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과 서복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236년 전, 기원전 219년(진시황 28)에 중국을 통일한 후 전역을 순행하던 진시황은 산동성 교남시에 있는 낭야대에서 서복과 만난다.
신선의 술법을 닦는 방사였던 서복은 진시황에게 “신선이 사는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 바다 가운데 있는데, 동남동녀를 거느려 불사의 선약을 구해오겠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진시황이 허락하여 서복은 동남녀 삼천명과 오곡 종자 및 백공을 거느려 바다로 떠났다. 이 사실은 비단 『사기』에만 기록된 게 아니라 이후 『한서』, 『후한서』 및 『삼국지』 등 중국 정사에 항상 기록되어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복이란 인물은 전설상의 존재가 아니라 중국 역사 속에 실재했던 인물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일본에는 큐슈의 사가현, 가고시마현 및 혼슈의 미에현, 와카야마현, 가고시마현, 야마나시현 등 10곳이 넘는 곳에 서복의 도래 및 정착과 관련한 유적지가 전하고 있다. 특히 와카야마현 신구시에는 서복의 무덤으로 전하는 서복묘 옛터도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서복이 일본 학문의 시조로까지 인식하는 사례도 우리 역사 기록(박지원, 『연암집』)에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서복과 관련하여 중국과 일본에는 역사 기록으로뿐 아니라 유적지까지 실재하며 오늘날 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한 서복 학술 탐구가 이루어져 왔다. 우리나라는 서복 관련 도래설이 주로 전설로 전해오고 실질적 유적지가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 기록 및 구비 문학 등을 통해 서복의 도래설과 관련하여 다수 지역에서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제주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이하 서복협회)를 통한 한중일 삼국간 학술 문화 교류는 이미 20년이 다 되어 학자 및 관련 단체들을 통한 인적 네트워크가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하지만 서복을 매개로 한 한중일 삼국간 교류에서 우리나라의 역할은 그동안 학술적 부문에서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관광 및 불로초 등과 연계한 단순한 문화 관광 교류의 일환으로 이루어져 왔다. 최근 들어서야 서복 관련 문헌 탐구 및 구비 문학 등 역사와 문학 분야에서는 보다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져 보다 깊이 있는 연구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서복을 매개로 한 고대 동아시아 해양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및 제주도는 그 거점 지역으로 주목을 받으며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옛 문헌 기록을 통해보면 서복 관련 기사가 상당수 전해 온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남긴 문집 속에 서복은 우리 민족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존재였다. 418년 신라 눌지왕 때 일본에 건너가 인질로 가 있던 왕의 아우를 구출하여 본인은 일본에서 죽은 박제상을 추모하는 눌지왕의 가사(『우식곡』)에 이미 일본을 ‘서복해’로 불렀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명문장가이며 당나라에서 고관까지 역임했던 고운 최치원은 우리나라에 서복이 왔었다는 사실을 중국에 알리고 있다(『고운집』). 그 이후 고려, 조선시대에는 이곡, 이색, 정몽주, 신숙주, 김종직, 이항복, 김성일, 이익, 안정복, 박지원, 정약용 등 총 55명의 문집에서 135건의 서복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전한다.
시문의 형태로 소개한 이들 선인들의 기록엔 서복의 동도설, 불사초, 일본의 서복사, 우리나라 서복의 전승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정몽주는 1378년(우왕 3)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읊은 한시에서 일본에 ‘서복사’가 있으며, 서복이 일본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조선후기 일본을 다녀왔던 우리 외교사절단인 ‘통신사’의 사신들도 일본 유학자 및 승려와 지방 수령에게 서복과 관련한 유적 및 그 영향 등에 대해 항상 묻고 답하며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익(『성호사설』), 이덕무(『청장관전서』), 한치윤(『해동역사』), 이규경(『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백과전서 저술에서는 서복과 관련한 토론과 논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우리나라의 서복 전승지와 관련해서도 고려, 조선시대에 이미 회자되며 여러 곳이 등장하고 있다. 이곡(『가정집』), 황준량(『금계집』), 김상헌(『청음집』), 정온(『동계집』), 조엄(『해사일기』), 박태무(『서계집』), 박대양(『동사만록』) 등의 문집에는 제주도, 부산 동래, 거제도 등이 서복이 다녀갔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임제(『남명소승』), 김상헌(『청음집』), 정온(『동계집』), 남구명(『우암집』), 박태무(『서계집』) 등의 문집에서는 제주의 서복 도래 및 불사초 등과 관련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에서 서복은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에서 관심을 받고 깊은 논의가 오가던 주제였다.
이에 비해 오늘날 우리나라의 서복 인식 및 탐구는 오히려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떨어지고 무관심의 상태로 남겨져 있다. 우리 역사에 기록되고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던 서복 관련 탐구가 퇴보를 답보하며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옛 문헌 및 역사에서 조명 받았던 서복에 대한 학술적 탐구를 보다 본격적으로 깊이 있게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서복은 한중일 삼국간 해양문화의 교류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한자를 매개로 한 문화교류, 농경문화의 전파, 서적과 지식의 전파, 신선사상을 토대로 한 인류사회의 이상향 탐색, 정복과 전쟁이 아닌 상호 우호의 평화교류 등 한중일 삼국간 공통요소를 추출하며 다양한 연구 주제가 수행되어야 할 분야이다.
다만 유념할 점은 서복 문화의 출발점과 종착점인 중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서복 연구와 교류를 면밀히 관찰하며 주시해나가야 한다. 여차하면 논의에서 배제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입장과 역할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그 위상 설정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민간⦁학계⦁관계 등에서 힘을 하나로 모아 서복 문화에 대해 우리나라가 그 두 나라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그에 맞춘 연구 성과와 콘텐츠 개발 등을 주도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서복에 대한 연구 및 논의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중국과 일본에 한참 뒤처지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화교류에 배제되고, 깊은 학술적 연구와 다양한 문화 콘텐츠 개발의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제주 지역보다 10여 년 늦게 출범한 경상도 지역의 서복 관련 단체들은 최근 들어 보다 활발히 중국 및 일본과 교류를 꾀하며 내실을 다져가고 있다. 이미 20여 년 전 중국, 일본과 서복 교류의 물꼬를 텄고 지금까지 면면히 계승하고 있는 제주의 서복협회가 이와 같은 후발 서복 관련 단체들의 형님 노릇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즉 제주의 서복협회가 우리나라 서복 관련 단체들의 역량을 한 데 모아 통합된 서복협의체를 발족시키고, 그 본부를 제주에 두며 한중일 삼국의 서복 문화교류를 보다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제주도가 주도하는 해양문화의 교류’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이에 가장 합당한 소재로서 ‘서복 학술 탐구 및 문화 축제’라는 부문으로 제주도와 의회는 앞장서서 후원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관계 기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지원하는 체제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홍기표 제주도 문화재위원]