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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제주해녀와 삶(6)] 내 생애 첫, 그리고 너무도 큰 상

 제주해녀가 세계를 품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당당히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와 대한민국의 쾌거다. 하지만 해녀는 아직도 우리의 시선에선 그저 물질이나 하며 생계를 꾸린 제주의 독특한 전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엄연히 삶이 있고, 애환이 깃든 가족·가정사가 있으며 저승길 문턱을 오가며 가슴에 파묻은 눈물이 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제주사(史)를 일궈온 해녀의 삶, 그리고 그 인생사 이야기들을 연속기획연재 형식으로 허정옥 교수가 풀어낸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서귀포 법환해녀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의 어머니가 해왔던 해녀의 삶을 오롯이 되살리고자 스스로도 물에 뛰어들고 있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바다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바당 어서시민 어떵 살아시코 이)?’란 제목으로 <제이누리>가 주관한 ‘제주어 보전-아름다운 제주말·글 찾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받아본 큰 상인데, 아마도 이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상일 것 같다. 나는 1923년생, 올해로 94세다.

 

‘내가 어떻게 해녀의 삶을 살아왔는지’를 회상하면서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은 이야기를, 우리 집 여섯 번째 딸이 사흘 밤낮을 받아 적었다. 이제는 가는귀가 멀어서 바다에서 물질할 때 외치던 것처럼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다. 우리 딸이 파도소리보다 더 크게 웨울르멍(외치면서) 몇 번씩 내가 하는 말을 되묻고 확인하느라고 목이 다 쉴 정도였다. 이 자리를 빌려서 고맙단 얘기를 전하고 싶다.

 

 

 

내 방에 ‘상패’를 세워놓고서 한 글자 두 글자 손가락으로 읽어보는 심정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기쁘다거나 대단하다,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한없는 감사다. 망망대해 앞에 망연자실 서서 내가 헤엄쳐 온 인생의 바다를 고즈넉이 바라보면,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살아온 삶의 전부가 바다이고 보면, 이 상패 안에 내 물질 인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사흘쯤 파도치고 나면 나흘쯤은 잔잔한 제주바다처럼, 그래도 내 인생은 눈물겨운 고생 가운데 웃음 짓는 행복도 참으로 많았다.

 

고마운 나의 바다, 어떤 말로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제주바다를 위해서 내 딸에게 제주어로 된 글의 내용을 표준어로 다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바다를 자기의 바다로, 어머니의 바다를 딸의 바다로 대를 이어 숨비질 하고 싶은 내 딸은, 이 글을 옮기면서 다시 그 소원을 빌고 또 빌리라.

 

이 글은 대부분이 내 삶의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우리 딸은 ‘논픽션’이라고 불렀다. 다시금 회상해 본다. 정녕 내 인생에 바다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렇다면 아마도 그것은 픽션, 허구일 것이다.

⌜나는 바당 곁에 살면서 바당밭을 공짜로 벌어먹으면서 아홉 오누이를 다 먹여 살린 해녀할머니입니다. 우리 여섯 번째 딸이 제주말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을 해보라고 하도 해서 좀 얘기해 볼 테니 들어보시지요.

 

내가 세 살에 아버지가 고기 잡으러 갔다가 그만 배가 바람에 불려버려서 바다귀신이 되어버리니까, 어머니랑 같이 큰 오빠 집에서 머슴일 하면서 살았습니다. 다섯 살이 되니까 밭고랑에 앉아서 김을 맸는데, 조반을 제대로 못 먹어서 기운이 조금도 없는 겁니다.

 

큰 오빠 딸이 내게는 조카이지만 나이가 같아서 그렇게도 나를 구박하는 겁니다, 밥을 먹으려고 하면 ‘빨리 먹어라, 많이 먹는다’ 하면서 재촉하고, ‘밥은 조금 먹고, 물은 많이 먹어야 더 큰다’ 하면서 잔소리 하고. 어린 때 생각하면 지금도 배고파서 울던 생각이 서럽습니다. 그땐 어머니들도 아이들한테 ‘물도 못 마시고, 배도 고파봐야 세상 물정 안다’ 하면서 배고파서 우는 아이들을 달랬습니다.

 

밭일은 왜 그렇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일까요? 땅강아지처럼 밭고랑에 엉덩이 붙여 앉아서 하루 종일 빽빽하게 많은 김을 매다보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생각이 그렇게도 나는 겁니다. ‘나도 아버지만 있었으면 학교 길을 밟아 봤을 텐데’ 하면서 한숨도 많이 쉬었습니다.

 

그래도 고생하는 어머니 생각하면서 질끈 참아서 부지런히 호미로 자갈밭을 쪼았습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어깨가 아프고, 정강이가 저리고 하는 건 참을 만한데,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게 제일 괴롭더군요.

 

그러니까 벗들이랑 물 때 맞춰서 보말 잡으러 바다에 가는 일이 놀러 가는 것처럼 그렇게도 좋았습니다. 우리 동내 계집아이들은 일곱 살만 되면 바다에 가서 물질을 배웠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다 같이 물에 들어가서 누가 제일 오래 물 속에서 숨을 참고서 견디는지, 누가 먼저 돌멩이를 빨리 주워서 나오는가, 누가 저 동굴이 있는 큰 바위까지 빨리 헤엄치고 갔다 오는가 하는 게 물질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물질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열 두 살이 되니까, 우리 언니가 지붕 위에서 제일 똘똘한 박을 하나 따다가 테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속곳(소중이) 입고, 작은 눈 쓰고, 머리에 수건을 질끈 졸라매니까, 진짜 잠수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라를 잡아서 망실이에 담으면서, ‘호오이, 호오잇’ 하는 숨비소리를 질러보니까, 진짜 좀수가 된 것 닮았습니다. 대포 바다가 모두 내 꺼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도 기쁠까요?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서 소라, 문어, 오분작을 잡으면서 어른 물질하듯 아기상군질을 잘도 하였습니다.

 

열일곱 살 되니까, 부산 곁에 있는 ‘밀포’라고 하는 데로 초용을 갔습니다. 3월에 나가서 8월 명절에 오는 거니까 꽉차게 반 년을 집 떠나서 일하는 것이랍니다. 선주가 날 어리다고 하면서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니까 애기업개로 바짝 달라붙어서 같이 갔습니다.

 

그래도 거기 도착한 후에는 다른 잠수들이랑 줄곧 물질을 같이 했습니다. 물이 별로 깊지 않은 갓바다에서 우미를 채취하는 일이니까 별난 기술이 없어도, 욕심 있고 부지런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어떨 땐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가서 난바르 물질을 했는데, 잠수들이 번갈아가며 노를 저으면서 잘도 서럽게 노래를 하는 겁니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목숨 걸고 이 물질 해서 어느 남편 먹여 살릴건가?’ 그 소리가 어떻게나 서러운지, 나도 잠수 어른들이 우는 틈에 앉아서 같이 눈물 덩어리나 흘렸습니다. 물질 하다가 보면 암반같던 내 허리가 청대같이 다 말라버리지요.

 

그 물질을 마치고 집으로 온 후에는, 두 번 다시 육지물질은 가지 못했습니다. 육지 사람들이 나를 보면, ‘밥통 주웠다’ 하면서 며느리 삼으려고 하도 하니까, 내 속으로 ‘어떻게 할까’ 하면서 살짝 걱정이 되는 겁니다. 육지에선 ‘제주 여자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식구들을 모두 먹여 살린대’ 하는 소문이 나 있는 겁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때는 물질처럼 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잠수들이 악착같이 물질하면서 돈 벌고, 쉬는 날에는 주인댁 밭일 해주고 밥을 얻어먹으면서 절약하고 하니까, 물질이 끝나면 반 한 뙈기씩 살만큼 돈을 벌었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우리 큰 오빠가 어쩌다가 알아버린 모양입니다. 어떻든지 돈 더 벌어서 우리 어머니 기를 펴고 넉넉하고 편안히 살게 하려 했는데, 그만 같은 동네 사는 총각한테 날 시집보내버렸습니다.

 

 

시집은 대포 일등 가는 부잣집이니까 어떻게나 작은밭들이 많은지, 일 부자도 그런 일 부자가 없는 겁니다. 아이고, 내 팔자에 무슨 호강할 일이 있었으랴 만은, 시집보내면서 우리어머니가 ‘아무리 일이 많아도 엉덩이 붙이지 말고 할아버지 할머니 시키는 대로 하루하루 살다보면 살아진다’ 말해준 말씀 생각하면서 참으면서 견디면서 살았습니다.

 

그 밭일을 도맡아 하면서 계속 물질도 같이 하면서, 딸 일곱에 아들 두 형제를 해 거르면서 낳았습니다. 우리가 종손이어서 증조할머니도 같이 모시고 한집에 살았습니다. 한솥밥을 먹는 식솔이 열두 명이 넘어버려서 반찬이나 제대로 차려서 먹어졌겠습니까.

 

매일 동 트기 전에 일어나서 말치솥 가득 보리쌀 삶아놓고, 고구마나 감자도 곁에 많이 쪄서 놓아두고, 텃밭에 채소 캐다가 씻어만 놓으면, 아이들이 일어나서 찬장에 있는 자리젖이랑 마늘장아찌랑 자기만씩 주워다가 밥 먹는 거지요. 고소한 것 들쩍지근한 것 하나 없어도 반찬 없다고 화내는 사람 없었습니다. 입매 짧게 얼쩡거리다가는 자기 모가지만 가늘어지는 거니까요.

 

아이고 참, 우리 집이 길 곁에 있어서 지나가던 거지도 부엌에 들어와서 자기 마음대로 솥뚜껑 열어서 밥 퍼 먹고 가곤 했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육지에서 와서 돌아다니는 거지랑 미친사람이랑 상이군인이 그렇게도 많았을까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항아리에 물 한 허벅 길어다 놔 두고 어두룩한 밭으로 갈옷 걸치면서 내달려가다 보면, 빗질 못해서 헝클어진 머리랑 밥 못먹어서 침 흘리는 모양이, 나도 영락 없는 바보였습니다.

 

남편이 워낙 일을 잘 하니까 형님이 자기네 밭까지 우리한테 벌어먹으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낮이나 밤이나 일만일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밤중에도 달이 밝으면 보리를 훑든, 볏짚을 묶든, 말린 고구마를 줍든, 몸뚱이를 돌덩어리처럼 부지런히 굴렸습니다.

 

가을이 되면 겨울에 소 먹일 꼴 베러 한라산에 올라갔습니다. 오며 가며 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이틀 사흘씩 들판에 자면서 밤을 낮 삼아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는 집안일이랑 웬만한 밭일들은 딸들이 도맡아서 하였습니다. 토요일이 돼서 딸 일곱이 나란히 앉아서 김을 매면, 한동네 사람들마다 지나 가면서 오면서 “정열이 어머니는 좋겠네. 일 잘 하는 딸들이 이렇게도 많으니까” 하면서 그렇게도 부러워했습니다.

 

나는요,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라’ 하면서 그렇게 착한 우리 딸들을 재촉하면서 부려먹었습니다. 그렇게 잔소리 하면서 외쳐도 우리 아이들은 잠잠히 내가 얘기하는 대로 말도 잘 듣더군요. 아이고, 셋째 딸쯤은 ‘어머니 덕분에 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하면서 빙긋빙긋 웃는 겁니다. 요새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이렇게 잔소리 하는 것을 일컬어 ‘가훈’이라고 하더군요.

 

해가 긴 여름이 되면 어떻게나 뼈가 부서지게 일이 많은지, ‘소로도 못 나서 제주여자로 났구나’ 하던 우리 어머니 말이 서럽게 생각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새벽에 밭으로 내달려 가서 어슴프레 할 때 일을 시작했지요.

 

해가 중천에 올라와서 땀이 범벅이 되면 태왁을 지고 바다로 내달립니다. 물때에 맞춰서 모여든 잠녀들이랑 같이 숨이 차도록 물질을 해서 망시리 가득 소라를 잡게 되면, 오후 네 다섯 시에 다시 밭으로 돌아와서, 매다가 중단해 놓은 김을 다시 맸습니다. 서 너 시간 일하다 보면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다시 어둑어둑 하면 하늘에 숭숭 뜬 별을 보면서 시간 가늠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은 딸들이 당번을 정해서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하는 거 닮은데, 나야 밥을 먹어서 살았는지 말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딸들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 인정하는 착한 아이들입니다. 우리 집 남편이, ‘우린 딸이 일곱이니까 살았지, 아들이 일곱이면 못 살았을 거야’ 하면서 그렇게도 딸 자랑을 했답니다. 한 여름이 지나면 내 몸도 거미처럼 와상하게 마르고 시커멓게 타지요. 생각해보면 사람인지 소인지 모르게 일만 하면서 살아온 세월입니다.

 

아이고, 사람 사는 거야 다 비슷하지만 물질하면서 아기나면서 김매면서 살아 온 제주해녀같이야 험악하겠습니까? 해녀박물관에 가보면, 내가 물질하면서, 아기나면서 고생한 소리를 들어질 것입니다. 어느 때인지 젊은 사람들이 사진기랑 녹음기라 하는 거랑 가지고 와서 내가 말하는 소리를 기계에 담아서 갔습니다. 그 소리를 한 번 들어보시지요.

 

아기를 배도 낳는 날까지 열 달 동안 계속 물질을 했어. 아기가 나오면 이틀 만에 다시 물에 들어가고 하면서. 그런데 아기가 빠져버리면 배가 홀짝해서 자꾸 엉뚱한 데로 넘어지고 휘청 휘청 하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수건으로 허리를 질끈 졸라매고서 물질을 했지. 하루는 물질하는데 아깃배(산통) 맞춰서 배가 막 아파오는 게 아니겠어. 참다가 못하니까 물에서 나와 막 서둘러 집으로 내달렸지.

 

동산 하나를 더 넘어야 우리 집인데, 그만 아기가 막 떨어질 듯 하는 거 아니겠어. ‘아이고, 설운 아기야. 조금만 참았다가 나와 주라. 이 길 바닥에 떨어지면 너도 고생, 나도 창피 아니겠니. 아무려면 저기 보이는 집까지야 못 참겠느냐. 어떻게 견뎌보자 얘’ 하면서 달랬지.

 

하마터면 마당에서 나올 듯하더니만, 그 애가 효자인지 저녁밥 먹고서 좀 더 있다가 나와 줬어. 아이들이 그처럼 다 착해서, 모두 저녁에 나와 준 것 닮아. 생각해 보면, 나 혼자 물질한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모여들어서 다 같이 도와주니까 한 거지.

 

한 세상 사는 것, 한 순간이야. 바다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바다 밭, 참으로 고마운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순전히 바다 바람에 구 남매를 다 공부시켜졌어. 물질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거니까 잘도 위험한 일이지만, 세상살이야 싸는 물 있으면 드는 물 있는 거 아니겠어?

 

아무리 죽어질 듯해도 참으면서 사노라면 다 살아지는 거지. 우리 어머니가 살아온 것처럼 자식 하나 믿고 살다 보니까 한 세상 잠깐처럼 살아졌어. 내가 올해로 구십 넷인데, 요새같이 정정하면 백 살까지는 살아질 듯 해. 우리 동네 부택이 어머니는 백 한 살까지 살았거든.

 

자식 들 고생시키지 말고 움직일 때까지 내 손으로 밥 해 먹다가 한 사나흘만 드러누워서 우리 남편 있는 저 천당으로 가지면 잘도 좋겠네. 이게 내 분수없는 소원이지!<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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