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河北) 영진(寧津)의 궁가항(窮家行) (1)

  • 등록 2024.11.27 10: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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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36) 푼돈을 구걸하는 거지 '사념자(死捻子)'

산동성 서북부에 인접한 하북성에 영진(寧津)현이 있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궁가항(窮家行)’이라는 명칭의 방대한 개방(丐幇)이 존재하였다.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현 중국 정권이 들어서서야 사라졌다.

 

통상적으로 궁가항을 ‘염상(捻上)’이나 ‘염자(捻子)’라고 불렀다. 돌아갈 집이 없어 곳곳으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들이 그 조직에 들어갔다. 금전이 생기기만 하면 먹고 마시고 도박에 탕진하였다. 헤프게 다 써버리고 저축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만년궁(萬年窮)’이라 불렀기에 ‘궁가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스로 ‘이정항(理情行)’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사리, 인정을 강구하는 항방(行幇)이라는 뜻이다. 궁가항에는 ‘사념자(死捻子)’, ‘활념자(活捻子)’, ‘간상(杆上)’의 구분이 있었다. 그중 ‘사념자’가 정통이며 소속된 거지가 가장 많았다.

 

‘사념자’는 속칭 ‘규화자(叫化子)’라는 거지로, 푼돈을 구걸하는 거지였다. 동한(東漢) 말기의 곤궁하기로 유명한 명사 범염(范冉)1), 일명 범단(范丹)을 조사(祖師)로 모셨다고 전한다. 『후한서·범염전(范冉傳)』에 “환제(桓帝) 때에 범염은 내무장(萊蕪長)이 됐는데 모친 조상을 당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저자에서 점을 치며 살다가 당인(黨人)이 금고를 당하자 조그만 수레에 처자를 싣고 밀고 다니면서 물건을 주워서 살림 비용으로 삼았다. 여관에서 쉬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 의지하여 살기도 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살다가 풀로 집을 얽어 머무니 누추한 곳이었다. 때로 양식이 떨어져 궁하게 살면서도 태연하였고 언행과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시루 속에 먼지가 생기는 범사운(范史雲)이요, 솥 속에 물고기가 생기는 범래무(范萊蕪)라네’라고 노래하였다.”

 

항방에서 전해오는 조사의 전설을 보면 범염을 나이 차이가 수백 년이나 있는 공자(孔子)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

 

당시에 범염이 홀로 방 두 칸짜리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주의에 49과의 수수깡 다발을 묶어 만든 마당이 있었다. 공자가 양식이 다 떨어지자 제자 자로(子路)를 범염에게 보내어 양식을 꾸어오도록 하였다. 자로가 오니 범염이 물었다.

 

“세상에 무엇이 많고 무엇이 적소?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괴로움이요?”

 

자로가 대답을 못하여 빈손으로 돌아갔다. 공자가 다시 안연(顏淵)을 보냈다. 안연이 대답하였다.

 

“세상에는 사람은 많으나 군자는 적소. 빌릴 때는 기쁘나 갚을 때는 괴롭소.”

 

그러자 범염이 각각 1아령(鵝翎, 거위 깃)의 관에 쌀과 밀가루를 담아 보냈다. 안연이 가지고 가서 공자에게 건넸다. 관을 뒤집으니 쌀과 밀가루가 쏟아져 나와 산을 이루었다. 일이 끝난 후 공자가 범염을 찾아가 감사를 전하며 말했다.

 

“빌린 쌀과 밀가루를 다 갚을 수 없겠습니다.”

 

범염이 말했다.

 

“나중에 내 도제들에게 갚으시지요.”

 

공자가 답했다.

 

“그럽시다! 나중에 내 도제들에게 명심하여 갚으라고 하리다. 문에 대련이 붙여있는 집은 모두 들어와서 구걸해도 되도록 하겠소이다.”

 

또 다른 전설은 말한다. 어느 날, 범염과 공자가 정오까지 바둑을 두다가 범염이 물었다.

 

“세상에서 어느 것이 가장 귀중합니까?”

 

공자가 답했다.

 

“당연히 금전이지요.”

 

범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세상에 사람이 살아있는 보물이지요. 당신은 돈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다 사지 못하잖소. 나는 돈이 없어도 내 도제들이 먹을 것을 준다오.”

 

공자는 머리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사념자’는 한문(韓門), 제문(齊門), 곽문(郭門) 3대 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궁가론(窮家論)』에는 관련 전설과 항방 규칙이 기록되어 있다고 전하지만 고찰하기 어렵다.

 

중일전쟁 기간에 역사학자 영맹원(榮孟源)이 영진현 대류(大柳)진 누자두(簍子頭)2) 유마자(柳麻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염상의 조사는 범염이라 하였고 염상은 공자의 도제에게 외상값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로 소주양조장, 기름공장, 염전이라 하였다. 50년대 이후 영맹원은 또 대류진의 누자두 낙대개자(雒大個子)를 찾아가 조사하였다. 그는 스스로 유문(柳門)이라 하면서 유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1982년 6월, 영진현 사무소 직원이 정장(程莊)에 가서 이미 63세가 된 쌍확(雙確)공사 양노원에 머물고 있던 정준복(程俊福)을 찾아가 조사하였다. 정준복은 16세 때에 창주(滄州)에서 궁가항에 가입하였고 곽문의 17대 손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사념자 3대 지파 이외에 범문, 유문 2문이 더 있었다.

 

곽문의 정준복은 창주에서 가입했다는 것을 보면 궁가항 조직은 산동에 가까운 영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하북성 창주도 활동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념자는 일반적으로 ‘화탑자(花搭子)’, ‘무탑자(武搭子)’, ‘규가(叫街)’ 3부류로 더 나눌 수 있다.

 

화탑자는 수래보3)로 구걸한다. 노래할 때 소뼈로 만든 악기를 가지고 노래하는데 살랍봉(撒拉棒)이라 한다. 죽판(竹板)을 치는 것은 살봉자(撒棒子)라 한다. 내나무 틀에 사발을 메달아 다니는 것은 살랍계(撒拉鷄)라 한다.

 

무탑자는 위협해 겁주는 방식으로 구걸하는 형태다. 손에 식칼〔채도(菜刀)〕를 들고 흉부를 치는 것, 살랍분(撒拉笨)이라 한다. 신발 바닥으로 흉부를 치는 것, 잡양자(砸瓤子)라 한다. 낫으로 자신의 앞이마나 정수리를 치면서 선혈이 낭자하게 하는 것, 자파두(刺破頭)라 한다.

 

규가는 절름발이, 소경, 팔다리 한 쪽이 없는 사람 등 신체장애자가 구걸하는 것을 말한다. 사찰 시장이나 번화한 도시 시장에서 구걸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범염(范冉, 112~185), 단(丹)이라고도 한다. 자는 사운(史雲)이다. 후한 진류(陳留) 외황(外黃) 사람이다. 남양(南陽)에서 번영(樊英)에게 수학했으며, 삼보(三輔)에서 몇 해 동안 마융(馬融)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환제(桓帝) 때에 내무장(萊蕪長)이 되었지만 어머니 상을 당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나중에 태위부(太尉府)로 불렀다. 시어사(侍御史)로 삼으려 하자 숨어살며 시장에서 점복(占卜)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가난했다. 나중에 당고(黨錮)를 당하여 궁핍하게 살면서도 의연했고 언어나 태도도 고치지 않았다. 당금(黨禁)이 풀리자 삼부(三府)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절선생(貞節先生)이다.

2) 개방(丐幇) 중에는 개방 방주라고 불리는 우두머리 이외에 작은 우두머리(소두목)이 있었다. 그런 소두목을 일반인은 ‘누자두(簍子頭)’라 불렀다 모든 개방에서 일정한 지위가 있었다.

3) 수래보(數來寶), 혹은 수백람(數白欖), 중국문화 특유의 곡예(曲藝)다. 예술표현 형식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혼자서 하거나 둘이서 함께 하기도 한다. 진행의 방식은 ‘낭독’ 방식이다. 낭독하는 내용은 일이 생기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나 현장에서 순간순간 반응하는 두 가지가 있다. 공연하는 사람은 매구마다 통하는 숫자, 박자, 유머를 적절히 섞는다. 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청중을 즐겁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공연한다. 간단히 말해 장타령으로, 두 개의 골판이나 참대쪽에다 방울을 달고 그것을 치면서 하는 타령이라 이해하면 쉽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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