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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룡의 '담담(談談)클리닉'(33) 뇌과학 접근 중요 … 독자적 가치 소외될 수도

 

<기억은 미래를 말한다>(한나 모이어, 마르틴 게스만 지음, 문예출판사)를 읽었는데요. ‘뇌과학과 철학으로 보는 기억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부제인데 인간에게 기억이 갖는 의미에 대해 방점을 둔 책이라는 느낌이었어요. 뇌과학보다는 철학에 더 무게를 실은 거죠.

 

뇌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최근에는 모든 정신현상을 뇌의 물리적 작용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게 대세지요. 가령 해리장애는 해마(hippocampus)와 언어표현 영역(Broca's area)에 활성저하가 돼 있다, 뇌피질의 단절과 관련이 있으며 언어생산 등 고위 인지기능이 방해받고 있다, 이런 형태로 말이죠.

 

인간 이해에 생물학적 접근도 중요합니다만 그 부분만 강조하다보면 어떤 결핍감을 느끼게 되요. 전체로서 사람이 어딘가 소외되는 느낌이랄까. 그 사람만이 갖는 경험, 비슷한 경험에 대한 그 만의 생각과 감정, 등 개인의 독자성과 독자적 가치는 구석 자리로 내몰려 소외된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요. “네 뇌의 물리적 현상에 관심이 있지, 네겐 관심 없어.”

 

“얘가 정신적 충격으로 넋이 나갔어.” 종종 그런 말을 하잖아요. 오늘은 그런 것과 관련해서 생기는 망각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과거엔 심인성 기억상실이라고도 불렸지요. 해리장애(Dissociative Disorder)의 일종입니다.

 

<Synopsis of psychiatry>(Kaplan & Sadock 지음)에 ‘넋이 나간’ 모습으로 길을 헤매는 한 여성의 사례가 나와요. 주변 경찰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몇 마디 물어보는데 횡설수설해요.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죠. 이름은 바바라였어요. 바바라는 경찰이 발견하기 전 약 8-9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 기억도 하지 못했어요. 왜 자신이 생소한 그 곳을 걷고 있었는지도. 겨우 떠올린 건 어느 주차장이었죠. 선명하고 강렬했지만 마치 환시 같았어요. 주차장에 차가 꽉 차 있었고 도와달라며 누군가에게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아무 의미도 잡지 못했고요.

 

정신과에 입원해서 숨겨진 기억을 찾으려 했지만 망각 상태는 계속됐습니다. 반면에 짧지만 몹시 고되었던 자기 삶은 자세하게 말할 수 있었죠. 부모는 어린 시절에 이혼했어요. 엄마가 여러 남자와 난잡한 성관계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요. 부모가 이혼하고 처음에는 엄마와 살았어요. 엄마는 여러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생활을 계속했고요. 때론 엄마를 찾는 남자들이 바바라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바바라가 엄마를 떠나 아빠에게 갔을 때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았어요. 아들을 낳았죠. 나이 17세에 미혼모가 된 겁니다.

 

아기와 지내는 시간만이 작은 평화라고나 할까 아빠 집에선 편한 날이 거의 없었어요. 아빠 뿐 아니라 오빠와도 격렬하게 언쟁하고 다투는 삶이 연속됐죠. 2주 전까지도 크게 싸웠어요. 바바라는 이대로 있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았어요. 새로운 남자친구 프랭크만이 편안함의 원천이었습니다. 프랭크에게 몹시 애착했죠. 그를 매일 찾았지만 두통과 어지러움, 피곤함은 점점 심해진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불안하고, 우울하고, 절망감도 커지고 있었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을 찾아간 것 같아요. 그리고는 안개처럼 모호해요. 시간상 마지막 기억은 프랭크가 일하는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버스 정류장이에요. 이후는 깜깜.

 

병원에서 1주가 지났지만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았어요. 결국 최면을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바바라는 최면에 잘 반응했어요. 바바라는 두드러지게 감정을 실으며 자세하게 말했는데 망각 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두 드러났습니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서 실망이 컸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방황하다 프랭크 생각이 난 거에요.

 

충동적으로 그가 일하는 공장 사무실을 찾아가기로 결정했죠. 사무실 주차장에 다 왔는데 저기서 차를 타려는 프랭크를 본 거에요. 그를 부르며 달렸지만 늦었어요. 차는 이미 출발한 겁니다. 홀로 남겨진 바바라는 절망했죠. 갑자기 어지럽고 겁도 나면서 극도의 실망과 분노, 버리진 느낌 등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포기했어요.” 바바라는 멍한 상태로 목적지도 없이 길을 따라 헤맸던 겁니다.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 바바라는 아픈 기억을 모두 되살렸습니다. 트랜스 상태에서 완전히 회복됐고 망각의 재발도 없었죠. 다른 해리 증상도 없었고요. 퇴원 후에 바바라는 정신과 외래를 다니며 자신이 처한 감정적 어려움을 차근차근 직면할 수 있었다고 해요.

 

바바라의 경우를 두고 해리성 기억상실(disssociative amnesia)이라고 합니다. 대게 갑자기 발생하고, 초기에는 모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기억상실을 압니다. 기억상실 전후로 약간 의식이 흐려지기도 하지만 멀쩡한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선행하는 우울병이 흔한 예측 인자지만 대게는 해리성 기억장애와 공존합니다.

 

어릴 적 신체 학대와 같은 외상과 연관성이 높다고 합니다. 환상 경향이 높고 피암시성이 높은 사람에게서는 외상 경험이 없어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해요. 피암시성이 높다는 건 바바라처럼 쉽게 최면에 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해리가 소아기 외상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인간의 정신현상에 대해 뇌과학, 생물학 접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 말하다보면 하나의 우주로서 전체로서 유일한 개인이 소외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다 바바라 사례와 해리성 기억상실(망각)을 그려봤습니다. 두서 없지요?

 

이범룡은?
=제주 출생.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002년 고향으로 돌아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문을 열었다. 면담이 어떤 사람과의 소통이라면,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 또한 치유의 힌트가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 서귀포시 <밝은정신과>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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