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음력 7월 7일에, 여대요의 장 씨 두목이 대련의 흑석초(黑石礁) 밖에서 그에게 즉위 의식을 거행하였다.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낸 후 그가 관할할 27명의 거지 명단을 건네주었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4년여 만에 단동 개방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때부터 그는 역에서 잠을 청하지 않아도, 음식점 접시를 핥지 않아도 됐다. 비수 하나와 안테나선을 감아 만든 쇠 채찍 하나에 의지해 호의호식하였다.
구걸을 위주로 하거나 구걸만 하는 기존의 단동 개방의 생계 방식을 크게 바꿨다. 힘들이지 않고 남의 물건을 손에 넣는 방식이었다. 상대에 따라 방법을 바꾸고 구걸하지 못하면 훔쳤다. 개방의 규정을 제정하여 개방을 강성하게 만들었다.
점차 부하 중에 유형이 다른 용장 몇몇을 배양하였다. 예를 들어 ‘법야(法爺)’가 있었다. 50세 전후로 키가 컸으며 약간 곱사등으로 구레나룻이 나 있었다. 발 한 쪽을 좀 저는 귀주(貴州) 출신이었다.

대련의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동향인을 만났다. 여러 해 재난을 당하여 고향의 집안사람들도 타향으로 이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거지 생활을 하고 있던 동향인에 이끌려 단동 개방에 가입하였다.
그는 학문 소양이 있어 글을 알았다. 1년 후에 ‘법야’에 임명되어 단동요 구성원의 활동 상황을 순시하는 책임을 맡았다. 개방 규칙을 어기는 자를 직접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는 냉혹하고 무정했다. 단동 개방 중에는 규율을 어기는 반도가 거의 없었다. 구걸, 강요, 더듬어 꺼내고, 챙기는 것 모두에 각별히 힘을 쏟았다.
이제 ‘유연한 것’으로 자리를 잡은 자들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미신에 의지하여 사기 쳐서 얻은 방주다.
산동 제남에 스스로 왕 씨라고 하는 거지가 있었다. 기름레드 빛 피부에 새까만 수염을 기르고 한 쪽 팔이 잘린, 우성(禹城) 감리보(甘里堡) 사람이었다. 온종일 막대기를 짚고 큰 포대를 지고서는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저녁에 거지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면 기독교의 『요도문답(要道問答)』1)을 꺼내 사람들에게 읽어주면서 설교하고 포교하였다.
“교회를 믿으면 정신의 의탁처가 되고 영혼이 구원받게 되나니. 예수께서 선행하고 덕을 쌓으라고 가르쳤나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착한 덕행을 쌓아서 좋은 사람이 되면 영혼은 영생을 얻으리라. 천국에 가게 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돌아갈 집이 없는 모든 유태인을 동정하셨고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동정하셨나니. 당신이 편안하게 밥을 구걸하면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오. 관건은 좋은 덕행을 쌓는 것이오. 『교의(敎義)·십계(十戒)』에서 말했나니.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마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거지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할 정도로 간곡하게 포교하였다. 그러자 그의 곁에는 신도가 생겨났다. 자원해 그를 ‘교부(敎父)’로 모셨고 심지어 어떤 때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보기도 했다.
그의 말은 지고지상의 권위 있는 언어가 되었고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었다. 신도들은 고분고분 순종하였다. 본인 자신은? 그렇게 종교 미신을 이용하여, 그 마취제를 가지고 다른 거지 무리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분화되어 나와, 개방 방주와 같은 권력을 누리는 거지가 되었다.
개방 패주의 지위를 획득하는 방법 중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는 유연함과 강함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다.
동북지방의 요충지 심양(瀋陽), 역전 광장 중소인민우의기념탑 아래에 자주 출몰하는 ‘탑 아래 사령관’으로 유명한 개방 두목이 있었다. 후(侯) 씨로 ‘후 장님’〔할자(瞎子)〕이란 별명을 가졌다. 반백의 나이의 현지인이다. 도둑질과 사기로 8년 유기징역을 받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직업이 없이 빈둥거리자 아내는 이혼 후 떠나버렸다. 그는 가산을 탕진하여 거지로 전락하였다.
후 장님은 보잘것없는 모습에 자랑할 만한 기술이라고는 없었지만 현지 개방의 7대 방파를 견고하게 통치하였다. 방파로는 식당을 전전하며 구걸하는 ‘절라(折羅)’파, 강편을 주워 파는 ‘강대괴(扛大塊)’파, 소매치기 조직 ‘노세(老細)’파, 피를 팔아 생활하는 ‘도선(桃線)’파, 여자를 이용해 협박하며 재물을 강요하는 ‘견로(牽老)’파, 푼돈을 구걸하는 ‘노궤(老饋)’파 등등이 있었다.
각 방파에는 자신들의 두목이 있었지만 그 두목 및 구성원은 모두 후 장님에게 공물을 바쳤다. 조금 태만하면 약간의 ‘무서운 얼굴빛’의 꾸지람을 받았다. 그는 노련하고 용의주도한 현지인이었다.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고 폭력까지 행사하였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양수겸장 치면서 현지 개방의 패주가 됐다.
과거에 그는 ‘공안부’에서 임시 노동자로 일하면서 몇몇을 알게 됐었다. 예전에 발행한 노랗게 변한 ‘증명서’를 수중에 보관하고 있었다. 걸핏하면 ‘증명서’를 꺼내어 그 남아있는 위력으로 거지 무리에게 사칭하였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관가’에 고발한다고 공언하며 거지들을 겁박하여 절대 복종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요남(遼南)에서 거지 셋이 심양에 갔다가 후 장님을 만났다. 그는 마치 일국의 군주처럼, 현지 토지신처럼 손을 뻗어 ‘효경하는 돈’을 요구했다. 외지에서 온 체격이 우람한 거지 3명이 어림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증명서’를 꺼내어 사기 쳤다. 상대방이 받아들고서 이리저리 훑어보더니만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후 장님은 상대방이 말 한 마디로 정통을 찌르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너희들 기다려. 내 곧 가서, 가서……, ‘관가’에 가서, 불러올 테니.”
오래지 않아 남색 제복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노기충천해 달려와서는, 요남에서 온 거지 셋을 둘러싸 두들겨 팼다. 두들겨 맞아 코가 시퍼렇게 되고 얼굴이 부어오른 셋이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상급자인 듯한 사람이 말했다.
“가자, ‘관가’로 가서 보자!”
“아닙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셋이 함께 용서를 빌었다. 당초에 ‘탑 아래 사령관’이 누구인지 몰라서 무례하게 굴었다고, 후회하고 있다고 애걸복걸하였다.
“그래? 법적으로 할까, 개인적으로 풀까?”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개인적으로 하겠습니다. 우리 돈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셋이 주머니를 털어 100여 원을 모아서 줬다.
어찌 알았겠는가, 후 장님과 서로 짜고 연극한 것임을! 그렇게 되자 ‘탑 아래 사령관’의 위명이 더 널리 알려졌다. 그를 보면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가 없게 되었다. 새로 가입하는 거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먼저 ‘탑 아래 사령관’을 진현하고 ‘후 아버지’로 모셨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Main lines of the Bible』, Goodman, Fred. S (Frederick Simoun)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