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는 사실 통곡의 땅이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한국사만이 아닌 세계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서 뚝뚝 흘렸던 눈물마저 있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의 이면엔 순박한 지역민들의 좌절과 분노, 절망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그 아픔의 현장에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이 자리하고 있다.
한반도 본토와 중국, 일본의 한 가운데 자리한 제주도. 그 가운데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 대정읍 지역은 한국 근현대사의 생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대정 지역은 일본 제국주의 침탈과 제주 4.3, 한국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상징적 공간이다. 지난 11일 그 현장을 다녀왔다. 제주포럼C가 주최한 '제주에서 바라보는 제 2차 세계대전' 제주탐방 행사다. 다시금 되새겨보는 역사의 현장을 동행했다.

#피 얼룩진 역사를 품은 송악산…제주의 어머니제주의 바다와 산 그리고 들을 모두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길이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됐고 올레꾼들은 첫손으로 꼽는 제주 올레의 하이라이트. 산방산과 송악산 풍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를 연결하는 해안 길이다.
모슬포에서 동쪽으로 오른편에 바다를 끼고 걷는 기분은 남다르다. 푸른 바다와 너른 대지가 교차하는 풍경 속으로 뻗은 길은 송악산으로 이어진다. 걸어서 4km 남짓. 두어 시간이면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길의 왼편에 있는 너른 평야와 송악산은 단지 감상만 하고 지나기엔 생채기가 너무 깊다. 일제 강점기 때 제주 사람들이 강제노역으로 끌려나와 만들어진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지하벙커, 고사포 진지, 지하호, 탄약고 등 다양한 군사시설의 흔적이 가득하다.
이번 포럼에 참여한 우선혁씨는 "요즘 젊은이들은 제주의 역사를 모르고 살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며 "제주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겉으로 드러난 전쟁의 흔적도 있지만 땅 속에 숨겨져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지하벙커와 '섯알오름' 일제 동굴진지를 돌아보며 당시 전쟁의 상황을 회상하고 무심코 넘어갔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쟁의 상흔이 선연한 뼈아픈 제주의 생채기
제주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어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국 북부에서 시작된 중일 전쟁이 중국 중부까지 확대되자 제주도가 전략상 요충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군 항공기들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대한 폭격을 위해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항공기지에서 출격을 했지만 귀환하는 장소는 제주도였다. 당시 일본에서 출격한 폭격기의 급유를 위한 중간기착지로 모슬포 기지를 세웠던 것이다.
1931년 3월 일본해군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한 비행장 건설은 60만㎡의 비행장을 완성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이후 1937년 40만평으로 확대하는 2차 확충공사에 들어간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알뜨르 비행장에서 전투기를 띄웠고 아카톰보(빨간 잠자리)라 불리던 훈련기를 둔덕 같은 은폐용 격납고에 숨겨두었다.

#관광지…아픈 역사를 간직한 진지동굴
알뜨르 비행장 주둔부대는 오오무라 해군항공대였다. 중국 난징을 폭격하는 96식 육상공격기의 기착지로 썼다. 그러나 일본 패전이 뚜렷해지면서 미군기의 일본 본토 공습이 활발해지자 비행 제 56전대가 제주도로 들어와 B29에 대한 해상 요격전에 참가한다.
이는 본토결전 작전의 일부로 1944년 11월 사세보 진수부에 있던 제 951해군항공대의 일부가 이곳에 배치된다. 육군은 제주도 주둔군 중 최정예인 제 111사단을 중심으로 포병대를 배치, 알뜨르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대공방어와 송악산 해안특공시설을 통해 해상자살공격을 준비했다. 이를 위해 마련된 것이 송악산 어뢰정기지다.
전쟁의 상처가 가장 확연히 남아있는 곳 중 하나인 이곳은 송악산이 바다를 접한 해안 절벽에 15곳의 인공 동굴진지 참호를 뚫어놓았다. 어뢰정 기지로 활용됐던 이곳은 일본군이 뚫어놓은 인공 동굴로 당시 일본군은 목조보트에 포탄을 싣고 미군 잠수함을 격침하게 위해 자살공격을 강행하기도 했다.
영어 통역가이드를 하고 있는 포럼 참가자는 "현재까지는 통역을 하며 관광지를 설명해 왔는데 앞으로는 역사를 함께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관광지로만 보던 시선과 달리 당시의 전쟁 상황과 접목시켜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가족의 시신을 묻은 송악산…잊지 못할 '전쟁의 상처'송악산 옆 '섯알오름'은 학살터다. 한국전쟁 시기 예비 검속돼 1950년 7월 16일과 8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252명의 주민이 집단 학살됐다.
역사문화진흥원 강순원 특별연구원은 "제주의 지정학적 특성상 위험한 것은 현재까지도 변함이 없다"며 "전쟁의 현장을 통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강정해군기지 건설을 다시금 되짚어봐야 할 문제"라고 전했다.
현재 이곳은 감자와 마늘을 심은 밭으로 탈바꿈 했다. 그러나 당시 전쟁의 아픔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역사의 현장에서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제주에서 바라보는 제2차 세계대전'은 제주포럼C에서 주최하는 '제주탐방'프로그램이다.
19회를 맞이한 제주탐방은 매월 두 번째 토요일에 진행되며 제주의 역사와 생태, 문화현장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다. 문의: 제주포럼C 담당자 송지영 010-8886-1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