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수 팽덕회, 소년시기 걸식했던 옛 일을 잊지 않았다
역사는 결국 역사다. 허식으로 덮어씌울 필요가 없다. 이 점은 현대중국의 혁명가, 군사전문가 팽덕회(彭德懷, 1898~1974)의 공명정대했던 성격과 비교하면 사실과 평가 사이에 천양지차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훈, 탁월한 영도자라 평가받는 팽덕회는 자신이 젊었을 때 구걸하고 다닌 거지 출신이라는 사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거지 생활은 그의 일생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팽덕회는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
내가 만 10세가 됐을 때 모든 벌잇줄이 끊어져 버렸다.
정월 초하루, 이웃 부잣집에서는 연일 폭죽을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밥 지을 쌀 한 톨이 없었다. 둘째동생을 데리고 처음 구걸하러 나섰다.
유마탄(油麻灘)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진(陳)선생님 댁을 찾아가 구걸하였다. 선생님은 초재동자(招财童子, 민간에서 재물을 불러온다고 믿는 신)이냐고 묻자 나는 그냥 거지라고 대답하였다. 내 둘째동생 팽금화(彭金華)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밥 반 사발, 조그마한 고기 쪼가리를 얻었다.
우리 형제 둘은 황혼이 돼서야 집에 돌아갔지만 쌀 2승조차 구걸하지 못했다. 나는 배고파 혼미해졌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둘째동생이 오늘 형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하자 할머니께서 나물국을 끓여 내게 먹이셨다.
정월 초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초이틀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4명이 함께 나가 쌀을 구해오자.”
나는 문지방에 서서 쌀을 구걸하는 것은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할머니가 말했다.
“가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어제 내가 가겠다고 했을 때도 네가 반대하지 않았느냐. 오늘은 네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가족 모두 산채로 굶어죽으라는 말이냐?!”
찬바람이 살을 에듯 불어오고 눈꽃은 흩날렸다. 나이 70이 넘은 호호백발 노부인이 조그만 발에 손자 두 명(셋째동생은 4살이 채 되지 않았다)을 데리고 지팡이 짚고 비틀거리며 나섰다. 그걸 보는 나는 예리한 칼로 심장을 찌르는 듯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나는 낫을 들고 땔나무 하러 산에 올랐다. 10문(文)을 받고 땔나무를 팔아 소금 한 포와 바꿨다. 땔나무 할 때 마른 나무 그루터기에 자생한 버섯을 발견하고 캐왔다. 한 솥에 넣고 끓여 나와 아버지, 큰할아버지가 먼저 먹었다.
할머니와 동생들은 저녁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밥 한 봉지와 쌀 3승을 구걸해 왔다. 할머니는 밥을 버섯탕에 넣고 끓인 후 큰할아버지, 아버지, 나에게 주었다. 내가 먹지 않으려 하자 할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얻어온 밥을 네가 먹지 않겠다고 하니, 먹는다면 우리 같이 살 것이고, 먹지 않는다면 우리 같이 죽자!”
그 일을 기억할 때마다 지금까지도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난다. 오늘도 역시 그렇다. 더 이상 쓰지 않으련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어찌 몇 백 번에 그치겠는가!
……
동년, 소년 시절에 겪은 그런 빈곤한 생활은 나를 단련시켰다. 이후 삶에 있어 나는 유년의 어려움을 추억하면서, 스스로 타락하지 않도록 채찍질하면서 가난한 인민의 생활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나는 유년의 생활 경험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솔직하고 성실하며 감동적인 자술서를 읽으면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탁월한 공적을 쌓은, 사심 없고 두려울 것이 없는 숭고한 팽덕회의 품격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유감인 것은, 그러한 개국공신을 중국은 그의 일편단심에 마땅히 보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지보다도 못한 대우를 해, 처참한 노년을 맞게 했다.
어릴 때에 거지가 되지 않으려 했었고 사람들을 거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려고 목숨 걸고 혁명에 참여했었다. 거지에서 대원수가 되어 많은 거지를 구원했음에도 자신은 결국, 거지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 역사의 참극이요 중국의 치욕이다.
자, 이제 다시 원래 주제인 ‘제왕과 거지’로 돌아가자.
거지와 황제의 인연 :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
명 왕조 개국 황제가 거지 출신이라는 역사 때문일까, 명·청 이래로 민간에는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참인 양 구전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희곡가 겸 희곡이론가로 유명한 이어(李漁)은 그 민간고사를 바탕으로 통속소설1)을 썼다. 소설 첫머리 창사 「옥루춘(玉樓春)」은 이렇다 :
“호한(好漢)은 여태껏 배부르기 어려웠고 가난은 거지가 되어도 해결하지 못했다. 돈을 얻어도 예전과 다름없이 건너기 위태로우니 기꺼이 도랑에 빠져 죽어 아사자 되기를 원하나니. 거지가 동전을 구하기는 쉬워도 거지 명성이 좋아지기는 어려웠어라. 누가 그 무리를 유명하게 했는가, 그저 벼슬한 이가 적은 까닭이네.”
말하는 바는 ‘명 왕조 정덕 연간에 거지 한 명의 장점’이다. 이어는 말했다 :
“세상 사람들은 거지는 비천하고 더러워 높은 곳까지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어찌 그들을 칭찬하는 것인가? 모르긴 해도 밥을 얻어먹는 것은 부끄럽지만 실패한 영웅이 뒷걸음질 친 것이요 실의에 빠진 호한(好漢)이 뒤처진 것이라, 다른 나쁜 짓하는 것과는 다르기에 그렇지 않을까.
세상 직업을 끝부터 거꾸로 세면 세 가지 종류의 인물이 있다. 첫 번째 하류 인물은 강도 도둑이요, 두 번째 하류 인물은 기생과 배우, 심부름꾼이요 세 번째 하류 인물이 거지 무리다.
거지는 강도질이나 도둑질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생과 배우, 심부름꾼을 하찮게 여기는 까닭이다. 신중하게 교류하며 직업을 골랐기에,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상에 돈 있는 사람은, 거지를 만나서 가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면 되고 거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하면 된다.
무기력한 거지를 보면 두 번째 종류의 하류 인물 부류와 비교해보면 된다. 마음을 헤아려 보자. 거지로 전락한 사람들이 기생, 배우, 심부름꾼이 되려한다면 어찌 먹을 밥을 구하지 못하고 쓸 돈을 구걸하지 못하여 그런 고뇌의 생애를 살아가겠는가.
하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 모두는 그런 일을 못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퉁소를 불었던 오상국〔伍相國, 오자서(伍子胥)〕이나 영락해 실의에 빠졌던 정원화(鄭元和)가 아니라 하겠는가.
많든 적든 간에 몇 문(文)으로 그들을 구제하면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모욕하면 절대 안 된다. 독한 말로 욕설을 퍼부어도 안 되고 고함지르고 발길질한 음식으로 그들을 깔보면 안 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乞兒行好事,皇帝做媒人)』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