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태종, 거지를 죽이는 계책을 실행하다

  • 등록 2024.05.28 15: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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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13) 제왕(帝王)과 거지 (3)

안영, 제경공에게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르라고 권하다

 

중국 역대 제왕 중에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혼용(昏庸)의 무리가 적지 않았으나 그래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대부분은 덕이 있는 정치, 어진 정치를 힘써 실행하였다. 혹간 하는 짓이 장식장 속 장식과 같은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한번이라도 노력하기는 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고위는 특히나 어리석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춘추시기에 제(齊)경공(景公)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어린 거지를 보고는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구나 말했다고 전해온다. 곁에 있던 재상 안영(晏嬰)은 황제께서 계신데 저 아이가 어찌 돌아갈 집이 없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사람을 파견하여 저 어린 거지를 맡아 기르게 한다면 모두가 그 일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라고 권했다.(『안자춘추』)

 

무슨 뜻인가? 큰 힘을 들이지도 않고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른다면 백성의 찬양을 받게 되고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며 인정을 베푸는 국군이라는 미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다.

 

송 태종, 거지를 죽이는 계책을 실행하다

 

976년, 송(宋) 태종(太宗) 조경(趙炅)1)은 황위를 계승하여 국호를 태평흥국 원년으로 바꿨다. 그는 늘 어떻게 하면 내외의 사람을 자신에게 복종시킬 것인가 고민하였다.

 

어느 날, 경성의 거리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재물을 얻지 못하자 상점 문에 기대어 욕을 해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점 주인이 재차 사과했다. 그래도 그치지 않고 계속 함부로 욕해대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위에서 구경하다가 어떤 사람이 갑자기 덤벼들어 칼로 거지를 찔러 죽이고는 욕지거리 한 후 칼을 버리고 사라졌다. 저녁 무렵이라 날이 어두워 흉수를 쫓았으나 체포하지 못했다.

 

이튿날,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풍속을 어지럽히는 오계(五季)2)의 악습이라며 대노하였다. 대담하게 백주대낮에 살인을 저질렀으니 기일 내에 체포하여 사건을 마무리 지으라고 명했다. 기한을 넘겨 벌을 받을까 두려웠던 관리가 애써 규명하다가 상점 주인이 화를 참지 못하여 거지를 죽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건 결과를 보고하자 태종을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처럼 심혈을 기울여 직무를 수행하여, 나를 위해 공을 세웠구려. 그 자를 죽인 칼을 내게 건네라.”

 

며칠 지나지 않아 공술한 내용과 칼을 황제에게 올렸다. 태종이 물었다.

 

“심문하였는가?”

 

답했다. “심문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곁에 있던 내시에게 자신의 칼집을 가져오라 하고는 칼을 칼집에 넣고서 옷소매를 툭툭 털며 일어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함부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닌가?”

 

그렇다, 이 사건에는 비밀이 있었다. 태종이 거지를 죽인 일을 분노에 쌓인 척 엄하게 추궁했던 것은, 교활하게도 그것을 빌미로 민심을 얻는 한편 무력으로 백성에게 위협하려던 의도였다.

 

일전쌍조(一箭雙鵰), 무고한 거지(아마도 변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를 죽였을 뿐 아니라 관리에게 추궁당하다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상점주인도 살인죄로 극형에 처해질 게 분명할 지니, 무고한 원귀가 둘이나 생긴 게 아닌가.

 

거지의 피로 권위를 세웠다. 거지와 같은 천민이 죽임을 당하는 것조차도 천자는 분노하고 용납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백성에게 심어주었으니, 실로 자식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태종은 머리를 헛되이 쓰지 않았다.

 

송나라 간신 채경(蔡京)의 아들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 채조(蔡縧)가 나서서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고 태평성세처럼 꾸미는 것을 주제로 한 필기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 그 일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천추의 공과는 후인이 중의를 거치는 법이다. 식견이 있는 사람은 이 역사상 보기 드문, 일부러 지어낸 원죄, 날조, 오심 사건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터이다.

 

태종 조경이 인정을 베푼다는 위선의 얼굴 뒤에는 원귀의 선혈과 한이 서려 있다. 재주 피우려다 일을 망친 것이요,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되었다. 혁혁한 천자의 눈에 초민의 생명이 뭬 그리 대수이랴. 하물며 거지와 같은 천민은 더 말해 무엇 하리!

 

제 경공, 송 태종과 같은 군주 앞에서, 똑같이 한 시대 군주로 군림했던 고위이지만 격이 크게 뒤진다. 그럼에도 송 태종하고 비교해보면 고위는 거지처럼 분장해 구걸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조광의(趙匡義, 939~997), 북송(北宋)의 제2대 황제(976~997 재위),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본명은 조광의(趙匡義)로, 형 태조가 황제가 되자 피휘하여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에는 경(炅)으로 고쳤다. 송 태조 조광윤의 동생으로 즉위 과정과 연이은 친족 숙청은 상당한 의문점이 남지만, 나라를 잘 다스렸다. 요(遼)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978년 오월(吳越)에게 항복받고 이듬해 북한(北漢)을 멸망시켜 오대십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2) 오계(五季)는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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