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當代) 제남(濟南)·심양(瀋陽)·상해(上海)·단동(丹東) 등지 개방의 여러 현상(5)

  • 등록 2025.04.03 15:17:24
크게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50) 권력 장악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폭력

어느 날, 14살이 채 되지도 않는 장동휘(張東輝)라는 소녀가 자무쓰(佳木斯)에서 심양으로 흘러들어왔다. 계모의 학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후 장님의 수중에 잘못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개명가(開明街) 음식점에서 ‘노대(老大)’(큰형님)가 상여금을 주면서 만남의 예를 올린 후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다. 식사 때 술을 곁들였다. 식사를 마친 후, ‘후 아버지’에게 이끌려 북시장(北市場)에 있는 여관방에서 ‘아버지’와 동침하였다.

 

알아야 한다, 후 장님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구걸하는 여자 거지 모두가 짐승 같은 작태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거지 왕국 탐밀』)

 

유사한 패거리가 있었다. 제남에 ‘영(零) 사령관’이라 부르는 거지 두목도 ‘탑 아래 사령관’과 같은 행태로 이름을 날렸다. ‘영 사령관’의 ‘영(零)’은 ‘탑 아래’가 아니라 탑 꼭대기에 거주하니, 개방 중에서 더 이상 그보다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영 사령관’도 현지인이었다. 40여 세로 관찰영(官札營) 거리에서 살았다. 별명은 ‘흑대개(黑大個)’였다.

 

그는 도둑질과 구타로 7년 형을 받았다. 만기 석방 후에 예전처럼 그냥 해이하고 방탕했다. 집안의 도구는 침대조차 남기지 않고 팔아치웠다. 현지 지역주민 센터에서 일을 몇 차례 안배해 줬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종일 빈둥거리다 나중에 아예 거지 집단에 가입하였다.

 

오래지 않아 외지에서 온 거지들이 현지에 오며는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는 되는대로 큰소리로 자랑하기 시작했다. 훈계조를 늘어놓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아느냐는 둥, 군대에 갔다 왔다는 둥, 간부였다는 둥 헛소리를 내뱉으며 단순한 자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렇게 동정하고 이해하며 안위하는 말을 하면서 많은 거지에게 호감을 사서, ‘대호인(大好人)’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중에 현지 거지와 연락하여 ‘호구조사 한다’, ‘좀도둑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외지에서 온 거지들에게 사기 쳤다.

 

 

어떤 때에는 자전거 증명서를 꺼내어 반쪽을 접은 후 아래의 ‘제남시 공안국’ 글자만 보여주고는 스스로 ‘공안국 비밀 탐정’이라 칭하면서 거지 앞에서 거들먹거렸다.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잡아가서 교도소에 집어넣겠다는 으름장은 빼먹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불량배와 뜻을 맞췄다. 훈계를 늘어놓으면서 거지들에게 진짜로 믿게 만들어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니, 그냥 따르는 게 좋다’고 여기게 했다. 그렇게 역과 천교 부근의 거지를 통제하고 졸개를 몇몇 길러 ‘관아(官兒)’로 봉하고는 순조롭게 그 일대 개방의 방주가 되었다.

 

새로 들어온 거지는 어느 누구나 그에게 보고하고 통제받도록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적 고통을 당했다. 매일 그는 개방에서 각종 ‘친견’을 받았다. 거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재판관을 충당하여 말을 듣지 않는 거지는 제재하였다.

 

어느 날, 여러 거지들이 그에게 ‘마자(麻子)’라는 거지가 10여 명에게 돈을 꾸고는 갚지 않는다고 고발하였다. 그러자 그는 ‘마자’에게 땅에 무릎을 꿇으라고 명한 후 심문하였다. ‘마자’가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자 발로 차 쓰러뜨리고서는,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면서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릴 정도로 구타하여, 생명이 위독할 지경까지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하자 ‘영 사령관’은 개방에서의 지위가 더 높아졌다. 겁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의 거지 군락』)

 

이 세 가지가 당대 여러 거지 항방의 두목이 등극하고 권력을 장악해 가는 기본 순서였다. 역시 가장 중요한 수단은 폭력이었다. 역대 강호 사회에서 ‘산을 점거해 왕 노릇’ 하거나, ‘산적 두목’의 패주 지위를 공고히 하려면 대부분 잔혹한 무력이 법보였다. 폭력을 쓰면서 길을 열었다.

 

민국 초기에, 광주(廣州)에 유명한 거지 항방 ‘관제청인마(關帝廳人馬)’가 있었다. 가장 성행할 때에는 5만여 명의 거지가 군집했다. ‘관제청인마’는 처음에는 서관(西關) 일대에 운집했다.

 

방주는 화림사(華林寺)에 머물면서 두목이 되었다. 두목은 처음에는 세습이었다. 나중에는 북방에서 진기풍(陳起風)이란 이름의 거지 두목이 내려온 후 무력으로 현임 방주 자리에 앉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소림사에서 행각승으로 있으면서 권법을 배웠었다. 도망친 졸개들이 수하로 곁에 있었다. 그들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개방에서 세력을 넓힌 후 얼마 되지 않아 방주가 되어 세습제를 없앴다.

 

그가 방주가 되니 관제청인마는 광주에서 영향력이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 어떤 때에는 경찰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역 순경은 그들과 결탁하여 한패가 되어 못된 짓을 일삼으면서 한 동안 해악을 끼쳤다. 무력을 행사하고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못된 짓이란 짓은 다 저질렀다. 지방의 혼란을 일으키는 세력의 중심이었다.

 

그 세력은 중국 개방 흑사회 중에서 오래토록 사라지지 않는 법보가 되었고 전통적 악습이 되었다.

 

“우매, 야만, 방만, 흉악, 진부하고 완고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방탕한 것이 거지의 특성인데, 거지의 우두머리는 어떻게 그의 신민을 통치할 수 있었는가?”

 

당연히 주로 폭력을 운용했다. 당대 중국 거지에 대한 보고서를 보면 실례를 들면서 탐구할 가치가 있는 이 문제의 답을 내놓고 있다.

 

거지들이 폭로한 내용이다.

 

“무한(武漢)시 공안국이 1986년 가을에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지 않았다면 거지들은 대표를 파견하여 황학루 아래에서 ‘거지 대표 대회’를 거행하여 거지 왕국의 전국 수령을 선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거지 군락에 응집력과 구심력은 분명 존재했다.

 

공통적인 처지와 생활이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응집할 수 있는 힘의 기초를 갖추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거지 우두머리의 통치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거지들의 금전을 강탈하고 구타하면서 괴롭히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고 통치하는 방법이었다. 거지들은 이치를 따지지 않았다. 충심으로 복종하였다. 그 중심에는 ‘무력’이 있었다.

 

“무능한 무리를 상대하는 것을 입의 효능이다. 포탄이 터져도 놀라지 않는 인물을 상대하는 것은 손의 효능이다.”

 

이것이 거지 우두머리가 신봉하는 옥조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u.ac.kr
<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4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원노형5길 28(엘리시아아파트 상가빌딩 6층) | 전화 : 064)748-3883 | 팩스 : 064)748-3882 사업자등록번호 : 616-81-88659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제주 아-01032 | 등록년월일 : 2011.9.16 | ISSN : 2636-0071 제호 : 제이누리 2011년 11월2일 창간 | 발행/편집인 : 양성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성철 본지는 인터넷신문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11 제이앤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nuri@j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