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훈(武訓), 구걸해 자금을 모아 의학(義學)을 일으키다 (4)

  • 등록 2024.10.23 13: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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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31 )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

무훈은 가르치는 데에 소홀리 하는 선생이 있으면 찾아가 무릎 꿇고 사정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찾아가 오랫동안 무릎 꿇고 충고하고 타일렀다. 성과가 있는 학생이나 선생에게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를 표시하고 포상하며 장려하였다.

 

그가 의학 자금 모금에 다소간 희망이 생겼을 때 도박 빚을 진 친형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였지만 무훈은 한 푼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관(冠)현 장팔채(張八寨)의 효부 진(陳) 씨가 밤샘 바느질로도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구걸하면서 시어머니에게 효양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끼지 않고 10무의 토지를 증정하였다.

 

“이 사람 훌륭해, 훌륭해. 10무 토지를 줘도 아깝지 않지. 이 사람 효부야, 효부. 토지 10무를 줘서 노인을 봉양하게 해야 돼.”

 

그가 구걸한 돈의 절대 다수는 의학을 창설하는 데에 썼다. 의학 창설이 성공한 후에도 무훈은 여전히 유랑하고 걸식하며 살았다. 잠은 사찰에서 잤다. 학생들이 찾아가 무릎 꿇고 학당에 거주하라 애걸할 때에도 그는 말했다.

 

“착한 사람들이 돈을 희사한 거야. 내게 의학을 세우라고 한 거지.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라고 한 거야. 나를 위하여 그것을 써버린다면 착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와 다름없어. 양심에 위배되는 일이지. 나는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즐겁게 살고 있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어. 너희는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하고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의 숭고한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세상에 더 이상 그것보다도 즐거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훈이 그랬다.

 

광서 22년(1896) 4월 23일 새벽, 59세였던 무훈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영락하여 유랑하고 걸식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일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방성대곡하였다. 당읍(堂邑), 관도(館陶), 임청(臨淸) 3현의 관리와 신사 모두 장송하였다. 장례에 참석한 각 현의 향민은 2만 명이 넘었다.

 

광서 30년(1904), 무훈이 죽은 지 8년이 되는 해에, 신임 산동순무 원수훈(袁樹勛)은 무훈이 생전에 구걸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고행과 의거를 사실대로 조정에 상신하였다. 국사관(國史館)에서 전기를 쓰고 ‘충의전사(忠義專祠)’를 건립하도록 주청하였다.

 

이후 무훈이 구걸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정신에 영향과 감화를 받아 중국 내에 계속해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당읍현에서는 사범강습소를 무훈중학으로 개편하였다. 무훈의 족형제의 손 김동(金棟)이 기부해 관도, 관현에 각각 무훈고급소학을 건립하였다. 풍환장(馮煥章)이 태안(泰安)현과 안휘 소현(巢縣)으로 나누어 각각 무훈을 기념하는 소학교를 20여 곳에 창립하였다. 단승무(段繩武)는 수원(綏遠) 포두(包頭) 일대에 독립적으로 기부해 무훈을 기념하는 소학교 20여 곳을 지었다. 이외에도 많은 지역이 무훈의 영향을 받아 소학교를 세웠다.

 

그해 무훈이 임청현 신사 시선정(施善政)의 찬조아래 창설한 ‘어사항의숙(御史巷義塾)’에서 교편을 잡은 사람이, 학문과 품성이 모두 훌륭한 왕비현(王丕縣)이다.

 

무훈이 죽은 후 왕비현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금을 했다. 무훈 생전에 창설한 3개의 의숙 중 가장 작았던 어사항의숙을 규모가 가장 큰 교육시설로 만들었다. 왕선생 본인은 1933년 80여 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숙의 돈 한 푼을 개인적으로 쓴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아내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하자 깨끗하게 관계를 끊었다.

 

왕선생은 조상이 전해준 비방을 팔아서 입에 풀칠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후인들은 그를 ‘제2의 무훈’이라 불렀다. 실로 무훈이 생전에 간청하고 중탁한 것을 성실히 실행했으니, 동지라 해도 부끄럽지 않다.

 

무훈은 평범한 거지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고아한 사인도 아니었다. 그의 인품과 덕성은 사림의 많은 사인과 한데 섞어 논할 수 없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는 위험해진다. 교육 사업만 그러한가. 어떤 사업을 하든지 간에 실제로 무훈과 같은 정신이 필요하다.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용감히 헌신하며 추구하는 바를 견지하는 정신과,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하다 죽으면 그만이다.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아사와 거지의 각종 일사기문은 중국문화의 내부에 사인문화와 하층문화 사이의 계층(계급)을 넘어선 교류를 반영하고 있다.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

 

라는 말처럼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변이를 두루 겪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한 몸처럼 함께 스며들어 있다. 그 실질을 강구해보면 인생의 지향, 품격 정조, 그리고 사회의 처지가 두 계층 문화를 교류하게 만드는 기본 축이다.

 

그 계층 간의 문화 교류가 지극힌 제한적이고 영역이 비교적 좁지만 중국문화사에 독특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일정한 수준에서 아(雅)문화와 속(俗)문화 사이의 인위적인 역사의 한계를 타파하였다. 서로 영향을 주었고 서로 같이 스며들어 있다.

 

그렇게 중국문화의 발전과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동시에 사회·역사·문화 중 여러 분야의 인물의 세태, 사회 면모, 사회 현상, 심리 상태를 고찰하고 분석하는 데에 별천지와 같은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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