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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임진과 판관 조인후...충암사 세우고 열녀 김천덕 기리다

목사 임진(林晋:1526~1587)과 판관 조인후(趙仁後)

 

‘무인으로 명망이 있어 영남․호서남․서북변의 5도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장수 노릇 수십 년간 재리(財利)를 전혀 챙기지 않아 집에 좋은 방석 하나 없었고, 영변부와 탐라부에는 정청비(政淸碑)가 서 있다(諱晉 以威名 爲嶺南湖西南西北邊五道節度使 爲將數十年 不私貨利 家無厚茵 寧邊耽羅府 皆有政淸碑).’

 

목사 임진(林晋:1526~1587)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무인이지만 청렴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관직생활을 알 수 있다.

 

판관 조인후 또한 김상헌의 『남사록』 관풍안 명환조에 ‘폐습을 없애고 학문을 일으켰으며 청렴, 간명하였고 자신을 단속 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과 조인후 이 둘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도민을 잘 보살폈음을 다음 두 가지 일을 통해 알 수 있다.

 

 1.. 귤림서당의 전신인 충암사 건립

 

 임진은 1577년(선조 10) 8월에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2년 후인 1579(선조 12) 10월에 떠났다. 그가 재임 하는 동안 기억할 만 일로는,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재임기간:1577.5~1578.3)가 임진 목사와 의논하여 귤림서원의 전신인 충암 김정(金淨)의 사당인 충암사(冲庵祠)가 건립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충암사 건립의 전말은 그의 아들 백호 임제(林悌:1549~1587)가 지은 기문에 잘 나타나 있다. 과거에 급제한 아들이 부친을 뵈러 왔다가 판관 조인후의 부탁으로 기문을 짓게 된 것이다. 충암사는 훗날 오현을 배향하는 귤림서원으로 사액되어 제주유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곳이다.

 

아래에 백호의 충암묘기 일부를 소개한다.

 

 충암묘기(冲庵廟記)

 

 옛날 사우(祠宇)는 두 가지 경우에 세웠다. 공적이 보답 받을 만하면 세웠고, 덕화가 세상을 깨우칠 만하면 세웠던 것이다. 사우는 장차 잊혀지지 않고 받들어 추모함으로써 그 영령들을 오래도록 사당에서 제사 받들 수 있게 하는 곳이다. 따라서 반드시 세상에 빼어난 생애를 보이는데, 그의 삶과 죽음은 기운의 운수와 관련되어 있다.

 

선생은 중종 때에 이 곳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사사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59년째 곧 선조 즉위 11년에 우리 유학자 조후가 이 고을 판관으로 부임하여 폐단을 시정하고 피폐한 민생을 되살려 교화를 크게 일으켰다. 이에 고을 원로들에게 물어 선생이 머물렀던 집터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제주성 안 동남쪽 모퉁이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 가벼운 차림으로 올라가 보고는 서글픈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학문은 공자와 맹자를 따랐고, 뜻은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과 통하였다. 그러나 뜬구름이 해를 가리자 떠돌이 신세가 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뜻만 품은 채 변방의 황량한 땅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풍속이 다른 이 고을은 어리석어 추모함을 알지 못한다. 차귀당이나 광양당의 음사(淫祠)만을 숭상하니, 이는 비단 이 백성들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 유교의 불행이기도 하다. 하물며 선생은 인(仁)에 살며 의(義)로써 행동하니 그 덕(德)은 지극하다 할 것이다. 또한 나약한 이들에게는 그 뜻을 굳게 세워주고 탐오한 이들에게는 염치를 알게 하였으니 그 공(功)도 크다. 공적으로 보나 덕화로 보나 이는 사당에 모실만 하지 않은가”

 

이에 절제사와 의논하여 목수를 부르고 재목을 모아 세 칸의 사묘(祠廟)를 세우는데 겨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다. 단청을 그윽하게 꾸미고 담장까지 두르니, 조두백마(潮頭白馬)가 그 사이로 나타날 듯하였다.

 

조판관은 이에 관노 한 사람을 복호(復戶)하여 묘지기[廟直]로 삼았다. 또 제주향교에 약간의 곡식을 두어,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걷은 이자로 해마다 제수의 밑천으로 삼아 봄가을로 향불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판관의 뜻이 성실하다고 할 만 하다.

 

 

아! 기묘년(1519, 중종 14)의 참화를 차마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승냥이와 이리가 사납게 물고 도깨비 같은 요사한 것들이 술수를 부려 임금의 총명을 속여 가리니 충신의 무리들이 점차 쇠퇴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1)의 사화에 이르러서는 사림들이 텅 비고 우리 유학의 막힘이 극에 달했다.

 

이제 하늘의 운수가 좋게 돌아오니 소인은 물러가고 군자가 들어왔다. 현명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고 맑은 논의가 그치지 않으니, 곤월(袞鉞)의 조처도 유명(幽明)의 간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이 사당의 건립은 진실로 늦출 수가 없으며, 조판관이 이 변방에 유교의 가르침을 베푸는 일 또한 더더욱 소중한 것이다. 조판관의 이 일은 매우 훌륭하다 할 만하다. 아! 선생이 돌아가시자 도(道)가 막혔지만, 선생의 사당이 세워지니 도가 크게 열린다. 이 어찌 그의 삶과 죽음이 기운의 운수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조판관의 이름은 인후, 자는 유보(裕甫), 본관은 평양이다. 금성(錦城) 임제는 절제영에 부친을 뵈러 왔다가, 마침 이 훌륭한 일을 직접 보고 판관의 뜻을 아름답게 여겼다. 이제 또 판관의 요청으로 기문을 짓고 노래를 붙여 제사를 올린다. 때는 만력 무인년(1578, 선조 11)이다.

 

 2. 열녀 김천덕 정표

 

 또한 판관 조인후의 보고에 의거해 임진 목사가 애월읍 곽지리의 열녀 김천덕(金千德)을 조정에 알려 정표(旌表)하게 하였는데, 천덕에 관한 전기 또한 임제에 의해 지어져『남명소승(南溟小乘)』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 곽지리 사람 사노(私奴) 연근(連斤)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천덕(千德)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용모가 고왔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살림을 꾸린 지 20년쯤 지났을 때다. 남편이 공물 수송 때문에 육지로 가다가 화탈도 부근에서 배가 침몰되어 죽었다. 천덕은 남편의 죽음으로 눈물이 흘러 다하자 이어 피가 흘렀다. 3년 동안 애통해하며 제사상 올리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그러고도 삭망이나 명절 때가 되면 화탈도를 향해 신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니 원근에 듣고 보는 이들이 누구나 안쓰럽게 여겼다.

 

후에 죄짓고 귀양 온 어떤 자가 천덕을 탐내어 좋은 말로 유혹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마침내 관가에 고발하여 위협하는 과정에서 곤장 80대를 맞는 데에 이르렀다. 이에 천덕은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여 풀려나왔다. 자기 친척들에게 ‘이놈이 분명 나의 재물을 탐낸 것이다’하고 드디어 옷 한 벌, 소 한 마리, 목면(木棉) 30단을 바치고서야 벗어나게 되었다.

 

또 애월방호소의 여수로 있던 자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을 시켜 감언이설로 천덕의 아비 김청을 회유했다. 그 아비는 딸을 여수에게 주기로 약속해버렸다. 천덕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화촉을 밝히는 날 저녁에야 비로소 알았다. 드디어 대성통곡을 하며 손수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 이튿날 아침에 스스로 목을 매어 금방 죽게 되었는데 그의 자녀들이 황급히 구출하여 거의 죽었다가 소생하였다. 다시 또 자기 머리털을 자르고 더럽고 해진 옷을 걸치고서 죽기로 맹세하니, 그 아비도 깨닫고 더 강요하지 못했다.

 

천덕은 나이 39세에 남편을 여의고 지금 60여 세가 되었다. 전후로 강포한 자에게 겁탈을 당할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 남편을 섬기지 않겠다는 수절은 시종일관 변치 않았다. 아무리 옛날의 열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으랴. 더구나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여 아비가 80여 세로 병상에 누워 있는데 천덕은 의상을 풀지 않고 밤낮으로 간병하며 약시중을 들었다. 곽지리 사람들은 모두 그 효성에 감동되었다 한다.

 

 임진과 조인후 둘의 인연으로 충암사와 천덕의 정문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연은 임진의 아들 백호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인연의 깊고 중함이 이리도 오래고 멀리 갈 수 있는 것이다. 
 글.사진= 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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