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주년을 맞은 <제이누리>가 또 새로운 연재물을 시작합니다. 흑돌과 백돌의 만들어낸 제주의 역사입니다. [제주바둑의 향기]는 바둑돌을 놓고 명멸한 인생사와 제주인들의 삶의 애환을 담아냅니다. 30여년 언론계에 몸을 담으며 그들의 인생사를 추적했던 장승홍 조선일보 전 사회부 차장이 제주바둑협회의 도움을 얻어 그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고수(高手)의 세계와 더불어 바둑판 세상에서 만나는 인간사 진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많은 애독바랍니다/ 편집자 주 |
전 세계의 바둑 인구는 70여 개 국 4,0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바둑계가 2010년에 4,200만 명으로 추계했다가 2012년 12월 추계는 3,800여만 명으로 추계했다. 이 추계에서 바둑 인구의 감소세를 보이지만 실상은 2010년 때 추계에서 중국의 바둑 인구를 2,500만 명으로 보았다가 2012년에 2,000만 명으로 낮춘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중국의 바둑 열풍으로 보아 바둑 인구의 감소세라는 의미는 적다. 오늘날 ‘일본 바둑계가 사망기’라는 일본 내의 바둑 위기설에 잔뜩 움츠린 추계라는 지적이다. 세계 2위의 바둑국은 한국으로 900만 명이다. 일본 500만 명, 대만 60만 명, 미국 20만 명 순이다. 한국기원은 한국의 바둑인구를 1,0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둑의 기원은 4300여 년 전 요순시대 창안설이 유력하지만 정확한 연원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바둑 실업팀인 신안천일염이 2013년 1월 첫 번째 연 바둑강좌가 ‘바둑의 기원’이었다. 이 강좌의 내용을 중심으로 바둑의 기원을 살피고자 한다.
“‘사서’에 요순시대의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요 임금의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둑판이 천문을 보는 도구였다가 티베트에서 먼저 바둑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요순 창제설이 정설로 내려온다. 기원전 약 23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인생의 축소판이라 일컬어지는 바둑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점점 번성했다. 바둑의 이치가 병법을 닮았기 때문이다.
초한(楚漢)시대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명장 한신이나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과 조조, 관운장 등은 모두 바둑의 고수였다. 적벽대전에서 중상을 입은 관우는 바둑을 두며 아픈 외과수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어 남북조시대에 바둑은 더욱 성해 왕족이나 귀족은 물론 궁중에서 여자들까지 바둑을 두었다. 그래서 중국의 옛 그림에는 여자들이 바둑 두는 모습이 등장했다.
왕은 당대의 최고수를 뽑아 자신의 바둑 사범으로 임명했는데 기대조(棋待詔)라는 관직이다. 중국 바둑은 당, 송 시대를 거쳐 명나라 때까지 유명한 국수들을 탄생시키며 위세를 떨쳤다.
신라 유학생 박구는 장안(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들렸던 시안‧西安)의 고수들을 모두 누르고 당 희종의 바둑 사범인 기대조가 됐다. 중국 역사상 외국기사가 당대 최고수 격인 기대조가 된 것은 박구가 유일하다.
중국 바둑은 청나라 말기부터 쇠퇴, 바둑 종주국의 자리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공산정부가 수립되면서 바둑을 스포츠로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주역이었던 진의(陳毅) 부총리는 “중국은 국력이 강할 때 바둑도 강했고 국력이 약해지면 바둑도 약해졌다”고 외치며 바둑 부흥에 앞장섰다. 이 말은 1995~2005년의 세계 바둑계를 독점했던 한국을 무너뜨리고 현재 한‧ 중 각축기로 만든 중국 국력이 뒷받침한다. 물론 문화혁명 때는 바둑이 ‘악취 나는 4 구’로 몰려 최고수 네웨이핑 9단이 멀리 흑룡강성까지 쫓겨 가 돼지우리 당번 일을 맡았다. 허나 현 중국 지도자 시진핑 주석도 바둑을 좋아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한‧ 중 정상회담 만찬 때 창하오 9단이 자리를 함께 했다. 중국은 20년 전부터 ‘한국 추월’을 내걸고 바둑 영재를 체계적으로 키웠고 바둑이 축구 다음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아 바둑 종주국이 되고자 염원하고 있다.
바둑 종주국을 구가했던 일본은 최근 들어 ‘일본 바둑의 사망기’로 친다.
일본은 국민들이 바둑을 즐겨 두자 한때 바둑두기를 금지 시킨 일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국시대 패자 오다 노부나가가 바둑을 좋아하면서 절의 승려를 중심으로 번져 나갔다. 오다 시절의 최고수는 적광사 본인방(本因坊)의 주지 닛카이. 본인방 가문의 시조인 그의 이름을 본인방 산샤라 했다. 산샤는 학문과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오다가 부하의 배반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목숨 걸고 오다의 시신을 수습하고 명복을 빌어 주었다.
오다의 심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자 히데요시는 산샤를 중용, 자신의 자문역인 군승으로 두었고 무장들에게 병법을 강의하게 했다. 또 히데요시는 사상 처음 바둑대회를 열었다. 산샤가 첫 대회에서 우승하자 바둑을 관장하는 책임자격인 기소의 증서와 함께 정식으로 녹을 내렸다.
그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장악하여 300년 막부시대가 시작되고 이후 일본의 기소제도는 확고한 기틀을 다졌다. 전쟁 끝에 평화가 찾아왔는데 거리에는 칼 찬 낭인들이 넘쳤다. 거친 전의를 평화로 마음을 바꾸기 위해 막부는 바둑을 적극 장려했다. 이리하여 당대 최고수는 9단, 9단은 명인이란 칭호와 함께 기소(碁所)로 임명됐다. 많은 복록과 명예가 뒤따르는 이 기소를 쟁탈하기 위해 본인방가 등 바둑만을 전문으로 하는 4개 가문이 탄생했고 4대 바둑 가문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바둑의 기술은 크게 진보하게 됐다. 기보(棋譜)를 남겨 대를 이어 연구하고 바둑판 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기도 했다. 그 와중에 유명한 묘수들이 속출하여 16세기부터 20세기 들어 1990년대 초까지 일본은 바둑 종주국이 됐고 한국에 이를 넘겼다.
우리나라의 바둑은 언제 부터일까.
중국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은나라의 현인 기자(箕子, 기원전 1175~1083)가 난리를 피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왔는데 그때(기원전 1122년) 바둑도 함께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사서’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좋아 한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고구려 국수였던 승려 도림의 애기가 있다. 도림은 장수왕의 밀명을 받고 바둑을 좋아하는 백제의 개로왕에게 가 상객이 됐다.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계략은 성공,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개로왕은 목숨을 잃고 만 얘기이다.
백제 의자왕은 일본에 수정으로 만든 바둑돌을 선물로 보냈다. 붉은 수정으로 만든 ‘홍아’와 푸른 수정으로 만든 ‘감아’는 일본의 보물로 남아있다.
신라의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은 노년에 바둑으로 여생을 보냈고 해인사에는 노승들과 바둑을 두었다는 석국(돌 바둑판)이 전해진다.
선조 때의 재상 유성룡은 국수급 바둑 실력이었고 우리 고유의 순장(巡將)바둑은 유성룡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난중일기’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바둑을 두었다는 장면이 16군데나 된다.
2005년 한‧중‧일이 겨루는 농심배에서 한국의 마지막 주자 이창호가 중국 3명, 일본 2명을 내리 불계로 누르고 우승했다. 중국 언론은 이백(李白) 촉도난(蜀道難)을 인용해 찬탄했다. ‘한 사내 관문을 지키니 만 사내 뚫지 못하네(一夫當關 萬夫莫開)’. 20년 가까이 누려온 한국 바둑의 전성기가 이를 고비로 흔들리고 있다. 바둑계에서는 1994년까지 일본 우세기, 1995~2005년 한국 독점기, 2006~현재를 한‧중 각축기(일본 사망기)로 보고 있다.
후한의 역사가 반고(班固)는 바둑 풀이를 “가로 세로 19줄 종횡 361로는 한 해를 상징하고 네 뒤는 춘하추동 사 계절을, 둘레의 72로는 72절후를 상징한다”고 했다.
중국 원나라 때 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바둑의 고전 현현기경(玄玄棋經)의 서문에 있는 글이다.
“대저 바둑에는 음과 양의 움직임이며 고용한 이치가 있고 별들이 분포하는 서열이 있고 풍운이 변화하는 기틀이 있고 봄과 가을을 살리고 죽이는 권도가 있고 산하(山河)의 겉과 안 같은 형세가 있고 세도의 오름세와 내림세, 인사의 성하고 쇠하는 이치가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장승홍은? = 연합뉴스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을 끝으로 은퇴한 원로 언론인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제주지부장, 제주불교법우회 회장, 제주도불교청소년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불교와 청소년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제주청교련 회장도 지냈다. 청년시절부터 다져온 바둑실력은 수준급이다. 제주바둑계의 원로와 청년을 두루 아우른 친교의 폭이 넓다. 최근 본인이 직접 취재현장에 나서 제주바둑계의 역사를 정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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