하루는 굶어서 부황이 든 사내 한 명이 찾아왔다.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다 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한 그의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금오가 왼손에는 밥, 오른손에는 마실 것을 들고 사나이에게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이봐라, 이리 와서 이걸 먹어라.”
그러자 사내는 오히려 굶주림을 잊은 듯 허리를 쭉 펴고 머리를 곧추세운 후 검오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자못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이런 차래지식(嗟來之食) 따위를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다. 가짜 선심은 그만두어라”하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금오는 황급히 그 사나이를 뒤쫓아 가서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고 음식을 받아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나이는 결코 음식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끝내 굶어죽었다.
이렇듯 곤경에 빠졌으나 지조를 잃지 않는 거지처럼 의사(義士)와 같은 부류가 사림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에 제(齊)나라 은사 검루(黔婁)가 그랬다.
그는 가정 형편이 빈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제나라, 노(魯)나라 국군이 내리는 하사품도 받지 않았다. 죽은 후에 몸을 덮은 이불이 너무 작아, 머리를 덮으니 발이 삐져나왔고 발을 덮으니 머리가 삐져나왔다. 증자(曾子)가 문상 가서 상황이 그러한 것을 보고는 검루의 아내에게 말했다.
“이불을 비스듬히 해서 염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검루의 아내가 말했다.
“비스듬히 해서 여유가 있는 것보다 바르게 해서 부족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불을 옆으로 비스듬히 하면 머리와 발을 전부 덮을 수 있지만 다 덮을 수 없다하여도 비스듬히 하는 것보다 바르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현(弦) 밖에 소리가 있다지 않는가. 말에 숨은 뜻이 있으니. 내포된 뜻이 깊고도 깊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以食爲天)고 하지 않던가. 백성이 살아가는 데에는 먹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사인은 ‘쌀 다섯 말을 위하여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지만 세상에서 화식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던가. 그렇기에 거지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벼슬에 나가기 전에 걸식하며 살아가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괴이한 빈사(貧士) 동경(董景)
진대(晉代, 266~420)에 가난한 사인이 있었다. 성은 동(董), 이름은 경(景), 자는 위련(威輦)으로, 어느 지역 사람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찍이 농서(隴西) 계리(計吏)와 함께 낙양의 백사〔白社, 현 하남 언사현(偃師縣) 내〕에서 살았고 도학(道學)에 능했다. 진자서(陳子敍)가 그에게 도를 배웠다.
먹을 것이 없어 그는 늘 길거리에서 걸식하였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며 시를 읊었다. 조각난 풀솜을 얻으면 몸을 덮었다. 완전한 명주는 받지 않았다. 당시에 저작랑(著作郞) 손초(孫楚)1)가 편지를 써서 같이 지내거나 관직이라도 얻으라고 권했지만 거절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물던 곳에 대나무 한 섬과 시 두 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가난한 은사였던 동경은 차라리 길거리에서 걸식하면서 살지언정 벼슬길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 시대의 괴인이었다. 그의 일은 괴사로 전해져 온다.
공(孔) 씨 아들, 무학무능 해 평생 거지로 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대 옹정(雍正), 건륭(乾隆) 연간에 호남, 호북의 빈사(貧士)가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되자 밖에 나가 유학하였다. 서당이 보이면 들어가 훈장을 배알해 돈을 구걸하고 서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하룻밤 묵은 후 떠났다. 사방을 유랑하며 탁발하는 스님과 같았다.
지방의 재력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아 결국 거지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대 가경(嘉慶) 연간에 남회(南匯)현 주포(周浦)진에 돈 많은 공(孔) 씨가 살고 있었다. 만년에 아들을 얻으니 지나치게 귀여워했다. 여러 차례 스승을 초빙해 공부를 가르치려 했으나 수업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선생은 아무 일도 않으면서 밥을 먹기가 부끄러워 시 한 수를 썼다.
“학당은 낡은 절 같아, 와서 주지승이 되었구나. 그저 하루 3찬, 환혼이며 등 한 잔. 경 읽는 소리 본래 들리지 않으니 불호를 무빙(無憑)이라 지었노라.”
어느 날, 선생이 공 씨 아들이 뜰에서 노는 것을 보고는 강제로 공부시켰다. 아들이 화가 나 욕을 하자 선생은 질책하며 꾸짖었다. 그러자 아들이 어머니에게 일러바쳤다.
“선생이 나를 때렸어요. 반드시 보복하고 말거예요.”
어머니는 위로하며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들랑 다시 얘기하자.”
아버지가 밖에서 돌아와서는 아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의 친한 친구를 초정하여 한 대만 맞아주고 참아달라며 선생에게 뇌물을 주었다.
아들이 성장했으나 무학무능 그 자체였다. 그저 밖에서 빈둥거릴 뿐이었다. 재산이 많으면 뭘 할 것인가. 빈둥거리며 앉아서 까먹으면 산이라도 말아먹지 않던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놀고먹으면 없어지나니. 많던 재산 다 사라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죽을 때까지 살았다.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모든 사람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 교육이 우선 아니겠는가. 익애하여 보호만 한 결과 거지로 전락했으니 슬픈 일이다. 지방 재력가 가문에서 태어났다하여도 거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손초(孫楚. ?—293), 서진(西晉)시기의 태원(太原) 중도(中都) 사람으로 자는 자형(子荊)이다. 글 짓는 재주가 탁월하고 성격이 호탕하였다. 무리를 짓지 않았으며 의기양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이 40여 세에 진동군사(鎭東軍事)에 참여했다가 저작랑(著作郞)으로 옮긴 후, 남을 시기하고 도도하게 굴면서 알력을 조장하니 한동안 버려졌다. 나중에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이 옛 정을 생각해 참군(參軍)으로 기용했다. 혜제(惠帝) 초에 풍익(馮翊)태수를 지냈는데, 은거한답시고 ‘수석침류(漱石枕流 :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 억지 부리는 것을 꼬집는 말)’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