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의 구걸 ... 절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지키려고 한 행동

  • 등록 2024.05.02 13:4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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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10) 나쁜 길로 빠진 무리는 아니다

거지와 마의(馬醫)

 

전국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가난 때문에 곤경에 빠지자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가 미움을 샀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여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게 되자 거지는 전(田) 씨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마의(馬醫, 수의사)의 조수 일을 하면서 연명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비웃으며 말했다.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거지가 답했다.

 

“천하에 거지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겠소? 내가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어찌 거지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당시에 마의의 지위는 비천하였다. 봉건사회에서는 역대로 비천한 직업군에 속했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싫어해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자 마의를 도와 노동하며 입에 풀칠하면서라도 살아가는 것은 원래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도 비웃음을 받고 조롱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거지를 다시 길거리로 내몰아 비럭질하며 살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거지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세속의 편견은 가난해 마의를 도우며 살 수밖에 없는 거지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열선전』 속 거지, 한음생

 

위진(魏晉)시기에 장안(長安) 위교(渭橋) 아래에 거지 한음생(漢陰生)이 살았다. 늘 거리에 나가 걸식하였다. 시장사람들은 거지를 매우 싫어해서 그에게 똥을 뿌리기도 하였지만 이튿날 한음생이 걸식할 때면 의복은 예전처럼 어떤 오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관리가 그를 붙잡아다 형벌을 가했지만 한음생은 여전히 시장에서 걸식하였다. 다시 잡아다가 사형을 내리려고 할 때에서야 한음생은 시장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하였다.

 

그런데 이전에 한음생에게 똥을 뿌렸던 사람의 집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허물어졌고 1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장안에는 일시에 통속적이 말이 떠돌았다.

 

“거지를 만나거들랑 미주를 주시구려, 집이 망하는 흉사를 피하시게.”

 

무슨 말인가? 거지를 만나거들랑 먹을 것을 나주어 주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당한다는 협박(?)까지 하였다. 이 이야기는 『열선전(列仙傳)』에도 보이고 불교 경전인 『법원주림(法苑珠林)』에도 보인다. 민간고사다.

 

인과응보설을 이용해 세상 사람에게 거지를 무시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어쩌면 정말로 한음생이 암암리에 자기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에게 복수해 살해까지 했을 수도 있을 터이고.

 

상서령(尙書令), 어린 시절에 구걸했다가 모욕당하다

 

남북조(南北朝)시기 남조 양(梁)에 유명한 문학가 심약(沈約, 441~513)은 상서령이라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였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친구에게 부탁해 쌀 백 곡(斛)을 얻었다. 그러자 집안어른이 모욕을 주었다. 심약은 화내며 얻어온 쌀을 쏟아버리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심약이 입신출세한 후에는 그 일에 개의치 않았다.

 

당시 친속에게 먹을 것을 구했을 뿐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던 심약이 그런 경멸과 치욕을 받은 것을 보면, 가난해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게 된 거지들이 받았을 냉담과 치욕의 정도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세속관념은 그랬다.

 

이와 반대로, 역대로 의롭지 못한 부자를 죽여 빈민을 구제한 많은 의협의 거사가 기록되어 있다. 부자가 되기를 빌고 가난을 없애려는 여러 가지 풍속습관이 형성되었다.

 

어느 날엔가는 빌어먹어야 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그런 음험하고 악랄하게 사람을 해치는, 편견의 족쇄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러한 심리는 본래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련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을 이끌어내어 거지에게 즐거이 베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세속관념에 순응해 거지를 부끄러워하고 욕되게 하면서 경멸하는 것이 능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거지는 슬퍼하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했던 대상으로, 이중 심리의 표상이었다. 중국 민족문화 전통 중 그런 모순된 심리 현상, 모순된 논리 관념은 실제 많고도 많다.

 

중국의 민족문화는 그러한 기묘하고 특이하게 보이는 모순 상태에서 발생하였고 발전했으며 오랫동안 누적되어 형성되었다.

 

장(張) 씨 거지, 교묘하게 농짓거리하다

 

오대시기 후량(後梁)의 마지막 황제 주진(朱瑱)이 권력을 누리던 용덕(龍德) 연간(921~923)에 장함광(張咸光)이라는 거지가 걸식하며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에 유월명(劉月明)이라는 거지도 있었다.

 

그 둘은 걸식하면서 많은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고 다니는 공통적이 특징이 있었다. 권세가 집에 가서 걸식할 때에 식기를 뺏기게 되면 재빨리 소매에서 다른 것을 꺼내곤 하였다.

 

부마인 간의(諫議) 온적(溫積)이 개봉부사를 맡고 있을 때 장함광이 부호 가문을 한 집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면서 자신은 온적에게 의탁하러 간다며 하직인사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누구 소개로 가는 것이냐고 묻자 장함광이 답했다.

 

“기록을 보자면 이번 거행은 분명 후한 대우를 받을 것이요. 대간에서 만든 『갈산잠룡궁상량문(碣山潛龍宮上梁文)』를 보면 ‘만두는 그릇과 같고 빵은 채와 같다. 제멋대로 유월명 주부를 죽였고 기뻐하며 장함광 수재를 죽였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분명 환영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는 주변 사람 모두 배꼽 잡고 쓰러졌다.

 

이것을 보면 당시 거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면서 모욕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법도를 벗어나는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간혹 이판사판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상점이나 마을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물론 한음생처럼 그렇게 집을 부숴버리고 사람을 죽여 보복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또한 절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을 뿐, 구걸하면서 나쁜 길로 빠진 무리는 아니며 불량배나 악한이 참여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건달이나 불량배도 부끄러움 없이 거지 무리에 끼어들기도 했지만 극소수였다. 실제로 거지의 도리를 지키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총괄적으로 말해, 당시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나쁜 짓을 저지르며 해악을 끼친 거지의 사례는 극히 적었다. 이 점이 나중에 거지〔걸(乞)〕와 의협〔협(俠)〕을 서로 연결시켜 받들며 지키는 덕의(德義)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중에 거지 구성원이 불량배 범죄 집단으로 전락해, 깃발을 세우고 단체를 결성해 이용하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후에는 거지 이름을 빈 집단은 나날이 타락해갔다. 사회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전이하면서 만연되었다. 떼어 내야 하는 악성 종양으로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빈곤의 역사와 내재적 모순이 가득한 중국민족의 문화전통을 감안해보면 거지라는 그러한 공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현상, 즉 거지를 없애기에는 손바닥 뒤집듯 하루 이틀에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회를 개조하고 사회가 끊임없이 문명으로 향해나갈 수 있도록 촉진하면서, 발전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고쳐나가야 하는 중대하면서도 종합적인 숙제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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