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항주(杭州) 단두(團頭) 김노대(金老大) (1)

  • 등록 2024.11.06 13: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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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33) 단체 우두머리 ‘단두’ ... 개방의 방주(幇主)

현재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을 보면 이른 시기에 출현한 중국 개방(丐幇) 형태를 기술한 문헌기록은 송원(宋元) 화본(話本)소설 중 『김옥노봉타박정랑(金玉奴棒打薄情郞)』〔김옥노가 박정한 낭군을 몽둥이로 때리다〕에 나타난 ‘단두(團頭)’다. 단체 우두머리라는 뜻인 ‘단두’는 개방의 방주(幇主)다.

 

이야기는 송대 항주에 7대까지 세습한, 도시 전체의 거지를 통할하는 단두 김노대(金老大)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거지가 구걸해 온 음식과 돈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거지에게 고리대나 일숫돈을 놓아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착취까지 일삼았다.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이 편찬한 『전상고금소설(全像古今小說)』 제27권 『김옥노봉타박정

랑』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때는 송나라 소흥(紹興)1) 연간에 임안(臨安)은 비록 건도(建都) 지역이요 부유한 고향이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거지가 적지 않았다. 거지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자를 ‘단두’라 부르며 거지 무리를 관리하였다.

 

거지 무리가 구걸해 오면 단두는 ‘일두전’2)을 받았다. 비나 눈이 올 때면 단두는 멀건 죽을 쒀서 구걸할 곳이 없는 거지에게 먹였다. 낡은 옷도 단두가 관리하였다. 그래서 거지들은 자신을 낮추어 노예처럼 단두에게 복종하고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단두는 창기와 놀지도 않았고 도박도 하지 않았다. 의연하게 모두를 위하여 일했다. 단두는 관례적으로 구걸한 물건을 받아내어 거지에게 고리로 착취하였다. 단두는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며 한시도 직업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단지 한 가지, ‘단두’에 대한 시중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여 농지를 마련하고 몇 대에 걸쳐 뜻을 얻었더라도, 결국은 거지 두목 출신이었다. 일반 백성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존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서만 으스대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양천(良賤)’ 두 글자로만 헤아린다면 창녀, 배우, 관아의 하인, 졸개 4부류를 비천하다 했지만 거지는 그 축에는 들지 않았다. 거지는 돈이 없을 뿐 몸은 헌데가 없지 않던가.

 

예를 들어 춘추시기에 오자서(伍子胥)는 환란을 피하는 와중에 오시(吳市)에서 퉁소를 불며 걸식하였고 당나라 때에 정원화(鄭元和)는 가랑(歌郎)3)이 되어 『연화락(蓮花落)』을 부르다가 나중에 뜻을 이루어 비단 이불을 덮지 않았던가. 모두 능력이 특출하였던 거지였다.

 

그렇기에 거지는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기는 했지만 창녀, 배우, 하인, 졸개의 비천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 지금부터는 항주에 있는 단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노대(老大)다. 조상에서 그까지 7대에 걸쳐 단두를 지내어, 완전한 가문을 이루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밭에서 농사지으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곡물 창고에 곡식이 가득했고 주머니에는 여윳돈이 많아 아랫사람들에게 변돈을 놓았다.

 

갑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부자 축에는 들었다.

 

김노대는 기개가 있어 단두 자리를 족인(族人) 김라자(金癩子)에게 넘겨주었다. 자신은 이미 모든 걸 향유했다며 거지에게 달라붙지 않았다. 그렇다하더라도 동향사람들은 습관대로 그를 단두라 불렀다. 김노대는 50여 세로 아내를 여의고 아들 없이 옥노(玉奴)라는 외동딸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김옥노가 박정한 낭군을 때린’ 민간 전설이 생겨났다. 줄거리는 이렇다.

 

김노대는 딸이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것을 이용하여 사인(士人)에게 시집보낼 생각을 했다. 중매를 거쳐 가난한 수재 막계(莫稽)가 데릴사위로 김 씨 집안에 들어갔다. 돈 한 푼도 쓰지 않고 사람과 재물 모두 얻은 셈이었다. 김옥노의 권유와 지지아래 막계는 급제 후 무위군(無爲軍) 사호(司戶) 관직을 받았다. 급제는 하였으나 이웃의 어린아이가 손가락질하며 “김 단두의 사위가 관원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막계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오늘과 같은 부귀를 누릴 수 있다면 왕후 귀척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못할 게 뭬 있겠는가. 단두를 장인으로 모셔야 한다면 평생 치욕이지 않은가! 자녀를 낳아 키워도 역시 단두의 외손이니 이야깃거리로 전해지지 않겠는가. 이제 단호히 끊지 않으면 안 되겠다. 재삼재사 숙고하지 않으면 결국은 후회하게 될 게다.”

 

이렇게 나쁜 마음을 먹고 밤중에 부임하는 배에서 처를 밀어 강에 빠뜨려 버렸다. 다른 좋은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강물에 빠진 김옥노는 죽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회서(淮西) 전운사(轉運使) 허덕후(許德厚)의 양녀로 들어갔다.

 

그런 후에 막계를 다시 데릴사위로 불러들였다. 동방화촉을 밝히는 밤에 막계는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그런 후에는? 둘은 다시 사이좋게 되었다. 단두 김노대를 임지로 데리고 가 죽을 때까지 봉양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은 남송 고종(高宗) 조구(趙構)의 두 번째 연호다. 32년가량 사용하였다. 고종(高宗)이 양위하고 난 후에 효종(孝宗)이 융흥(隆興)으로 개원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건염(建炎) 5년 1월 1일(1131년 1월 31일)에 연호를 소흥(紹興)으로 개원하였다. 소흥(紹興) 32년 11월 16일(1162년 12월 23일)에 연호를 융흥(隆興)으로 정하였다.

2)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내는 돈, 옛날에 거지는 매일 구걸해 온 소득에서 일정 분분을 상례적으로 거지 우두머리에게 납부하였다. 매일매일 납부했기에 ‘일두전(日頭錢)’이라 불렀다.

3) 옛날 장례식 때 만가(挽歌)를 부르는 사람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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