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훈(武訓), 구걸해 자금을 모아 의학(義學)을 일으키다 (3)

  • 등록 2024.10.16 15: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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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30) 30여년 동안 고생 견뎌낸 피땀, 모욕 감내한 피눈물

예부터 여러 직업에는 각자 생계를 이어가는 수완이 있는 것처럼 거지에게도 자기 나름대로 구걸하는 기술과 재주가 있었다. 무훈은 의학을 창설하는 자금을 모집하려고 가끔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구걸 수단을 운용하였다.

 

시주들의 환심을 사고 좀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하여 어떤 때에는 사찰 시장이나 일반 시장에서 ‘물구나무서기’1) 곡예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두 발은 하늘을 향하고 양 손은 땅을 짚어 ‘전갈 기어가기(蝎子爬)’하고는 반시간 동안 넘어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었다. 무훈은 기예를 선보이면서 노래를 불렀다.

 

“물구나무 한 번 서면 동전 한 닢, 열 번 서면 동전 열 닢, 여러 번 서면 돈도 많아지니 누가 의학을 창설하지 못한다고 하리오? 한 번 오르면 동전 한 닢, 열 번 오르면 동전 열 닢, 의학을 짓는 것은 어렵지 않다오.”

 

어떤 때에는 땅에 엎드려 기어가면서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말 타듯이 타게 하였다. 심지어 두세 명의 아이를 동시에 등에 태워 장난치면서 돈을 구걸하였다. 무훈은 기어가면서 노래하였다.

 

“나는 말이 되고 당신은 타세요. 당신은 돈을 내고 나는 힘을 쓰니, 의학을 창설하는 데에 힘이 들지 않아요. 안정하게 타고 빨리 기어가요, 나는 기쁘오, 나는 자유자재요, 의학을 창설하면 영원히 좋아요.”

 

어떤 때에는 뱀이나 전갈을 가지고 기예를 부리면서 돈을 구걸하였다. 현장에서 삼키기도 하면서 노래하였다.

 

“뱀은 먹을 수 있어요, 겁내지 마세요, 의학을 창설하는 것은 모두 내 손에 달렸어요. 전갈을 먹어요, 전갈을 먹어요, 의학을 세우는 것이 내 일이에요.”

 

어떤 때에는 벽돌이나 기와 부스러기를 먹으면 사람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무칠아, 너 정말 미쳤구나. 벽돌이나 기와는 먹을 수 없단다!”

 

무훈은 꿀꺽 삼키고서는 노래하였다.

 

“부스러진 벽돌, 깨진 기와, 모두 소화시킬 수 있어요. 의학을 세우지 않아야 사람들이 비웃어요.”

 

심지어 인간적인 데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몇 문의 돈으로 그에게 똥이나 오줌을 먹으라고 유혹하더라도 무훈은 기쁘게 시키는 대로 하였다. 어떤 모욕을 당해도 무훈은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와 관련한 노래도 불렀을 것이나, 후인이 그를 위해 전기를 쓰면서 당시 그가 부른 노래의 내용을 감당할 수 없어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구걸만으로는 자금을 모금하기 힘들면 무훈은 아무 때나 노동을 제공해 돈을 벌었다. 예를 들어 맷돌질을 해주기, 실 꼬아주기, 분뇨 말리기, 풀 작두질하기, 돌번지 끌기 등을 도와주었다. 무훈의 부른 노래 내용을 보자.

 

“맷돌질, 맷돌질, 일 두 보리에 60개(60문). 밀기만 할 뿐 체질은 하지 않아요, 체질하면 돈을 더 줘야 해요.

 

실 꼬기, 실 묶기, 조만간 의학원 지을 수 있어요. 실 묶기, 실 꼬기, 의학을 창설하는 것 걱정 없어요.

 

내게 돈을 주세요, 밭을 다질게요. 의학을 창설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분뇨 말리기, 풀 작두질하기, 돌번지 끌기, 모두 나를 찾으세요. 어두워질 때까지 해요, 끝마치라 마세요. 돈을 얼마 줘도 안 된답니다.”

 

총체적으로 무훈이 생각한 바, 날마다 행동한 것은 모두 의학 창설을 실현시키려는 거사였다. 의학 자금을 모금하려고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해냈다. 모든 것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의학을 창설하는 것이 살아있는 까닭이었다. 기껍게 살아가는 유일한 정신적 기둥이었다. 모든 고통과 모욕은 도외시하였다.

 

어느 날, 무훈이 기대어 살아가던 낡은 사찰의 지붕에서 기와가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다. 그런데도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러도, 의학을 창설하는 것은 모두 내게 달렸다.”

 

무훈이 의학을 창설하는 것에 취한 듯 홀린 듯 넋을 잃고 몰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적과 열성은 고향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신사를 감동시켰으며 관부를 놀라게 했다.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30년의 의학 창설 염원이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그 동안의 답답함, 불우함, 고난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노력은 끝내 이루고자 하는 무훈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산동 순무 장요(張曜)가 광서 14년(1888)에 황제에게 올린 상주서를 보자.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현 곽춘후(郭春煦)가 훈도 양수방(楊樹坊) 등 공동명의로 청원하다) 현민 무종우의 아들 무훈은 어릴 적에 부친이 사망해 가정이 극빈합니다. 모친 최 씨를 섬김에 극진히 효를 다했고 형 무양과도 우애가 깊습니다. 소박하고 근검절약해, 매년 고용임금의 남은 자금을 저축하여 이윤을 얻어, 기특하게도 230무(畝)의 토지를 샀습니다. 도성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3263관(串) 874문(文)에 이르는 땅값 금액을 모두 의학 창설 경비로 기부하였습니다. 때마침 동향인 곽분(郭芬)이 유림집(柳林集) 동문 밖에 1무 87리(厘) 토지를 기부하니 의학 와방 20칸을 건축했습니다. 필요한 재료는 무훈이 또 혼자서 도성의 금액 280관을 기부하고 이웃 마을에서 공동으로 1578관을 기부하여, 올해 봄에 낙성하고 선생을 초빙해 강학하였습니다. 생원과 동생 30여 명, 일반인 등 20여 명입니다. 지방의 의거를 살펴보건대, ……무훈은 가난한 백성으로 의식을 절약해 반평생에 모은 재산으로 의학을 이루었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무훈이 의학 경비로 기부한 금액이 총계 7천여 관(串)으로, 합치면 은자 2천 량(兩) 이상이 됩니다. ……‘낙선호시(樂善好施, 착한 일을 즐기고 베풀기 좋아하다)’라는 문구를 내려 표창한다는 것을 보여주소서.

 

 

그렇게 해서 ‘낙선호시’라는 문구가 새겨진 패방(牌坊)이 유림(柳林)진의 대로에 우뚝 솟아있다.

 

그런데 상주서에서 말한 무훈이 의학 건립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기부한 2천여 량(兩) 은자가 어찌 ‘고용임금의 남은 자금’이겠는가? 무훈이 30여 년 동안 고생을 참고 견뎌낸 피땀이며 큰일을 위하여 모욕을 감내한 피눈물이지 않던가. 사실대로 상신하면 놀라 죄를 물을까봐서 그렇게 얘기한 것일 따름이다.

 

반평생의 피땀이 담긴 것을 ‘낙선호시’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무훈이 추구한 것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패방을 세워 공을 장려한 것조차도 본의에 맞지 않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나대정(拿大頂), 도립(倒立), 수정정(竪晴蜓), 땅재주의 이칭이다. 땅재주의 기본 체기인 물구나무서기를 일컫기도 한다. 한대(漢代)에는 도립을 신체평형기술인 정기(鼎技)라 하여 도식(倒植)이라 불렀다. 도식은 형체기교 중 도립을 독립기예로 발전시킨 형태다. 이후 도식은 첩안도립(疊案倒立)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오안(五案)이라는 기예의 원시형태다. 이는 현대 서커스의 의자정(椅子頂)의 기본 형태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근두마목(斤頭馬木)의 기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근두마목의 연희형태는 마목(가마나 상여 등을 세워 놓을 때 고이는 네 발이 달린 나무 받침틀)의 가장자리에서 물구나무서기, 재주넘기, 살판 등의 다양한 땅재주를 연행하는 것으로 추론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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